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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종일 Oct 22. 2023

16. 베트남에는 아이들이 많아요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아들, 어디에 가고 싶니?


베트남 사람들은 점심 식사 이후에 업무를 멈추고 낮잠 시간을 갖는다. 오전 7시 정도에 워낙 일찍 일과를 시작하기도 하고, 오후 나절의 폭염에는 업무에 집중하기가 힘들기도 할 것이다. 호치민에 며칠 있어보니 정말 한낮에는 참기 힘든 더위가 이어졌다. 그러다가도 해가 살짝 넘어가는 오후 4~5시만 되어도 낮보다는 한결 나은 환경이 된다. 물론 그때도 덥지만 한낮에 비하면 한풀 꺾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세 남자도 마치 베트남 사람이 된 것처럼 호텔에 들어와 낮잠을 잤다. 에어컨을 선선하게 틀어놓고 암막 커튼을 치고 한숨 자고 일어나니 충전이 되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저녁 일정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듯했다. 우리는 다섯 시가 넘어 뜨거운 열기가 잦아들 때쯤 숙소 밖으로 나왔다.  


"아빠, 우리 어디 가요?"

"가볼 만한 곳이 많지. 어제 투어버스 지도 가져와 봐. 네가 가고 싶은 곳 가자."

"제가 골라도 돼요? 우리가 지금 갔던 데가 어디죠? 전쟁 박물관 갔다 왔고, 벤탄시장도 갔고... 동물원? 여기 동물원이 있어요. 여기 가요."

"동물원 가고 싶어? 베트남 동물들은 뭐가 다른지 보면 재밌겠네. 그런데 동물원은 아마 저녁에 문 닫을 거야. 내일 아침 일찍 더워지기 전에 가는 거 어때?"

"지금 가고 싶은데... 알았어요. 대신 내일 꼭 가요. 호랑이 있나 봐야 돼요. 베트남에도 호랑이가 있는지는 알아야겠죠?"


아들은 호랑이의 팬이다. 지난 어린이날 아들과 나는 호랑이가 있는 어린이 대공원에서 일대일 데이트를 했었다. 아이들은 1학년이 되면 진정한 어린이가 된다. 그전까지는 다 '아가'일뿐이다. 다섯 살 둘째는 아직 'ㄹ' 발음을 어려워하는 아가다. 둘째는 '호랑이'와 '호양이' 사이 어딘가의 발음을 한다. 1학년이 되면 사라질 그 발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그런 발음을 들을 때마다 '천천히 커라' 주문을 외운다.


큰 아들은 이제 호랑이를 호양이라고 하는 사랑스러움은 없지만, 호랑이가 왜 멋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호랑이가 동물 싸움 순위 몇 위인지, 어떤 종류가 있는지 읊는다. 자기의 생각을 열심히 말하는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면 아가이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면 어린이다. 큰 아들은 학교에 들어가더니 부쩍 멋있는 말을 쏟아낸다. 1학년 어린이가 되고 처음 맞이하는 어린이날을 특별하게 보내게 해주고 싶었다. 어린이 대공원에서 호랑이를 본 아들은 그 뒤로 호랑이의 팬이 되었다.

서울 어린이대공원의 아들


"아빠, 그럼 여기 가요. 사이공 전망대. 여기 높이 올라가서 보는 전망대 맞죠? 그때 우리 남산타워 위에 못 올라갔잖아요. 진짜 올라가고 싶었었는데"


베트남에 오기 1년 전 여름, 두 아들을 데리고 남산을 올랐다. 오늘은 제발 '밤소풍'을 가자는 두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아내에게 휴식을 주고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왔었다. 우리 가족에게 밤소풍은 즉흥적으로 어디든 가서 바람을 쐬고 들어오는 평소와 다른 특별한 날을 의미했다. 아내와 데이트하러 남산을 갈 때 주로 지나던 돈가스 거리가 아니라 회현동 쪽의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주차를 했다. 


아이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자고 졸랐으나 케이블카 승강장과 멀었을뿐더러 '산책'을 남산으로 왔다는 이유로 몇만 원을 쓸 순 없었다. 처음에는 조금 걷다가 버스를 탈 생각이었다. 4살도 안 된 둘째가 남산을 오르긴 아무래도 무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하며 계단을 올랐다. 뽀로로가 즐겨 부르는 '바나나 차차' 노래를 불렀다. 중간 어디부터는 빗방울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와 땀이 뒤섞여 흘렀으나 두 아들과 나는 특별한 밤소풍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고 힘이 났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시간이 이미 8시였으나 걱정은 없었다. 어느새 N서울타워가 눈앞에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는 버스를 타지 않고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남산 밤소풍은 나에겐 어린 두 아들과 함께 남산을 정복한 특별한 시간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아들은 그날 N서울타워 전망대에 올라가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 같다. 

 

"남산타워 못 간 게 그렇게 아쉬웠어? 그때 너무 늦어서 못 갔지 뭘. 그래 그러면 우리 여기서 전망대 가자. 이름이 뭐냐. 사이공 스카이 덱"

"거기가 스까이 데-끄. 싸이공 스까-이 데끈가? 가세."

"예쓰. 전망대 간다."


아들은 요즘 '좋아'라는 의미로 '예쓰'라고 외친다. 아버지는 '스까이 데-끄. 스까-이 데끄' 를 반복했다. 낮잠을 자고 에너지를 충전한 세 남자는 사이공의 야경을 한눈에 볼 생각에 들떴다. 사실 남산타워에 오르지 않았던 것은 매일 볼 수 있는 서울의 야경을 굳이 비싼 돈을 내면서 봐야 하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호치민의 야경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호치민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사이공 스카이 데크가 우리의 저녁 목적지로 결정되었다.


   


호치민에서 가장 유명한 반미


그전에 저녁을 먹기로 했다. 메뉴 담당인 내가 저녁으로 점찍어 둔 곳이 있었다. 전날 밤 혼자 밤거리를 걸으며 발견한 집이었다. 그랩 기사들이 배달을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베트남식 샌드위치 반미를 파는 곳이었다. 보자마자 여기는 대박이라고 느꼈다. 내일 아버지와 아들을 데리고 오리라 생각했다. 베트남에 와서 이렇게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을 본 적이 없었다. 


'반미 후인호아? 그랩 기사들 줄 봐. 다 현지 사람들이 주문해서 먹는다는 거잖아. 이게 바로 찐 로컬이지. 진짜 현지인들이 사랑하는 집. 관광객들한테 유명한 곳이 아니잖아. 역시 여행은 길거리를 다니다 발견해야 해. 왜 한국사람들은 가는 곳만 가는지 모르겠다. 정말.'


"아버지, 아들, 내가 어제 봐둔 반미집이 있어요. 거기 가서 저녁 먹고 갑시다."

"아빠, 그런데 반미가 뭐예요?"
"바게트빵 알지? 그게 프랑스 빵인데 프랑스가 베트남 지배했을 때 바게트가 들어왔지. 그때부터 거기에다가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은 거야."

아버지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반미를 먹어본 적이 없지만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음식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걸어서 반미 가게에 갔다.


전날 밤만큼은 아니지만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 반미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찐 로컬 맛집이구나 생각했다. 반미는 하나에 60,000동. 한국 돈으로 3,000원 정도였다. 우리는 반미 3개와 콜라를 콤보로 시켰다. 아들은 유리벽 안에서 반미를 포장하고 만드는 아저씨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산더미 같이 쌓인 바게트빵이 오늘 파는 것이라니.

모든 것은 아들의 구경거리


나는 장사가 잘 되는 집을 보면 습관적으로 이곳의 매출을 추정한다. 외식 사업을 할 때 몸에 밴 습관이다. 이 집은 분명 월 매출 억대를 넘을 것이다. 배달 기사들이 반미를 받아가는 매장과 일반 손님들이 받는 매장이 따로 있었다. 산더미 같이 쌓인 바게트와 대기 줄의 추이를 보면 3,000원짜리 반미를 하루에 1,000개는 우습게 팔 것이다. 일 매출 3백만 원을 잡아도 월 1억이다. 거기에 대량 주문을 커버한다면 몇 억대의 매출을 올릴 수 있다. 이 정도면 한국에 가져가 지점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쯤 우리가 주문한 반미가 나왔다.


바삭한 바게트 빵 안에 큼직하게 슬라이스 된 여러 중류의 고기가 가득했다. 빠떼라는 녹진하고 고소한 고기 스프레드가 듬뿍 발라져 있었다. 안에는 아삭하고 새콤한 야채가 들어있고 원하는 만큼 더 넣어서 먹을 수 있도록 고수와 함께 제공됐다. 반미는 아들의 아래팔만큼 컸다. 서브웨이 샌드위치의 두 배는 되는 양이었다. 

 

포장 고객이 많아 안에 좌석이 많지는 않았다. 마침 식사를 마치고 일어난 사람들이 있어 세 남자는 거대한 반미 개와 콜라를 들고 작고 높은 테이블에 앉았다. 진한 버터의 향을 맡으며 통유리 안에서 반미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다 맛을 볼 생각을 하니 우리 모두 마음이 급했다.


"반미가 진짜 엄청나네요. 엄청나. 먹어 봅시다."

"잘 먹겠습니다."


바게트는 두께도 엄청나서 웬만한 어른도 베어 먹기 힘든 사이즈였다. 사진 한 장을 찍기도 전에 아들이 반미를 베어 물었다. 아들은 입이 크다. 가족 중에 입 큰 사람이 별로 없는데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 1학년 짜리가 벌써 삶은 계란 하나를 통째로 넣고 여유 있게 우물거릴 만큼 입이 크다. 아들은 반미를 입에 한가득 넣고 엄지 손가락을 들었다. 입으로는 먹고 손으로 말하겠다는 표현이었다. 극찬. 윤기가 흐르는 부드러운 빠떼는 바게트의 바삭함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새콤한 야채를 듬뿍 올리니 자칫 느끼할 수 있는 버터의 고소한 풍미와 섞여 씹을 때마다 감탄이 나왔다. 


"여기는 진짜 최고 반미네. 이런 거 프랑스에서 먹으려면 2만 원씩 내야 할 텐데 엄청나네. 내일도 이걸 먹어야겠다. 엄청난 곳을 찾았구먼. 잘했다."

"어제 걸어 다니다 보니까 여기에 베트남 사람들 배달해 먹는 줄이 엄청났어요. 여기는 무조건 찐로컬 맛집이다. 와야 된다 생각했는데 역시 다르네요."

그 와중에 아들은 계속 말이 없었다. 와그작 소리만 내며 맛에 집중하고 있었다.


맛을 소개하는 즐거움이 있다. 내가 찾은 식당에서 함께 온 사람들이 감탄할 때의 희열. 수많은 맛집 유튜버들이 있는데,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람은 소수다. '여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집이다. 구독자 여러분들이 이 맛을 꼭 느껴봤으면 좋겠다.'가 진심인 사람들은 표정부터 다르다. 삼부자 원정대의 메뉴 담당인 나는 반미 후인호아에서 맛집 유튜버가 되어 100만 조회수를 달성한 듯한 기쁨을 느꼈다. 아버지가 50만, 아들이 50만.

 

그때까지도 나는 몰랐다. '반미 후인호아'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가장 유명한 반미 맛집이라는 것을. 내일도 또 오려고 검색을 했다가 이 집이 유명 맛집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한국에서부터 알고 찾아간 차이일 뿐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모르는 사이공 현지 대박집을 찾은 줄 알고 우쭐했던 것이 민망했다. 그런데 아무렴 어떤가. 나는 발로 뛰어 맛집을 발굴했고, 그걸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소개했고, 그들이 행복해하며 먹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노인과 어린이는 아빠가 베트남 최고의 샌드위치를 찾았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여기가 원래 유명한 곳이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사이공 스카이덱


반미는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우리는 남은 반미를 봉투에 넣어 들고 그랩을 타고 사이공 스카이덱으로 향했다. 아들은 남산타워보다 높은 전망대를 간다는 사실에 들떴다. 사이공 스카이덱은 사이공강 근처에 위치한 비텍스코 파이낸셜 타워 49층에 위치한 전망대이다. 아버지가 들고 다닌 여행책에서는 야경을 보는 것을 추천했다. 우리는 해가 어둑어둑해질 6시 무렵에 사이공 스카이덱에 도착했다.


사이공 스카이덱에 도착하니 의외로 관광객이 거의 없었다. 사이공 스카이덱의 포지션은 우리나라의 63빌딩인 듯했다. 2018년 호치민 빈탄군에 지상 461m, 81층 높이의 '랜드마크 81'이 지어지면서 사이공 스카이덱은 2위로 밀려났다. 마치 오랜 세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라는 상징성을 가졌던 63 빌딩이 그 두 배가 넘는 123층 짜리 롯데월드타워에게 1등을 물려주고 '영광스러운 과거'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했다. 


오히려 우리 삼부자에겐 좋았다. 굳이 최고층 건물에 갈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호치민 시 전체를 조망하면 됐다. 지금까지 둘러봤던 건물들이 보이면 됐다. 아들은 그저 반짝이는 건물들을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즐거워했다. 


나는 63 빌딩 세대다. 롯데월드타워가 지어진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 내 마음속 최고의 건물은 63 빌딩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영등포였다. 차를 타고 외출했다 돌아올 때, 63 빌딩이 보이면 '집에 거의 다 왔다'는 신호였다. 63 빌딩은 전국 초등학생들에게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유명한 곳이었다. '63 빌딩은 정말 63층인가 아닌가'로 논쟁을 했다. '내가 세어봤는데 60층이더라. 아니다 65층이더라'로 싸웠다. 63 빌딩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야외 학습을 위한 견학으로 63 빌딩에 오는 학교도 있었다. 나는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1년에도 몇 번씩 63 빌딩에 놀러 갈 수 있었다. 지방에 사는 친척 동생을 만날 때면 이렇게 자랑을 했다.


"너 63 빌딩 가봤니?"


63 빌딩에 가면 재미있는 것이 많았다. 수족관도 있고, 사진을 찍어 주는 곳도 있었다. 사진을 찍고 63 빌딩 배경을 합성해서 인화해 주는 사진이었는데 필름 카메라밖에 없던 당시로서는 그저 신기한 기술이었다. 무엇보다 63 빌딩에는 거대한 화면의 '아이맥스' 영화관이 있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아이맥스 상영관을 도입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아이맥스는 1985년부터 운영되던 63 빌딩 아이맥스 영화관이었다. 나는 지금 아들만 할 때 아이맥스를 처음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아이맥스 영화관에서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많이 상영했다. 거대한 폭포가 떨어지고 새까만 밤하늘에 가득 찬 별을 보여줬다. 대자연이 한눈에 보이지 않게 앞으로 다가오자 너무 진짜 같아서 무서워했던 기억이 난다.


사이공의 63 빌딩 사이공 스카이덱. 아들은 마치 30년 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호기심으로 가득 차 빨리 올라가고 싶어 하다가 막상 엘리베이터를 타자 긴장했다.


"얼마나 빠르게 올라가는 거예요?" 

"한번 재볼까? 귀가 웅웅 거릴 수도 있어. 그러면 침을 삼키면 돼." 

"올라가는 느낌이 나요. 왜 이렇게 빨라요? 이 정도면 우사인 볼트보다 빠른 거 아니에요?"


모니터에 빠르게 올라가는 층수 표시를 보고 아들이 말했다. 아들은 빠르면 무조건 우사인 볼트다. 우사인 볼트가 달리는 것을 보여준 적도 없는데 친구에게 듣고 온 것 같다. 우리는 우사인 볼트를 타고 사이공 스카이덱 전망대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360도로 펼쳐진 사이공의 야경이 삼부자를 맞이했다.


전망대는 전세라도 낸 것처럼 한산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사이공 스카이덱은 도시의 밤을 가장 높은 곳에서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이공 스카이덱은 마치 삼부자만을 위해 준비된 무대 같았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삼대가 베트남 현지로 어렵게 총출동했으니 차분하게 베트남을 감상하라는 듯했다.

사이공 스카이덱 전망대


사이공 스카이덱에 오르니 1군 지역의 명소뿐만 아니라 호치민의 다른 지역들도 한눈에 들어왔다. 주요 방향별로 6개의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모든 망원경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사이공 중앙 우체국의 모습과 전쟁 박물관의 모습도 보였다. 큰 광장과 베트남의 영웅들의 동상도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빈탄군 쪽에는 호치민의 새 얼굴 '랜드마크 81'도 보였다. 첨탑과 유사한 형태로 높이 뻗어 붉은색 조명이 밝게 빛나는 랜드마크 81이 우리 쪽을 향해 '이제는 내 시대'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전망대의 다른 한쪽에는 예전의 사이공에서 이용하던 인력거로 만든 포토존도 있었다. 삼부자는 사이공 스카이덱에서 베트남의 어제와 오늘을 천천히 느꼈다. 


"아빠, 이건 뭐예요? 여기에 옷이 많아요."

"아오자이라고 베트남 전통 옷이야. 전시해놨네."

전망대 한 켠에는 시대별로 변화된 아오자이를 전시해 놓은 곳도 있었다. 


"엄마한테 선물하면 좋아할 것 같은데요? 이거 하나 사가면 안 돼요?"

아들이 베트남에 와서 처음으로 엄마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래 네가 엄마 없이도 며칠을 보낼 정도로 컸구나' 싶어 기특했다. 엄마에게 예쁜 옷을 선물할 생각을 할 만큼 멋있는 아들이 되어간다. 


"응 이 옷은 파는 게 아니네. 시간 되면 벤탄시장에 가서 이 옷 달라고 하자."
"그런데 이 옷은 엄청 비싸겠죠? 백만 원도 넘지 않을까요? 그래도 난 조금만 더 모으면 살 수 있어요."


아들은 아직 물건의 상대적인 가치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이아몬드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보석이라고 하니 다이아몬드 하나만 있으면 큰 집을 몇 개는 살 수 있다는 식이다. 아들은 반짝거리는 실크로 만든 아오자이가 좋아 보였는지, 몇 년 동안 세뱃돈이니 선물이니 받은 자기의 전 재산보다 더 큰돈을 불렀다. (아들은 모든 돈을 잊지 않고 더하고 있다.)


"아빠, 대신 나 이거 하나 사주면 안 돼요?"


아들은 전망대의 기념품 코너에서 백만 원짜리 아오자이 대신 노트를 하나 골랐다. 아오자이를 입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는 베트남풍의 그림이 그려진 노트였다. 


"한국에 가면 이 노트를 쓰고 싶어요. 그림이 베트남 같이 생겨서 좋아요."


아들은 남산타워에 가보지 못한 한을 베트남의 63 빌딩 사이공 스카이덱에서 풀었다. 아이맥스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우사인 볼트보다 빠른 고속 엘리베이터를 탔고 망원경으로 도시의 반짝임을 보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인력거를 타고, 아빠와 함께 하늘 위 구석구석을 누볐다. 아마 아들은 베트남 그림이 그려진 노트를 가지고 가 친구들에게 자랑할 것이다. 30년 전 63 빌딩을 자랑하던 나처럼.


"너 사이공 스카이덱 가봤니?"




베트남에는 아이들이 많아요


응우옌 후에 (Nguyễn Huệ). 1753년 베트남 떠이선 왕조의 1대 황제이자, 청나라 군대를 격파한 민족 영웅이다. 그의 연호를 따 '꽝쭝 황제'라고도 불렀다. 


응우옌 후에 거리. 꽝쭝 황제의 이름을 따 왔다. 호치민의 시청이자 인민위원회 청사부터 사이공 강변까지 길게 이어진 거리의 이름이다. 우리로 치면 광화문 광장 같은 느낌의 곳이다. 사이공 스카이덱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거리로 우리 삼부자는 '응웬훼'라고 짧게 발음했다. 아들은 '응애내'로 알고 있는 거리가 우리의 다음 목적지였다.


"아빠, 이제 우리 어디 가요?"

자기가 보고 싶었던 전망대를 클리어해 목적이 사라진 아들이 물었다.

"보니까 여기서 응웬훼 거리가 가깝네. 아버지 우리 여기 가보는 거 어때요? 내일 옮길 숙소가 여기 근처에 있긴 한데 바로 옆이니까 오늘 가도 좋겠는데요?"

"그러세. 그러자고."

"아빠 거기가 어딘데요? 너무 먼 거 아니에요? 그럼 그랩 타고 가요."

분위기상 조금이라도 걸을 것 같은 눈치면 아들은 그랩을 타자고 했다. 

"글쎄, 아빠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엄청 가까워. 사람들 많은 곳으로 가보면 나올 것 같아."


우리는 응웬훼 거리로 가는 길에 발견한 진짜 K-편의점 GS25에서 붕어싸만코 하나씩을 먹고 당을 충전해 응웬훼 거리를 향해 걸었다. 


응웬훼 거리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는 곳, 사람들이 향하고 있는 곳을 따라가면 되었다. 우리는 베트남 사람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토요일 밤 응웬훼 거리에 도착했다.  

 

응웬훼 거리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관광객보다 호치민 시민들이 더 많아 보였는데,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 특이했다. 한국에서는 성수동에는 주로 데이트를 하는 젊은 사람들이, 여의도에는 직장인 부대가, 대형 공원에는 아이들과 가족 나들이객이 많다. 


이에 비해 응웬훼 거리에는 갓난아기부터 노인까지 모든 사람들이 있었다. 노인과 아저씨 어린이로 구성된 삼부자 원정대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응웬훼 거리에는 수많은 삼부자, 사부자, 오부자 들이 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가족, 미로 같은 인파 속을 뛰어다니는 어린이들, 삼삼오오 모여 친구들과 깔깔대는 10대들, 기타와 마이크를 들고 버스킹을 준비하는 젊은이들 뒤섞였다. 


응웬훼 거리에 다양한 세대가 섞여 있다는 것은 길거리 장사하는 사람들의 품목으로 증명이 되었다.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바람개비와 풍선을 파는 사람이 많았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온갖 길거리 음식들이 있었다. 힙합 음악부터 컨트리풍의 음악까지 버스커들의 장르도 다양했다. 개구리 탈을 쓰고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 온몸에 황금칠을 하고 움직이지 않는 동상인척 하고 구경꾼들로부터 돈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아빠, 나 저거 사주면 안 돼요?"

고무줄 새총으로 활처럼 쏘아 올리면 핑그르르 돌면서 내려오는 장난감을 파는 아저씨를 본 아들이 말했다.

"그럴까? 그런데 우리 한국에서 온 걸 알고 비싸게 팔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자. 아빠가 한 번 물어볼게."

이런 인파에 외국 관광객들에게는 부르는 게 값일 것 같았다.


"하우 머치?"

"헌드레드. 헌드레드"

100,000동. 5,000원이라는 말이었다. 베트남 물가를 생각했을 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새총 하나에 5,000원을 받을 리 없었다.

"투 익스펜시브. 아이 돈 니드 잇"


벤탄시장에서의 교훈처럼 바로 돌아섰다.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의 표정이 순간 실망감으로 굳었지만 이내 밝아졌다. 장난감 장사가 돌아서는 나를 다시 불렀기 때문이다.

"헤이 10,000동. 500원. 오케이?"


가격이 바로 십 분의 일로 떨어졌다. 나는 주머니에서 10,000동짜리 지폐를 하나 꺼내 주고 장난감을 샀다. 아들은 새총을 받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쏘는 법을 몰라 헤매고 있는 우리를 한 베트남 아이가 와서 도와주었다. 어떤 가족은 우리가 새총을 높이 쏘지 못하자, 우리가 산 것보다 더 비싸 보이는 단단한 새총을 하나 주고 가기도 했다. 우리는 응웬훼 거리에서 베트남 아이들과 함께 새총 장난감을 쏘며 한참을 놀았다.

500원짜리 새총에 행복할 수 있다.


한쪽에서 익숙한 음악이 들렸다. 한국 아이돌의 음악이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K팝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이 보였다. 얼핏 보아도 어린 10대들이었다. 가수들처럼 화려하게 옷을 맞춰 입고 SNS에 올릴 영상을 찍고 있었다. 그 옆에는 어린아이들과 어른들이 어울려 '강남스타일'을 추고 있었다. 마이크를 든 사회자는 사람들을 가운데로 초대했고,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말춤을 추면서 즐거워했다. 


"아들, 너 이 노래 들어봤잖아. 코엑스 앞에서 나오던 그 노래. 너도 저 애들 옆에 가서 같이 춤 출래?"
"아니요. 절대요."
"왜 이것도 경험이잖아. 이거 한국 노랜데 한국 사람들이 해줘야지."


나는 나도 못할 짓을 아들에게 떠밀었다. 그런다고 아들이 떠밀릴리는 없었다. 아들은 한 번 안 한다고 한 것은 어떤 말로 설득해도 끝까지 하지 않는다. 강남스타일이 끝나고는 입에 기름을 머금고 뿌리는 불쇼가 등장했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뒤 이어 베트남어로 된 랩을 쏟아내는 래퍼도 나왔다. 말춤을 추던 아이들은 래퍼 옆에서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들은 이 무리에 참여하는 대신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 공연을 끝까지 지켜봤다. 사람들을 유심히 보던 아들이 말했다. 


"아빠, 베트남에는 아이들이 많아요."


아들이 본 베트남은 아이들이 많은 나라였다. 한국에서는 날이 갈수록 아이들을 보기 힘들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어린이는 우리 아이들 뿐인 경우가 많다. 큰 아들의 초등학교는 서울 한 복판에 있지만 한 학년에 20명씩 네 반이 다다. 불과 수년만에 바닥을 모르는 저출생이 나라를 덮치고 있다. 통계대로라면 작은 아들이 학교에 갈 2년 후엔 아들의 학교는 한 반이 통째로 날아갈 것이다.


할아버지의 예상처럼 손주가 살아갈 시대에는 우리나라보다 베트남이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까. 확실한 것은 베트남에는 어른보다 어린이가 더 많기 때문에 베트남의 어린이들은 노인을 어깨에 짊어지고 보양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베트남에는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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