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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Jan 12. 2021

'정인이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정인이 사건'이라 부르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이 사건은 '정인이' 라고 기호화되었고 박제되었다. 

아니 이 사건이 '정인이'가 아니였다면 이렇게 전 국민이 관심을 갖고 

뭉기적대는 정치인들을 재빨리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될수는 없었을게다.

그만큼 이 입양아동학대사건은 기존의 아동학대사례에서도 보기 드물정도로 잔혹했고 끔찍했다.


그러다보니  대중의 분노는 다양한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우선 슬픔과 분노다. 양부모에게 고통당했을 정인이에게 슬픔을, 정인이를 죽음에 이르게한 양부모에게 분노를,

이러한 감정의 응어리가 어디로든 폭발해야 했고, 흘러보내야 했다. 


우선 정인이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물결이 소셜네트워크상에서 확대재생산되는 것은 낯익은 풍경이다. 

다만 우리가 해야할 것이 분노와 슬픔의 감정을 소셜네트워크의 가상의 이미지 공간에 흘러보내는 것에 멈추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이 슬픔과 분노라는 감정은 시간과 함께 조금씩 잊혀지고 다른 감정들로 덧입혀간다. 따라서 '정인이 사건'이 감정의 해방구로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어떻게라도 해소하는 것에 만족하려는 것이라면 그 또한 또다른 우리의 이기성일지도 모른다. 즉 '뭐라도 해야 하는데,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너무 거창하고 와닿지 않기에 우선 내 감정이라도 추스리자'라는 무의식적 판단의 흔적이 없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 난 챌린지에 참여함으로써 나름 할 바를 다했다'라고 안도하지는 않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더 추악한 현장을 우리는 목도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정말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괴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인이 사건'은 이미 기호화되어 자본주의의 컨텐츠로 둔갑한다. 



한 인간의 처절한 삶의 흔적이 저렇게 싸구려 가격으로 매겨진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상품이 생기는 원인은 바로 이 사건을 감정의 소비로 흘려보내는 대중의 푸닥거리에 있다. 뭔가 이렇게라도 하면, 즉 돈이 수고와 정성을 상징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는 나름 할 바를 다했다는 만족감을 물질적, 가시적으로 채워주는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얻어 내는것이다.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비난하기에 앞서서,

이런 대중의 관심을 상품으로 제작하는 판매자를 비난하기에 앞서서,

이 사건을 소비하는 우리의 자세를 먼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977395.html


정인이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국회에서 내내 표류하고 있던 아동학대 방지법을 조속하게 처리하게 되는 기폭제가 된다. 왜 안그럴까. 정치인들도 결국 대중의 관심을 먹고 자라기에 '정인이사건'은 최소 정치인으로서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혹은 최대 아동을 생각하는 진정한 정치인이라는 쇼맨쉽에 평승하기에도 적절한 상황인 셈이다. 그렇게 법안은 처리되었다. 


한편, 이번 '정인이 사건'을 바라보는 쟁점이 있다. 

정인이는 입양아이면서 아동이다. 즉 두가지 이슈가 걸리게 된다. 

아동학대와 입양가정,

그러다보니 정인이를 입양보낸 홀트아동복지회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비판 또한 강하다. 

혹은 현 입양제도까지 비판하며 더 엄격한 허가와 사후관리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정인이사건을 보편적 아동학대의 문제로 볼 것인가, 특수한 입양가정의 문제로 입양제도의 문제로 접근할 것인가. 

이미 아동학대의 사례는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이고 

아동학대에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가해자는 바로 부모이다. 

물론 통계를 보고 

예전보다 부모가 더욱 악해진 것이라고 오해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아동학대에 대한

아동인권에 대한 관심과 국가제도의 보완이 이러한 통계의 결과를 만든 것이라 보아야 한다. 즉 이전보다 엄격하게 아동학대의 기준을 판단하고, 남의 가정 문제가 아닌, 보편적 아동이라는 인권의 측면에서 옆집 아이를 염려하는 주변 이웃들의 신고가 더욱 늘어나서가 아닐까.


한편, 입양특례법이 2012년에 통과되었었다. 

간단히 말해 입양을 이전보다 어렵게 하는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아이가 출생신고가 되어있지 않으면 입양을 보낼 수 없게한 제도. 즉 친 부모 모두의 싸인이 있어야 출생신고가 가능한 만큼 섣불리 입양을 시키지 못하게 하는 규제법인 셈이다. 

그러나 제도의 취지가 무색하게 이 법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이 바로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이다. 이 법으로 인해서 아이를 기관에 맡기려하는 부모들이 아예 거리에 버리는 것을 선택하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실제로 2012년을 기점으로 베이비박스가 폭증한다. 주사랑공동체에 버려진 아이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입양특례법의 실패를 보여준다. 


결국 이번 정인이사건으로 입양제도에 대한 더 많은 규제를 양산하는 것은 우려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입양을 결심하는 가족들에 비해 버려지는 아이들이 여전히 많다. 물론 정인이 양부모같은 인간에게 보내지는 것보다는 보육원에서 자라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지만, 역으로 입양가정의 부모들이 정인이 부모와 같을까??? 어떤 아이든 성인이 되기까지는 가정의 테두리안에서 보호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환경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입양제도를 더 엄격하게 만들거나

입양가정에 대한 규제를 핀셋으로 만들어 관리하는 것은 차후 입양을 생각하는 미래의 입양가정의 실현을 사전에 막아버리는 모순을 발생시키는 어리석음인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정인이 사건으로 홀트라는 기관을 융단폭격하고, 양부모라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행위로 전가되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입양가정이든 아니든 아이가 있다면 국가든, 지역사회든, 모두가 아동인권의 관점에서 아이들을 보살피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하다. 물론 유독 입양가정에서만 아동학대가 일반가정에 비해 많이 일어난다면? 그때 핀셋규제를 고려해볼일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입양아동만 학대한 케이스때문에 입양제도 전체를 들쑤시는 것보다 아동학대를 지역사회가 왜 방관할 수 밖에 없었는지,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를 다같이 반성할 일이다.

그저 정부탓으로만 돌리지도 말자. 

정부의 제도 이전에 정인이 주변의 수많은 목격자들은 이미 존재했었다는 사실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것은 정부라는 추상적 권력기관이 아니라

바로 두 눈으로 나아가 오감으로 한 아이의 고통을 직시하는 이웃과 지역사회의 어른들에게 달린 문제다.

(물론 이번 정인이 사건으로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경찰의 태만함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아동학대법의 보완이 필요하고

정부의 역할과 책임도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도 변해야 한다.

'정인아 미안해, 우리가 잘할게'는 바로 내 아들 딸들에게로 이어져야 하고, 나부터 잘하면 된다.

나부터 이웃아이의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코로나와 강추위속에 길거리에서 떠는 십대가출청소년들의 태반이 가정파괴에 있다. 

보육원에서 퇴소하기 전날 자살한 한 아이의 선택이 왜 그래야만 했는지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인이 사건'은 단지 입양아동학대사건이 아니다. 

모든 아이들의 생존의 권리문제이고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역사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국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비극적 사건이자 우리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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