빨리 출국하라는 어머니의 전화가 울렸다.
"다음 달에 너희 아버지랑 베트남에 좀 다녀와 주라."
오랜만에 울린 어머니의 전화였다. 어머니의 부탁은 명확했다. '다음 달', '아버지랑', '베트남에'. 어머니는 아들에게든 며느리에게든 뭘 좀 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들의 인생은 그놈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다. 20년 전 아들이 군대에 갈 때에도 그랬다. 아들 입대 날 다른 엄마들은 세상 무너진 것처럼 펑펑 울기도 한다던데 어머니는 달랐다. 마치 매일 가는 학교에 보내 듯했다.
'군대 잘 갔다 와 아들. 다음에 보자.'
물론 나이 든 자식들 아직도 품에 보듬고 있는 엄마에 비하면 이 편이 훨씬 건강하다. 결혼을 하고 내 자식을 낳으니 더 느낀다. 쿨한 어머니, 참 좋다. 자식이 뭘 어떻게 하길 바라지 않는 부모는 얼마나 자식을 편안하게 하는가. 어머니를 보며 나도 아들에게 바라는 것 없는 아빠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 바라는 게 없긴 어려울 것 같다. 바라는 티를 안 내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 어머니가 갑자기 내 삶에 꽤 부담을 주는 부탁을 했다. 아버지랑 베트남에 다녀오는 건 대충 생각해 봐도 얼마간의 시간과 돈, 상당한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다. 게다가 다음 달이라니. 당장 준비해도 빠듯하다.
비행기 표는 있을까?
7월의 베트남 날씨는 어떻지?
한국도 이렇게 더운데 72세 우리 아버지 베트남 갔다가 쓰러지는 거 아닐까?
코로나가 끝난 이후로 보복 여행인지 뭔지 엄청들 나간다던데, 괜찮은 숙소가 남아 있을까?
아차, 여권 만기 되어가는데? 여권 갱신할 시간이 나올까?
입대하는 날, 나는 좀 섭섭했었다. 우리 엄마도 군대 가는 아들 볼도 좀 만져주고, 애틋한 표정도 지어주길 바랐던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어머니보단 감성파다. 눈물도 많고 여운도 많다. 이 장면에서 관객 울려야지 작정하고 만든 영화에선 웬만하면 우는 남자다. 제작자의 의도는 존중해줘야 한다. 얼마 전 '엘리멘탈'을 보고도 울고 말았다.
내가 어머니와 다른 건 내 DNA의 절반, 아버지 때문이다. 군생활 내내 힘들 때마다 꺼내 읽었던 편지는 아버지의 편지였다. 어머니의 편지를 읽을 때는 담담하던 내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는 첫 문장을 읽자마자 펑펑 울었다. 투박하고 단순한 문장에 꾹꾹 눌러 담은 아버지의 마음이 어찌 그리 가슴에 꽂히던지. 아버지는 지금도 스물둘 국군 아저씨가 그 편지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 아버지가 자기 감성이 철철 넘쳐흐르는 기분파는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 감성은 철저히 절제한다. 대신 다른 이들의 감성을 이해하고 용납해 주는 배려가 극적으로 발달했다고 할까. 상대가 얼마나 특이하고 무례하든 상관없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어도 괜찮다. 타인의 감성은 다양하고 소중하니까. 남을 먼저 배려하는 선택을 70년 넘게 하면 아마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아들을 포함한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같이 외식을 하면 가족들이 배불러 숟가락을 놓을 때까지 음식에 손을 잘 안 댄다. 혹시 가족들이 더 먹고 싶을 수 있으니 그렇다. 그래놓고 "내가 제일 많이
먹은 것 같다. 많이 좀 먹으라" 며 배부른 연기를 한다.
70대 남성의 배려법이 요즘 스타일로 세련될 순 없다. 티가 나고 어색하다. 희생하는 게 눈에 보여서 죄송스럽게 만든다. 그래도 나는 아버지가 평생 일관되게 보여주는 배려가 사랑스럽다. 표현을 잘 못 하는 것이 죄송스러울 뿐. (그래서 요즘은 아버지를 위해 웬만하면 한 그릇씩 나오는 음식점엘 간다.)
사실 아버지가 베트남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종종 부모님 집에 갈 때면 아버지의 책상엔 항상 도서관에서 빌려온 베트남 관련 책이 놓여 있었다. 베트남의 유구한 역사를 다룬 책부터 베트남에 오래 근무한 주재원이 쓴 베트남 경제에 관한 책까지 다채로웠다. 심지어 얼마 전엔 기초 베트남어 교재까지 등장했다. 여행을 가고 싶은 거면 베트남 다낭이나 냐짱(나트랑)의 관광지를 소개한 여행책이면 될 텐데 그런 책은 없었다. 아버지의 책상을 보면 마치 베트남 이민을 앞둔 사람 같았다.
아버지의 유튜브도 비슷했다. 부모님 집에서 아이들 유튜브를 틀어주려고 접속하면 추천 동영상에는 죄다 베트남 이야기뿐이었다. 아니 무슨 베트남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베트남이 뭐라고 1년 넘게 탐구자의 자세를 유지하는 걸까. 내가 아는 한 아버지는 베트남에 아무런 추억도 연고도 없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 속의 미군 크리스처럼 전쟁 통에 사랑하는 베트남 여인을 남겨두고 와 그리워하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의 머릿속에 베트남 지식이 웬만한 전문가 못지않게 꽉 차있는 것을 뻔히 아는데,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귀찮아할까 싶어 특유의 배려 넘치는 화법을 쓰는 거다.
"우리나라 저출산 때문에 아이들이 없는데 베트남 같은 나라는 앞으로 기대가 된다. 아들 손주 살 세상에서는 여기보다 훨씬 기회가 많을 것 같지?"
아버지가 고시생처럼 베트남을 공부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족의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40살 아들의 앞날에 한 톨의 도움이라도 될까 싶은 마음이다. 먹고 살기 바쁜 아들이 생경한 베트남 공부까지 할 시간은 없을 테니 자신이 오롯이 배워서 전달해 주려는 배려였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아버지가 IMF 때 잘 다니던 은행에서 눈물의 비디오 찍으면서 명예퇴직 하고 새 인생을 개척하던 때도 40대였다. 지금 내 나이다.
"아들아, 베트남이 여름에는 불 같이 더운데 달랏은 1,500m 고산지대에 있어서 여름에도 시원하다더라"
아버지는 베트남 달랏 날씨가 어떤지 '1'도 관심도 없는 아들에게 달랏의 연중 기온을 읊었다. 그 때 나는 말했어야 했다. '아부지, 그냥 나랑 베트남에 한 번 갑시다.'라고. '그렇게 오랫동안 박사되도록 공부한 베트남 한 번 보고 옵시다. 진짜 문화가 그런지도 한 번 보고, 시장은 어떤지도 봅시다. 베트남에 미래가 있겠는지도 보고, 사업하는 교민들 생활도 한 번 보고 옵시다.'라고 권했어야 했다.
혼자라도 베트남행 표를 끊을까 말까 몇 날 밤을 망설이는 아버지를 보다 못한 어머니가 나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다음 달에 너희 아버지랑 베트남에 좀 다녀와 주라."
그렇게 72세 아버지와 40살 아들, '미스터 사이공' 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