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맞는 사람'을 찾아서
"엄청 오랜만이다? 너."
예고도 없이 불쑥 모임에 나타난 나에게 친구 한 명이 말을 건넨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씩이나 한껏 웅크린 채로 지낸 것이다. 친구들에게 먼저 소식을 전하지도 않았고, 애써 안부를 물어온 사람들과의 만남을 뒤로 미루며 지냈다. 여럿이서 함께 대화하는 그룹 톡방에서는 그저 눈으로 남들의 소식을 읽으며 홀로 반가워했을 뿐이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인간관계가 가능하다. 일방적이고, 최소한인, 현대인의 인간관계.
학생 시절의 나는 자신을 충분히 외향적인 사람이라 여겼다. 비록 낯을 전혀 안 가리는 정도는 아니었으되, 처음 보는 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을 즐길 줄 알았으니까. 한 번 연을 맺게 된 사람들에게 꾸준히 연락을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으니까. 아니, 미덕이란 그런 거창한 단어는 과분하다. 밖으로 바삐 향하는 내 모습을 스스로 좋아했고, 추구했으며 또한 도취했을 것이다.
30대로 접어들어 다시 돌이켜 본 나는, 생각보다 인간관계에 쉽게 지치는 사람이었다. 생에 할당된 사회성을 20대에 다 소진한 걸까? 활달하던 사회성은 마치 체력의 일종인 마냥 급속히 줄어들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알아가는 건 흥미롭고 매력적인 활동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지치는 일이기도 했다. 새롭게 사귄 사람을 '친한 사람'에 쉽사리 분류하지 못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애초에 이런 생각부터 조금은 사치스럽다. 오래도록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도 소홀한 주제에 언감생심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라니.
우린 보통 수줍거나 말이 없으면 내향적이고, 사교적이거나 적극적이고 활달하면 외향적이라고 얘기하지만 본래의 정신분석적 의미는 좀 더 정교하다. (중략) 그들은 주제(Subject)와 객체(Objcect)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어떤 사람의 행동과 판단을 결정하는 기준이 주로 객체에 의한 것일 때 그의 태도는 외향적이며, 반대로 객체보다도 주체에 의해 결정되면 내향적이라고 한다. - 정혜신 <사람 vs 사람, 정혜신의 심리 평전 II> 中
예전엔 그리 복잡하지 않게 인간관계라는 단어를 바라봤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관계는 알록달록하고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매일 마주하는 가까운 사람이더라도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기 어렵다. 심지어 혈연관계인 사람들에게는 더 어렵기만 하다. 반대로, 기쁜 소식이 생기자마자 정말 오랫동안 마주하지 못한 친구의 연락처를 찾기도 한다. 내 이야기를 네가 들어줬으면 하는 욕심, 너의 소식을 내게 들려줬으면 하는 바람.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픈 이런 욕망이야말로 관계의 시발점이면서, 동시에 관계를 끊어지지 않게 하는 아교 역할을 한다. 그런 욕망이 향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나와 맞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해 본다.
20대에는 강렬한 매력을 가진 사람들에 매료되었다. 선망할 만한 대단하고 멋진 매력. 예전 글에서 '매력'을 '타인을 집중시키는 힘'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아래 링크 참고) 그 틀을 차용해 보자면, 강렬한 매력을 지닌 사람들은 단시간에 탁월한 몰입도를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겠다. 카리스마라고나 할까. 외모든 언변이든 아우라든 뭐든 간에, 그런 매력을 좇아 여러 관계에 푹 빠져있던 시절이었다.
요즈음에도 사람의 매력을 좇는 건 매한가지다. 다만, 강렬함보다는 긴 호흡으로 꾸준한 매력을 더 선호한다. 강렬함은 이를테면 훌륭한 경관을 지닌 가파른 산의 매력 같은 것이다. 경관에 마음이 뺏겨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을 정도로 몰입되지만, 다가가기엔 멀고 험한 경우가 많다. 그에 반해 넓고 아름다운 평야는 평온한 매력을 자아낸다. 물론 그 안에 수렁이나 둔턱이 없지는 않으나, 충분히 준비된 태도만으로 보폭을 조절하면 발을 헛디디지 않는 그런 평야 말이다. 매력을 소화하는 데에도 보수적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나와 취미가 같고, 음악 취향이 같고, 여행 스타일이 비슷한 상대는 소중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는 사람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이다. 하지만, 긴 호흡에서 바라보자면 나와 싫어하는 것이 일치하는 사람이 더욱 소중하고 귀하다. 관계의 수렁은 '좋아하는 것의 불일치'가 아닌 '싫어하는 것의 불일치'에서 드러난다. 미쳐 알지 못했던 상대의 역린을 건드리는 상황처럼 말이다.
사실 '싫어하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사고 메커니즘, 그 자체이다. 사고 과정에서 분류하는 사안의 경중, 의식의 흐름, 상식이라 여기는 전제들, 그리고 그에서 파생되는 논리적 결락 등. 서로 간의 사고 메커니즘이 비슷할 때에야 같은 것을 싫어할 수 있게 된다. 그저 좋아하는 것들이 같다고 해서 이러한 메커니즘 사이의 불균형을 해소하기란 쉽지 않다.
이를 테면, '유머'가 그렇다. 유머란 녀석은 대개 딱딱한 서로 간의 예의의 틀을 슬그머니 넘어서며 발생한다. 일종의 '정신적 간질임'이다. 다소 경직된 서로의 사이를 풀어주는 유머 덕택에 관계는 발전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유머를 주고받는 과정이 서로 원만하지 않을 때, 관계는 위험해진다. PC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인종차별주의적 농담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불성실한 것을 못 견디는 사람에게 게으름에 대한 유머를 사용한 것은 또 어떠한가. 웃음을 유발하는 포인트는 제각각 다르지만, 웃음을 멎게 하는 부분도 저마다 다르다. 그리고 그 웃음의 멎음이야 말로 서로의 '적절함'과 '부적절함'을 나누는 단초가 된다.
내게 '취향이 맞다'는 건 더 이상 같은 것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다. 같은 것을 싫어하고, 같은 것을 힘들어하며, 같은 것에 못 견딘다는 뜻이다. '나와 맞는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취미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그 이전에 같은 데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왜 스트레스를 받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 서로가 서로의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지 않는 사람을 바라는 것이다.
나의 싫음과 너의 싫음이 같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긴 호흡의 매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관계의 몰입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정의하는 부적절한 태도에 쉽사리 빠지지 않을 것이다. 설령 실수로 수렁에 빠질지언정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