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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종일 Oct 21. 2023

베트남, 운명일지도 몰라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베트남, 어디로 갈까


아버지는 72세다. 윤석열 나이로 71세. 아버지는 스스로를 '노인'이라고 부른다. 65세 때부터 그랬다. 지하철을 공짜로 타기 시작하면서 '나는 국가가 공인한 지공(지하철 공짜) 노인'이라 했다. 하긴 요즘 60대는 워낙 젊어서 '신중년'이라 부른다던데, 그 경계도 넘겼으니 숫자상 노인은 노인이다.


자칭 노인으로서 아버지의 지론이 있다. 늙지 않는 노인이 되기 위해서는 뭐가 되었든 새로운 것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 설사 그것이 스스로를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빡빡한 대한민국 노년의 살림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아무 연고도 없었던 베트남에 수상하리만큼 특별한 관심을 쏟은 것도 늙기 싫은 노인의 탐구력 덕분일 거다. '미스터 사이공'의 집요함은 결국 40살 아들을 베트남 원정대에 끌어들였다.


베트남에 정복당한 참파왕국. 그의 세부 탐구 주제 중 하나. (이미지 출처 : mekongsustainabletourism.com)


우선은 베트남의 수많은 도시 중 어디로 갈지 정하는 게 먼저였다. 시간이 없었다. 깊어가는 여름, 조금이라도 덜 뜨거우려면 최대한 빨리 출국해야 했다. 미스터 사이공의 연구 결과를 현장에서 최대한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선 휴양지는 제외한다.

경기도 다낭시 탈락.

새롭게 떠오르는 관광도시 냐짱(나트랑) 탈락.

베트남의 청정 휴양섬 푸꾸옥도 탈락.

달랏은 고산지대라 덜 덥겠지만, 날씨 따질 거면 갈 생각도 안 했을 테니 탈락.


탈락시키다 보니 결국 수도 하노이 아니면 남부 중심지 호치민이 남았다. 


"아들. 나는 어디든 좋은데 어디로 가면 좋겠니?"


아버지가 또 특유의 배려 화법을 사용하여 한 마디를 꺼냈다. 아들이 더 가고 싶은 도시가 이미 있을지 모르니, 본인의 선호가 있으면서도 수면 위로 드러내지 않는 참으로 묘한 질문 화법이다.


"하노이는 사회주의 북베트남의 원류지. 베트남이 사회주의로 통일을 했잖니. 그래서 수도가 하노이야. 그런데 중국의 영향도 오래 받아서 보수적이 다더라. 그래도 정치 중심지니까 가장 베트남 스러울 것 같긴 허다. 호치민은 경제 중심지기도 해서 기업들도 많이 들어와 있고, 한인들도 8만 명이 넘게 있다고 하네? 그래도 하노이보다는 훨씬 더울 거야. 고생스럽겠지 아무래도." 


자신의 욕구를 숨기는 아버지의 말을 잘 이해하려면 행간을 읽어야 한다. 여기서의 핵심은 '경제 중심지‘ 그리고 '한인들'이다. 아버지는 베트남의 경제적인 성장에 주목하고 있었다. 1세대 할아버지가 베트남과 뭐라도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면, 2세대 아들, 3세대 손주에게 미래 경제 대국 베트남에서의 기회가 열릴 수도 있다는 희망. 당장 베트남 이주 한인이 되지는 않겠지만 현실에 기초한 상상은 해보겠다는 의지. 일단 한 번 보고 오면 심리적 거리가 줄어들어 다음 출국은 더 잽싸게 결정할 수 있을 거란 인생의 지혜.


베트남 호치민 시티 (이미지 출처 shutterstock.com)


그래, 답은 나왔다. 호치민 너로 정했다. 


남베트남의 옛 수도,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와 프랑스 식민 지배의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 20여 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며 필사의 탈출 작전이 이루어졌던 곳, 아직도 옛 이름 ‘사이공’으로 불리는 베트남 최대의 경제 중심지. 노년 아버지와 중년의 아들로 구성된 베트남 원정대가 떠날 곳은 바로 여기다. 




아버지라는 청년 동지


출국 목표일까지 단 10일. 급박한 상황일수록 가장 중요한 것만 챙겨야 하는 것이 지혜다. 일단 베트남으로 날아갈 수 있으면 되고, 몸 뉘일 곳을 찾으면 된다. 아버지와 한 책상에 앉아 항공권과 숙소 검색을 시작했다. 날짜를 넣고 성인 2인을 검색하니 호치민 행 최저가 항공권이 나왔다. 28만 원. 생각보다 저렴했다.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갔던 친구들의 후기를 들어보면 경고 일색이었다. 여행의 시작과 끝, 그리고 매일 밤마다 은근히 또는 밝히 드러나는 불만에 스트레스받지 않으려면 비행기와 숙소에 절대 돈 아끼지 말라는 충고가 생각났다.

부모님 여행 10계명이라는데...


“아버지, 이거 최저가긴 한데 저가 항공사라 좀 좁을지도요.”

“괜찮다. 무조건 제일 싼 걸로 하자. 베트남 5시간밖에 안 걸린다.”

“아버지, 기내 수화물이 7kg이고, 위탁 수화물은 추가금을 내요."

“그럼 배낭만 메고 가자. 짐 모시고 갈 필요 없더라.”


그렇다. 잠시 잊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번 여행의 주최자이자 대장이다. 그저 모시고 다녀야 할 노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베트남 전에도 전적이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못 다 이룬 꿈이 있는 프랑스를 그리워했다. 방구석 연구소에서 프랑스를 공부하더니 불쑥 파리행 표를 끊었다. 나홀로 배낭여행. '지공' 노인의 기념비적인 도전이었다. 


파리에서 가장 싼 한인 민박집을 골라 한 달여 파리 곳곳을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여행은 청년들에게도 쉽지 않다. 겉보기에 한 없이 내성적으로 보이는 노인에게 이런 용기가 숨어져 있음에 주변 모두가 감탄했었다. 대한민국 노인 중에 우리 아버지만 한 청년 동지도 없을 것이다.


지하철 공짜로 타는 노인의 파리 배낭여행


이런 아버지가 아니면 부자 베트남 원정대는 일생에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호스팅 하는 패키지여행 구매자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것은 그래도 좀 더 매끄러운 여행이 되도록 기름치는 것 정도다. ‘부모 여행 10계명’ 따위는 돌판에 새길 필요가 없다. 대신 돌판에는 ‘서로 사랑하라’만 새기고 떠나기로 다짐했다. 아버지가 나를 배려하는 것 절반만이라도 하자는 다짐이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마지막 남은 문제는 만기일이 얼마 남지 않은 내 여권이었다. 코로나가 끝나면서 해외 여행객 폭증으로 여권 발급이 오래 걸린다는데, 지금 여권 갱신 신청을 하면 출국일까지 발급이 될까? 항공권 금액을 지불했다가 새 여권이 나오지 않아 출국을 못하게 되는 불상사가 생기진 않을까?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테넷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주인공은 파괴적인 현실을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한다. 그래서 시간을 거꾸로 감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시간을 다시 되돌려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것을. 이것은 운명이기도 하고 과학이기도 하다. 과거의 사건들은 현재를 만들기 위해 쌓여 온 포석이다.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의 현재를 만든 것도 과거의 선택과 사건들이다.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부자의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얼마간은 방관했고, 얼마간은 부끄러워했던 시간들을 다시 지날 거다. 다소 서먹하고 데면데면한 부자의 관계에 큰 변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어날 일이 일어나려면 안 될 것도 된다. 나는 예상보다 빠르게 출국을 단 이틀 앞두고 새 여권을 받았다. 앞으로 펼쳐질 가족의 미래에서 이번 베트남 여행은 꼭 일어나야 할 역사인가 보다. 나로선 고민할 틈조차 없었던 출국 결정이었다. 내가 했던 어떤 여행보다 마음의 준비가 미비했다. 어쩌면 굉장히 어색할지도 모르는 7박 8일을 강행한다. 


우리는 왜 무리수 여행을 가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영화 테넷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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