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응우옌 후에 (Nguyễn Huệ). 1753년 베트남 떠이선 왕조의 1대 황제이자, 청나라 군대를 격파한 민족 영웅이다. 그의 연호를 따 '꽝쭝 황제'라고도 불렀다.
응우옌 후에 거리. 꽝쭝 황제의 이름을 따 왔다. 호치민의 시청이자 인민위원회 청사부터 사이공 강변까지 길게 이어진 거리의 이름이다. 우리로 치면 광화문 광장 같은 느낌의 곳이다. 사이공 스카이덱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거리로 우리 삼부자는 '응웬훼'라고 짧게 발음했다. 아들은 '응애내'로 알고 있는 거리가 우리의 다음 목적지였다.
"아빠, 이제 우리 어디 가요?"
자기가 보고 싶었던 전망대를 클리어해 목적이 사라진 아들이 물었다.
"보니까 여기서 응웬훼 거리가 가깝네. 아버지 우리 여기 가보는 거 어때요? 내일 옮길 숙소가 여기 근처에 있긴 한데 바로 옆이니까 오늘 가도 좋겠는데요?"
"그러세. 그러자고."
"아빠 거기가 어딘데요? 너무 먼 거 아니에요? 그럼 그랩 타고 가요."
분위기상 조금이라도 걸을 것 같은 눈치면 아들은 그랩을 타자고 했다.
"글쎄, 아빠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엄청 가까워. 사람들 많은 곳으로 가보면 나올 것 같아."
우리는 응웬훼 거리로 가는 길에 발견한 진짜 K-편의점 GS25에서 붕어싸만코 하나씩을 먹고 당을 충전해 응웬훼 거리를 향해 걸었다.
응웬훼 거리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는 곳, 사람들이 향하고 있는 곳을 따라가면 되었다. 우리는 베트남 사람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토요일 밤 응웬훼 거리에 도착했다.
응웬훼 거리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관광객보다 호치민 시민들이 더 많아 보였는데,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 특이했다. 한국에서는 성수동에는 주로 데이트를 하는 젊은 사람들이, 여의도에는 직장인 부대가, 대형 공원에는 아이들과 가족 나들이객이 많다.
이에 비해 응웬훼 거리에는 갓난아기부터 노인까지 모든 사람들이 있었다. 노인과 아저씨 어린이로 구성된 삼부자 원정대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응웬훼 거리에는 수많은 삼부자, 사부자, 오부자 들이 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온 가족, 미로 같은 인파 속을 뛰어다니는 어린이들, 삼삼오오 모여 친구들과 깔깔대는 10대들, 기타와 마이크를 들고 버스킹을 준비하는 젊은이들 뒤섞였다.
응웬훼 거리에 다양한 세대가 섞여 있다는 것은 길거리 장사하는 사람들의 품목으로 증명이 되었다.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바람개비와 풍선을 파는 사람이 많았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온갖 길거리 음식들이 있었다. 힙합 음악부터 컨트리풍의 음악까지 버스커들의 장르도 다양했다. 개구리 탈을 쓰고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 온몸에 황금칠을 하고 움직이지 않는 동상인척 하고 구경꾼들로부터 돈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아빠, 나 저거 사주면 안 돼요?"
고무줄 새총으로 활처럼 쏘아 올리면 핑그르르 돌면서 내려오는 장난감을 파는 아저씨를 본 아들이 말했다.
"그럴까? 그런데 우리 한국에서 온 걸 알고 비싸게 팔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자. 아빠가 한 번 물어볼게."
이런 인파에 외국 관광객들에게는 부르는 게 값일 것 같았다.
"하우 머치?"
"헌드레드. 헌드레드"
100,000동. 5,000원이라는 말이었다. 베트남 물가를 생각했을 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새총 하나에 5,000원을 받을 리 없었다. 벤탄시장에서의 교훈처럼 바로 돌아섰다.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의 표정이 순간 실망감으로 굳었지만 이내 밝아졌다. 장난감 장수가 돌아서는 나를 다시 불렀기 때문이다. 가격이 바로 십 분의 일로 떨어졌다. 나는 500원을 내고 장난감을 샀다.
아들은 새총을 받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쏘는 법을 몰라 헤매고 있는 우리를 한 베트남 아이가 와서 도와주었다. 어떤 가족은 우리가 새총을 높이 쏘지 못하자, 우리가 산 것보다 더 비싸 보이는 단단한 새총을 하나 주고 가기도 했다. 우리는 응웬훼 거리에서 베트남 아이들과 함께 새총 장난감을 쏘며 한참을 놀았다.
한쪽에서 익숙한 음악이 들렸다. 한국 아이돌의 음악이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K팝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이 보였다. 얼핏 보아도 어린 10대들이었다. 가수들처럼 화려하게 옷을 맞춰 입고 SNS에 올릴 영상을 찍고 있었다. 그 옆에는 어린아이들과 어른들이 어울려 '강남스타일'을 추고 있었다. 마이크를 든 사회자는 사람들을 가운데로 초대했고,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말춤을 추면서 즐거워했다.
"아들, 너 이 노래 들어봤잖아. 코엑스 앞에서 나오던 그 노래. 너도 저 애들 옆에 가서 같이 춤 출래?"
"아니요. 절대요."
"왜 이것도 경험이잖아. 이거 한국 노랜데 한국 사람들이 해줘야지."
나는 나도 못할 짓을 아들에게 떠밀었다. 그런다고 아들이 떠밀릴리는 없었다. 아들은 한 번 안 한다고 한 것은 어떤 말로 설득해도 끝까지 하지 않는다. 강남스타일이 끝나고는 입에 기름을 머금고 뿌리는 불쇼가 등장했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뒤 이어 베트남어로 된 랩을 쏟아내는 래퍼도 나왔다. 말춤을 추던 아이들은 래퍼 옆에서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들은 이 무리에 참여하는 대신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 공연을 끝까지 지켜봤다.
사람들을 유심히 보던 아들이 말했다.
"아빠, 베트남에는 아이들이 많아요."
아들이 본 베트남은 아이들이 많은 나라였다. 한국에서는 날이 갈수록 아이들을 보기 힘들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어린이는 우리 아이들 뿐인 경우가 많다. 큰 아들의 초등학교는 서울 한 복판에 있지만 한 학년에 20명씩 네 반이 다다. 불과 수년만에 바닥을 모르는 저출생이 나라를 덮치고 있다. 통계대로라면 작은 아들이 학교에 갈 2년 후엔 아들의 학교는 한 반이 통째로 날아갈 것이다.
미스터 사이공 할아버지의 예상처럼 손주가 살아갈 시대에는 우리나라보다 베트남이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까. 확실한 것은 베트남에는 어른보다 어린이가 더 많기 때문에 베트남의 어린이들은 노인을 어깨에 짊어지고 보양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베트남에는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