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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May 24. 2018

페미니즘을 떼쓰기로 바라보는 시선

'블랙넛 김치 셔츠'와 ' 스튜디오 성추행 폭로 사건'이 혼재된 5월

블랙넛의 '김치 셔츠'

2018년 5월 17일 오후, 자신의 모욕 혐의에 관한 공판을 위해 법정에 출두한 래퍼 '블랙넛'은 특이한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앞 면에는 자신이 속한 그룹의 앨범 홍보 문구가 쓰여 있었고, 뒷 면에는 '김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의 혐의가 여성 래퍼인 '키디비'를 향한 여성 혐오 발언이라는 점을 비추어 볼 때, 셔츠 속 김치 그림은 대표적인 여성 혐오 단어 중 하나인 '김치녀'를 연상케 했다.  

블랙넛은 5월 14일 힙합엘이의 영상 인터뷰에서 '별 의미 없이 항상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서글프게도 이 날은 '강남역 살인사건'의 2주기가 되는 날이기도 했다.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의 한 건물에서 20대 여성이 흉기에 살해당했다. 공용 화장실에서 여성이 들어오기를 차분히 기다리던 살해범은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랐다고 밝혔고, 그 발언에 아연해했던 것이 벌써 2년 전인 것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이 겪은 일상적인 공포와 차별을 소리 높여 외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공감하며 대책을 요구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그 2년 동안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사회 각계에서 '미투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과 남녀평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주요 후보들이 앞다투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자칭하기도 했다. 이렇게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2년 전보다 많이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 그리고 블랙넛이 김치 셔츠를 입고 법정에 들어선 그 날. 그 날은 유명 여성 유투버 한 명이 새벽에 자신의 페이스북 영상을 통해 '스튜디오 성추행 및 누드사진 유출 사건'에 대해 폭로한 날이기도 하다. 이에 많은 피해자들이 추가로 자신의 피해 사례를 폭로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과연 2년 전보다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좌), 2018년 신논현역 6번 출구(우)



일베식 혐오, 무임승차에 대한 적개심

많은 사람들이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를 극단적인 온라인 커뮤니티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틀린 생각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러한 생각은 자못 위험하다. 일베발 주장이 일베를 접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일베를 극단적이고 무논리적인 집단으로 치부하는 건, '일베를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극단적이지 않다는 일종의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제공할 위험이 있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우리 안의 '일베 성향'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시사인'은 2014년 기사(아래 링크)를 통해 일베의 사고방식 상당 부분이 '무임승차자에 대한 혐오'를 자극한다고 지적한다.


일베는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전라도 출신, 여성, 성소수자, 진보세력 등을 그들의 표적으로 삼는다. 그들의 '무임승차 프레임' 하에서 약자들의 투쟁은 무임승차자들의 떼쓰기로 쉽게 변모한다. 자신들의 상태를 스스로 노력하여 개선하려 들지 않는 무임승차자들. 이러한 시선은 5.18 유가족들과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러한 시선의 틀(Frame)은 일베를 접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유효하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가장 유행하는 음악 장르 중 하나인 힙합은 의외로 이러한 보수적 프레임과 쉽게 결합된다. 개인의 노력(Hustle)과 그에 따른 부의 성취(Money Swagger)를 자랑하는 힙합은 사실 꽤 극우적인 음악 장르이다. 이러한 장르적 성향과 더불어 미국 본토 힙합은 Thug Life와 같은 마초적 자아를 소환한다. 한국에도 스윙스와 같이 센 척하는 래퍼가 있지만, 그보다 더욱 공감을 많이 받는 래퍼는 블랙넛과 같이 '왜소한 자신'을 긍정하고 담아내는 래퍼이다. "나는 가난하고 찌질하지만, 투정 부리지 않고 노력해서 성공할 거야. 떼를 쓰는 너희들은 무임승차자들일 뿐이야." 일베가 공감할 만한 훌륭한 블랙넛 장르는 이렇게 탄생한다.


일베를 하지 않더라도, 블랙넛의 음악을 싫어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임승차자에 대한 혐오를 가진 이들에게 이러한 생각은 쉽게 스며든다. '찌질하고 부족한 나'를 긍정하고 'Hustle과 노력'을 부르짖다 보면, 놀랍게도 노래 가사에는 필연적인 것처럼 'Bitch'가 등장한다. 김치녀를 위시한 여성에 대한 혐오 말이다.  



'여성의 떼쓰기'를 바라보는 그들의 자세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여성 인권을 말하기 시작했고, 덕택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혐오', '성평등', '페미니즘'과 같은 언어를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설명은 사실일지언정 조금은 씁쓸하다. 대한민국에는 이전부터 불편과 공포를 느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이제야 이러한 사실들을 언어로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새로운 언어와 수많은 발언들은 광장을 가득 메울 수 있었고, 이전에 이러한 차별 논쟁에 무감했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들이 불편함을 표하는 방식은 가지각색이겠으나,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렇게 불평하고 투정할 시간에 노력을 하는 게 더 낫다.'

가장 보편적이면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논조는 이렇게 투쟁/시위/운동 그 자체에 대해 부정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투쟁하려는 여성들에게 먹고사는 일에 보다 더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떼를 쓰고 다투기보다 스스로의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보다 노오력하고 Hustle 할 것을 외친다. '능력만 있다면 살 만한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시위를 하는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성별 간 불평등한 인권 구조를 애써 무시하거나 경시한다. 이러한 자의적 혹은 타의적인 구조맹(盲)은 불행의 화살을 사회 구조가 아닌 개인에게 겨눌 뿐이다.  

시사 웹툰 작가 '윤서인'의 웹툰 中


 '몇몇 불온 분자들 때문에 다른 여성들(+페미니즘에 우호적인 남성들)에게도 피해가 간다.'

투쟁 자체를 부정하는 첫 번째 부류와는 달리, 이들은 페미니즘 자체에 동조한다. 다만 그들은 '좋은 페미니스트'와 '나쁜 페미니스트'를 감별하려 애쓴다. 이중잣대를 사용하는 '무임승차자'를 발굴하려는 이 작업은, 비단 여성인권 운동뿐 아니라 다른 시위나 집회에서도 늘 논란이 불거지는 이른바 '순수성' 논란에 일종이다. 이들은 '연민이 가는 불쌍한 사람'과 '메갈짓을 하는 사람'으로 쉽게 여성을 이분화한다. 결백하고 순수한 인권 감수성에 도취된 이들은, 후자로 인해 전자들의 메시지가 오염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순수성으로의 함몰은 언제나 권력이 보다 많은 쪽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사건을 해석할 권리, 그 낙인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는 욕망은 권력의 오랜 속성이다. 그렇기에 행동하지 않고, 그저 들이대는 '순수성 논쟁'은 백면서생의 공자왈만큼이나 공허하다.

배우 '유아인'은 트위터를 통해 '정상적 사고와 인격을 지닌 이'와 '부당한 폭도'를 나눈다.


'나도 같은 약자인데, 당신들은 왜 나도 때립니까.' 

세 번째 부류는 앞의 둘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88만원 세대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들 중 사회 기득권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페미니즘에게 공격받는 것이 억울하다. 그들 또한 자기 자신을 사회에서 충분히 약자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해지는 가난한 백인층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들은 비백인들의 인권 향상과 인종 평등에 대한 외침을 억울하게 여겼고, 그 억울함은 지난 미국 대선에서 폭발적인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마따나 '자신의 특권에 익숙해지는 순간 평등은 억압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2017년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특권 걷기(Privilege Walk) 영상은 우리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보통 사람'이라는 서사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보여준다. 그리고 약자 간의 서로의 특권의 위치를 파악하는 순간이야말로, 진정 그 간극을 메우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privilege walk 영상을 '스브스뉴스'에서 한국 청년 버젼으로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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