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 번의 연재 동안 제작기를 풀어내며 <최악의 하루>라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고단함에 대해 슬쩍 이야기를 흘린 적이 있다. 이제 즐거운 이야기로 아름답게 마무리하자고 제작기의 마지막 연재를 앞두고 각오를 다져보다가, 다시 한번 그 고단함을 제대로 이야기해 보자로 마음이 바뀌었다.
한참 단편 영화를 만들던 시기부터 이야기해보자면, 그때는 항상 만드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보이는 것을 썩 즐기지는 못했다. 관객을 찾아다녔지만 소수였고 누군가는 나의 영화들을 말랑말랑하고 사회적인 시각이 없는 영화로 치부했다. 일면 맞는 말도 있겠지만 사소함보다는 선 굵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은 독립영화나 상업영화나 매한가지였고 내가 추구하는 어떤 것들을 면밀히 살펴주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에 아쉬워했다. 내가 대중영화를 만들고자 했을 때는 또 많은 제작자들이 나의 작가주의적(?)인 지향점을 어려워했다. 독립영화를 하던 일부의 이들은 내가 너무 대중 영화스러운 시각을 가졌다거나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형식의 가벼움을 비난했고 상업영화의 제작자들은 내가 너무 독립 영화스러운 비전을 가졌다고 걱정한 셈이다. 먼 시간이 지났지만 <최악의 하루>라는 영화를 준비할 때도 비슷한 문제로 고민했다. 여러 지원제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저예산 영화의 제작과정에서 독립영화 제작에 관한 거의 모든 지원에 응모했고 모두 떨어졌다. 작은 예산이었지만 투자자들 또한 이 영화의 비전에 가능성을 두지 않았다. 투자와 지원이 가로막힌 상황에서 내 영화를 먼저 믿어 준 사람들은 이 영화의 배우들이었다. 그렇게 이 영화의 가능성을 믿어준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고 난 나의 영화를 어필하기 위해 그들에게 했던 말이 거짓말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영화는 만들어졌고 개봉했고 대략 열흘 정도 지났다. 다양성 영화가 보일 수 있는 출구는 적지만 이 영화에 힘을 보태준 몇몇의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 영화를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최악의 하루>를 보기 시작했다. 때로는, 아직도 편견에 가로막힌 기분이 들기도 했다. 짧게도 길게도 볼 수 있는 십몇 년의 시간 동안 스무여 편의 영화를 만들고 두 권의 책을 출간했지만 나를 아는 사람들은 한두 편의 멜로 영화로만 기억한다. 그들 중의 일부는 여전히 ‘감성’이라는 단어의 한계 안에 내가 만든 영화의 기능들을 가뒀다. 하지만 때로는, 다행히 어느 때보다 깊은 소통을 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이 들게 해 준 그들은 내 많은 과정들을 깊이 봐주고 나의 변화를 읽어준 관객이거나 아니면 나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관객들이다. 가장 가까운 곳, 혹은 가장 먼 곳에서 이 영화가 가진 표정 너머의 감정까지 읽어주는 이들이 생겼다. <최악의 하루> 속 그날 만나 떠뜸떠뜸 이야기를 나누는 료헤이와 은희처럼 나 또한 새로운 관계들을 얻고 조금은 덜 외로워졌다.
<최악의 하루>의 주인공 은희는 하루 동안 몇 명의 남자를 만나고, 만나는 남자들마다 그 관계 속에서 성격을 달리 한다. 나는 그런 은희의 모습 속에 사람들의 보편적인 성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여러 관계 속에서 형성된 다면적인 성격들이 있다. 나는 나로 살고 사람들 사이 나 답게 보이고자 노력하지만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을 만난다. 창작자인 나는 극 중의 료헤이처럼 많은 허구로 이야기를 쌓지만 그 창작 안에 나는 비교적 다른 나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창작이 독자와 관객들에게 진심을 보이고 더 깊은 교감을 나누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를 일이다. 미지의 시간을 보내며 나는 다행히 약간의 낙관을 얻었다. 이 영화를 같이 했던 이들은 아직도 이 영화를 믿어주고 있고 가까이에서 혹은 먼 곳에서 깊은 시선을 주는 관객을 얻었다. 내가 노력한 시간 동안 내 주변에서 자란 편견에 대해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 편견 또한 나의 몫인 것을 잘 알고 있다. 편견의 키만큼 내가 자라면 될 일이다. 지난한 시간은 여전히 내 앞에 남아있고 나의 주인공 은희처럼 나 또한 어두운 길을 걸을 것이다. 뒤를 돌아봐도 내가 어디 있는지 가늠하기 힘든 길에 있지만 나 또한 은희처럼 걸어갈 수밖에 없다. 그 길에 어슴푸레한 낙관은 큰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