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나페홀로 Sep 03. 2020

[ 시몬 드 보부아르] -1908-1986

절대적 타자에서 실존적 인간으로 –문성훈


이 글은  사월의 책에서 발간한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중 문성훈 교수님이 정리한 '보부아르'편을 참고하여 정리한 요약문입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 -1908-1986

절대적 타자에서 실존적 인간으로 문성훈 



현대페미니즘 철학의 시원인 [제2의 성]저자. 실존주의 철학자.

진보적 사회참여와 여성해방운동 

청소년기 여성으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부모와 갈등,

당시 프랑스는 여성투표권 불가. 낙태와 피임 불법, 기혼 여성은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만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음.

이런 현실에 보부아르는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하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음.

그녀가 권태로운 삶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사르트르와의 만남때문. 기성질서와 가치관에 맞서는 그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잘 통했고, 29년에는 ‘계약결혼’의 관계를 유지하게 됨. 이는 사랑과 신뢰에 기초하면서도 인습과 속박을 벗어나는 완전한 자유를 위한 그들의 시도였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영향과 차이. 


인간에게는 선천적 본질이라는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절대시하는 것이 실존주의의 원칙이었다.

한편, 사르트르는 타자를 개인의 주체와 대립된 관계로 보았던 반면에 보부아르는 타인과의 상호인정을 통한 역동적 화해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녀는 철학적 활동보다는 문학가, 활동가로서의 족적을 강하게 남겼다. 2차대전에는 레지스탕스 모임에, 알제리 독립운동 지지활동도 하였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페미니스트로 규정한 것은 65년에 이르서였다. 이전까지도 페미니즘 운동은 있었으나 첫 번째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은 주장은 과격하면서도 합법적 틀 안에서의 개량주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68혁명과 함께 두 번째 페미니즘 흐름이 등장하면서 여성해방운동으로 규정되는 행동주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데 보부아르는 이 때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1)보부아르의 실존주의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인간에게는 본질이 없다는 것은 창조주로서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적 선언이기도 함. 신이 있다면 인간은 본질에서 탄생했을테니 말이다.

인간이 존재하기에 앞서 어떤 본질도 선행할 수 없기에 인간이 실제로 존재하게 될 때는 인간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무’ 이다. 인간의 본질과 특성 따위는 결국 인간 실존 이후에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인간은 하나의 구체적 존재가 되기 위해 자유로워야 하며 스스로를 창조해야 한다.


대자존재, 즉자존재, 타인

대자존재- 나는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의식하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 즉 나 자신과 세상을 ‘의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기에 ‘대자존재’이다. 이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 으로서 의식의 주체를 초월하여 다른 것을 향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식으로 향하는 자유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

즉자존재 – 의식이 없는 존재, 의식의 대상일 뿐인 사물들의 존재방식이 즉자존재이다.

타인- 타인 역시 인간이기에 의식을 갖는 대자적 존재일 수 있다. 문제는 나와 타인간의 관계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은 내가 타인에 의해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때는 더 이상 나는 주체가 아니게 되며 즉자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 결국 서로가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하는 갈등과 투쟁의 관계일 수밖에 없음.

이와같은 사르트르의 이론은 인간을 영원한 존재이자 타인과 화해불가능한 나를 상정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주체와 타인의 화해가능성에 숙고하면서 상호주체성의 의미를 탐색한다. 물론 보부아르 역시 사르트르의 실존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 주체와 타자의 대립관계 또한 존재한다. 다만 여기서 화해의 가능성을 두고 있는 것이고 여기서 대립과 화해의 역동적 관계가 성립한다.

인간은 본질이 없기에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던지는 ‘기투’가 필요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현재 상태를 넘어서고자 하는 ‘초월’ 존재임을 주장한다.

인간은 끊임없는 기투와 초월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가치부여를 통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상태를 넘어 도덕성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도덕성은 전체주의적 윤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존주의 윤리가 유아론으로 치부되어서도 안 된다. 즉 실존주의 윤리는 개인에게 절대가치를 부여하고 이 개인만이 자신의 존재를 결정할 힘이 있는 동시에 이 주권적 개인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규정됨을 인정하며 나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된다고 보는 것이다. (사르트르와의 결정적 차이점)

아무리 개인의 실존과 자유가 중요하다고 해도 인간은 결국 주어진 현실에 던져진 존재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은 결국 타인의 영향이고 타인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의 기투와 초월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타인의 자유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사르트르가 상정한 주체와 대상의 예속과 대립관계가 지속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부아르의 상호주체적 윤리는 칸트의 윤리학과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의 윤리학이 보편주의적 입장이라면 보부아르는 실존, 즉 구체적 상황 속에서 나와 유대관계를 현재 맺고 있는 특수한 타인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타인의 자유를 통해 자신의 자유를 확장하려 하고, 타인의 자유를 목적으로 삼고, 동료의 삶과 자유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행동이 야기하는 인간적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 반대는 결국 자유라는 미명하에 노예로 전락할 뿐이다. 



2) 절대적 타자에서 실존적 인간으로 


이제 여성의 문제를 실존적 타자의 원리에 적용해 볼 수 있다.

보부아르는 여성을 ‘타자’로 규정하고 여기로부터 벗어남을 주장한다.

왜 여성이 타자인가? 타자는 동일자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토착민에게는 이방인이, 백인에게는 유색인종이, 식민지 경영자들에게 원주민들이 그러하듯이 여성은 남성에 대하여 늘 타자이고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원래 실존주의의 주체와 타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맞서는 관계이자 갈등적 관계라면, 보부아르가 규정한 여성은 그런 맞대응관계도 되지 못하는 전적 타자인 셈이다.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만 규정되었기에 남성은 절대적 주체가 된다. 그 근거로 첫째 남성은 성별에 따라 규정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남성은 단순히 성별의 지칭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대표한다. 남성은 남성과 여성 모두를 아우르고 대표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여성은 일종의 ‘결함’으로 규정되는데 즉 ‘불완전한 남성’이 ‘여성’인 셈이다. 둘째 여성은 타자이면서도 주체로의 반전을 꾀하지 않았다. 동일자와 타자의 대립에서 이방인,흑인,유대인,등 상대적 타자들은 주체의 억압에 저항하고 맞서왔었다. 그런데 여성은 역사적으로 항상 남성에 종속되어 있었고 여성 스스로 종속적 지위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던 셈이다. 

결국 여성은 보부아르의 표현에 의하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성이 절대적 타자가 된 것은 사회문화적 산물일 뿐이며 어떤 필연성도 없는 것이다.


보부아르는 여성을 불변적 속성에 따른 필연적 결과로 해석하는 기존의 본질주의적 주장 세가지를 반박한다.

첫째. 생물학적 입장으로 여성은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통해 규정되고 이를 통해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도 필연적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종의 유지라는 본능이 남성보다 강하고 여성의 본래적 역할을 ‘모성’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보부아르도 이러한 여성적 특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분명 여성의 신체는 남성보다 생식기능에 종속된 부분들이 많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월경,임신,출산,수유) 게다가 근육의 힘이나 폐활량 또한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신체적 특성이 사회적 역할과 지위로 연결될 인과적 필연성에 반대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자연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자연적 조건을 재구성하는 제2의 자연 속에 살고 있다. 즉 여성 또한 자연적 특성과 별개로 사회문화적 지위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보부아르는 사회적 의미가 가변적임을 주장함으로써 여성의 삶과 여성의 생물학적 조건사이의 관계를 끊어내려고 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구별 또한 넘어서고자 했다. 여성과 남성의 구별은 생식의 목적이란 차원에서 등장한 구별방식일뿐인데 이 생식활동이 인간에게 본질적인 요소는 아닌 것이다. 심지어 종의 유지를 위해 양성의 구별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좀 더 과감하게 주장한다. 생명체에는 단성생식,무성생식,등이 있는 것처럼 또다른 가능성을 주장한다.

두 번째 주장은 정신분석 입장이다. 정신분석에서 여성은 리비도 발달과정 상 결함있는 존재이며 열등한 존재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남근기에 이르러 어린아이들의 자신의 성기를 인식하게 되는데 이 체험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놓는다. 남자아이는 자신의 페니스를 인식하는 동시에 어머니에게는 없음에 충격을 느낀다. 그리고 남자아이는 자신이 어머니의 페니스가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치환시키는데 이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남자아이는 결국 자기보다 권위있는 아버지를 의식하며 거세공포를 느끼며 결국 아버지와의 동일시로 전환하여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권위자가 되고자 한다. 이에 반해 여자아이는 자신의 성기가 부재함을 느끼고 자신의 부재가 어머니 때문이라 여기며 원망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빠진다. 그리고 페니스가 있는 아버지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는 남근선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남성은 여자아이에게 절대적 권위자가 된다.

이런 정신분석의 주장이 맞다면 애초에 여성은 결함있는 존재가 된다. 남근선망자체가 여성자신의 열등함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이러한 프로이트의 분석이 원인이 아니라, 그런 분석을 하게 하는 사회적 질서가 먼저 존재했기에 가능한 분석이라며 반박한다. 즉 페니스의 부재에 따른 여자아이의 열등감과 남근선망이 아니라, 오히려 페니스에 권위를 부여하는 사회문화가 먼저 존재하고 있기에 발생한 산물이라는 것이다. 페니스의 부재는 그저 생물학적 기관의 차이일 뿐이다.

세 번째는 엥겔스의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여성의 종속적 지위는 기술발전에 따른 필연적 결과로 본다. 석기시대에는 여성의 가사노동이 상대적으로 중요했기에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적이지 않았다면 농기구의 발달과 함께 강한 노동력이 필요한 사회로 접어들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종속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발전론에 의하면 오늘날 시대는 오히려 여성에게도 기회가 되는 시대가 된다. 여성이 가사나 육아에서 해방되어 생산노동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가 정말 기술발전의 필연적 결과로 볼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석한다는 것은 결국 경제적 동인에 크나큰 무게를 둔 분석이라 보부아르는 비판한다. 경제적 요건도 결국 자율적이면서 타인과 구분되는 개인으로서의 자기의식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인간과 인간이 근본적으로 우호적 관계였다면 어떤 노예적 관계도 발생하지 않는다. 결국 기술과 경제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려는 지배의식이 문제이며, 이미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의식이 존재했기에 여성이 종속되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보부아르는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가?

그녀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만큼 여성이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유년기,사춘기,젊은 처녀, 결혼이라는 네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유년기- 이유기 이후 남녀 모두 엄마와의 분리를 경험하지는 여자아이는 여전히 엄마의 치마폭에 생활하는 것이 허락된다. 반면 남자아이는 ‘꼬마어른’으로서 독립적으로 행동하길 요구받는다. 한편으로 가혹한 듯 하지만 이 독립의 대가로 남자라는 우월적 가치를 쟁취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어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페니스는 남자다움의 상징이 된다. 한편 여성은 인형과 같은 수동적 사물에서 제2의 자아를 찾게 되어 본인 또한 수동성을 형성한다.

사춘기- 여성성의 강화. 관습,전통,교육의 강요.그리고 어머니의 영향이 큰데 가정안에서 어머니의 위치, 즉 계급차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여기서 받아들이는 셈이다. 이 상황에서 신체적인 2차성징은 대부분 여성에게 자랑이 아닌 숨겨야 할 수치심을 안겨준다.

젊은처녀- 처녀가 되는 것은 열등감과 패배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보부아르는 보았다. 자신의 미래를 기획하고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여성다움을 간직하는 여성상이 되는 것,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결국 무너진 가치를 남자들의 환심을 통해 만회하려고 하거나, 지독한 나르시시즘, 혹은 자신에게 열등감을 주는 남성자체를 거부하고 동성애적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체념하고 결국 자신의 여성다움을 받아들이고 이는 결혼을 예비하는 수동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시기를 보낸다.

결혼- 여성이 타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 남성에게 실질적으로 종속된 삶을 살게 된다. 여성은 결혼을 통해 생존수단을 확보하지만 동시에 남성의 경제력에 종속된다. 그 지위 또한 어느 누구의 아내라는 종속적 지위일 뿐이다. 성적관계 또한 남성은 권리만 갖고 여성은 의무만 갖게 된다. 남편에게는 성적자유가 허용되지만 여성의 성적 욕구는 음탕함이 되어 정절의 의무로 돌아온다.

여성이 어머니가 되는 것은 모성본능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여성은 임신을 통해 자신이 풍요로워진다고 느끼는 동시에 자신이 손상된다고 느끼기도 하듯이 다양한 감정이 양육에서 필요시된다. 결국 노년에서 맞이하는 자유는 아무런 쓸모없는 자유이다. 

이처럼 여성은 종속된 존재로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종속된 존재로서의 삶을 벗어날 수 있을까? 우선 보부아르는 여성이 문명에 의해 고안된 산물임을 인식할 때에만 해방의 가능성이 열린다. 자유로운 실존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여성 역시 미래에 대한 기투와 현재의 초월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을 창조해야 한다.

보부아르는 여성의 법적 권리뿐만 아니라 경제적 자립을 강조했다. 경제적 자립이 없으면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도 직업을 갖고 사회적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 나아가 피임과 낙태를 합법화하여 모성을 필수적 의무가 아닌 선택사항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성의 경제적 의존성이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을 낳아 가정이라는 내재성의 공간에 가두었다면, 임신,출산,육아는 여성을 몸이라는 내재성 영역에 묶어 놓은 것이다. 이 상황에서 미래를 향한 기투와 현재의 초월은 어려워진다.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성과 동등한 환경에서 동등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결국 남녀의 관계는 단순한 동등함을 넘어 서로가 주체로써 인정하는 관계이다. 주체와 주체의 관계는 소통과 협력이라는 화해의 관계이면서 주체와 주체 간의 갈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 두 주체는 화해와 대립이 교차하는 역동적 관계이다. 


다시 실존으로 – 여성성의 인정과 여성성의 해체를 넘어 


보부아르를 향한 비판

1) 여성성의 인정을 주장하는 입장(캐롤길리건, 쥘리아 크리스테바, 이리가레) – 보부아르는 여성의 차이를 부정할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여성이 담당해온 역할을 폄하한다는 비판. 나아가 여성해방으로 추구한 실존적 인간이 사실상 남성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비판. 비판자들은 여성적 글쓰기나 감성등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재반박- 보부아르는 실존주의 원칙을 우선시하기에 여성성이라든지 여성의 본질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성만이 갖고 있는 불변적 본질이란 것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단지 남성의 역할대비 괄시받아온 여성의 역할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재조명하자는 견해였을 것. 그리고 보부아르는 여성이 전통적으로 담당하는 역할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실존적 기투와 초월의 대상으로 삼자는 것이 그 목표가 있다. 


2) 여성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새로운 페미니즘(주디스버틀러) - 보부아르가 여성을 사회문화적 구성물로 보고는 있지만 여전히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원적 구조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 해체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섹스와 젠더는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이성애를 정상적으로 취급하는 사회문화적 실천의 결과이기에 젠더 뿐만 아니라 섹스도 사회문화적 가공물인 셈이고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실제로 과학사적 연구에 의해서도 남성 여성을 성으로 구분한 것이 오랜된 일이 아니라는 주장(르네상스의 해부도의 중성성)

재반박- 보부아르는 우선 만들어진 여성개념을 창시한 만큼 여성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고 가부장적 담론에 종속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보부아르는 이성애를 절대시 한 것이 아니며 동성애의 가능성도 충분히 열어두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이성애와 동성애중 무엇인 정상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 또한 선택의 대상이라는 점에 있다. 실존적 인간이 기투하고 초월하는 것은 ‘상황’속에서다. 그런데 이 상황은 주어진 것이기에 어떤면에서 나는 의미부여의 주체이자 객체이다. 이는 이전의 여성과 만들어진 여성이라는 여성의 이중성과도 연결된다. 여성을 단지 섹스와 젠더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양자 간의 관계를 실존과 사실성,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보게 하는 것이다.

오히려 보부아르에게는 여성은 없고 실존만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본질에 앞서 아무런 규정성도 갖지 않는 ‘무’로서의 존재만 있을뿐이다. 그녀에게 여성해방이란 여성 자신이 객체로서의 여성성을 넘어서 실존적 인간이 됨을 의미한다.

여성이 객체로서의 지위를 벗어나 주체가 되기위해서는 같은 상황에 처한 여성들끼리 연대해야 한다.

시대의 변화속에서 이제는 전통적 남성과 여성의 역할의 경계도 해체되고 있다. 즉 탈성차사회로 가고 있는 것인데, 이는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을 통해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 의미를 갖지 않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제 한 개인의 삶은 더 이상 남성, 여성의 삶이 아니라 실존적 인간으로써의 삶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여성해방은 여성성이 인정되는 것인가? 아님 여성성의 해체인가? 아님 보부아르처럼 실존적 인간이 되는 것일까?

작가의 이전글 사이비전광훈과 한국 개신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