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설국열차 Snow Piercer, 2013>
나는 이전에,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를 구분하는 것에 대해 내 생각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그 글은 영화 <설국열차>를 보고, 그리고 어떤 리뷰 글을 보고 나서 드는 나의 생각을 정리하여 올린 것이다. 과연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영화 <설국열차>는 어떤 영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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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설국열차는 하나의 사회를 표현하고 있다. 계급이 존재하며, 차별이 있고, 그러한 부조리는 세습이 된다. 현대 사회에서 계급은 사라졌지만 ‘(계) 층’이라고 하는 새로운 단어로 재탄생되어, ‘(계) 층’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지기도 한다. 영화는 그런 계급이 '칸'으로 표현된 세상, 끝없이 달리는 '설국열차'라는 하나의 세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커티스’는 이 ‘층’ (영화 속의 ‘칸’)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자 한다. 자유를 뺏긴 채 대우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꼬리칸 사람들을 위해 이 질서를 무너뜨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된 갈등 주체는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앞 칸 사람들’과 ‘더 나은 삶을 원하는 꼬리칸 사람들’이다. 이 갈등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탐욕을 보게 된다. 우월감에 빠져 남을 무시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놓지 않고 유지하려 다른 이를 짓밟는 모습들. 영화는 그런 모습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열차가 우리네 사는 세상과 다를 바 없음을 말이다. 그리고 관객을 커티스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우리는 그 세상 속으로 조금 더 빨려 들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그동안의 싸움이 무의미해 보일 무렵,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심어준다. ‘아무리 더러운 세상이라도 희망은 있다.’ 달리 표현해보자면, 그 철저한 '설국열차'라는 계급사회를 무너뜨리고 모두가 평등한 하나의 세상을 만들 희망은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 희망의 상징 중 하나가 ‘북극곰’이다. 인간이 버틸 수 없을 만큼 차갑고 시린 세상에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북극곰'.
그리고 우리에게 말한다. 새로운 세대들이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 새로운 세대가 멈춘 열차 속에서 살아나온 ‘지미’와 ‘유나’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후반부에서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깨어있는 기성세대의 희생, 희망의 발견, 새롭게 시작할 새로운 세대. 영화는 이러한 메세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앞서 서두에서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가 이 영화에서 시작되었고 더 정확히는 어떤 글을 보고 태어난 글이라고 언급했었다. 어떤 사람이 이 영화를 잘 만든 상업영화라 평한 글을 봤다. 나는 그 글에 동의할 수 없다. 보는 내내 마냥 즐길 만한 영화는 아니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져있고, 영화의 마지막에 희망을 이야기한다.
원작을 보지 못해서, 원작의 내용과 영화의 내용이 어떻게 다른지, 두 이야기가 같은 맥락에서 흘러가는지 정확히 잘 모른다. 그러나 영화에 한해서, 영화는 감독의 생각을 담고 있고, 연출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분명히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최소한 '예술'의 영역이 포함된 작품이다. 상업적인 요소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상업적이다." 내지는 "예술적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개인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해석의 여부는 달라질 수 있지만 한 가지로 정의하기 어려운 영화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