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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Nov 26. 2016

우리는 타인에게 어떻게 다가가는가

영화 <색, 계>

#0  Lust, Caution

 타인에게 다가가는 행위는, 종종 서로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시발점이 되곤 한다. 하지만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난해할 뿐 아니라 고된 일이다.) 서로 쌓아 올린 거대한 벽(界, Caution)은 마치 우화 속 나그네의 코트 자락처럼 엄중히 단속되곤 한다. 때로 그것은 어릴 적부터 켜켜이 쌓여온 상처에 기인하기도 한다. 혹은 느린 흐름의 세월에 눌려 맞춤옷처럼 되어버린 고고한 외로움 때문일 수도 있다. 

 이안 감독은 영화 <색, 계>에서 서로 간의 벽을 넘는 두 남녀의 모습을 비춘다. 암울한 시대상 속의 주인공들에게 코트 자락을 풀기 위한 햇빛을 주기 위해, 감독은 색(色, Lust)을 넣는다. 영화 속에 총 세 번 등장하는 정사 씬Scene은 그러한 감독의 의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두 남녀가 계를 넘기 위한 탐미적인 과정들. 온통 살색으로 점철된 감독의 문법은 관객들을 옭아맨다.


#1  첫 번째 정사, 실소

 남자는 자신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방에서 여자를 기다린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방에 초대된 여자는, 자신이 4년 만에 굳건한 벽을 넘어 남자의 성에 도착했다고 확신한다. 

"아파요."

 여자(그리고 관객)의 그러한 기대는 산산조각 난다. 목을 잡힌 채 한 거친 키스에 단 한 번 반박을 했을 뿐. 그녀는 우악스러운 남자에게 짓이겨진 정사를 한다. 옷을 찢고 벨트로 손을 묶은 채, 애정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강간 같은 관계. 정사 후에 코트를 던지고 황급히 나가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조용히 실소한다. 남자 내면의 두려움을 그녀는 알아챘으리라.

실소


#2  두 번째 정사, 혼란

"난징으로 떠난 줄 알았어요" "홍콩으로 기어코 떠날 건가"

 제삼자가 보기에 실소를 머금을 만큼 뻔한 그들의 밀고 당기기. 남자는 자신의 행방을, 여자는 자신의 영속성을 묘연하게 만들어 서로를 애달프게 한다. 불확실성과 한도를 지닌 관계. 서로에게 애처로움을 첨가한 그들의 관계의 모습은 점점 진하고 탁해진다. 그리고 처음으로 둘의 표정이 비슷한 색을 띤다. 둘 데 없이 방황하는 동공은 그들의 혼돈을 여실히 보여준다. 미지의 것을 마주쳤을 때 경험하는 공포와 혼란, 그리고 그에 대한 매혹과 갈망. 나그네의 코트 자락은 아주 조금이나마 열리고 말았다.


#3  세 번째, 울음

 여전히 남자는 여자를 경계한다. 마치 번견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천성인 마냥. 여자 역시 자신을 다잡고자 남자와, 그 자신을 경계한다. 그녀는 정사 중에 벽에 걸린 홀스터를 바라본다. 그를 눈치챈 남자가 그녀의 눈길을 따라 홀스터를 바라보자, 여자는 눈에 띄게 당황한다. 잠깐스런 리듬의 결락. 대화만 하지 않을 뿐, 그들의 관계는 끊임없이 갈구하고, 위증하며, 압박하는 취조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여자가 남자의 눈을 배게로 덮는다.

두려움

 홀스터를 바라보던 여자를 위에 놓은 채, 눈이 가려진 남자. 어둠이 무섭다고 말하던 그는, 배게를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만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여자도 울어 버리고 만다. 누군가의 코트자락이 완전히 열린 것이다.


#0.5  왕치아즈

 여자의 원래 이름은 왕치아즈였다. 아무도 믿지 않고 사는 남자, 이와 왕치아즈는 꽤나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아버지와 영국에 있는 동생과는 달리 그녀는 홍콩에 홀로 버려져 있다.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듣고 축하 편지를 쓰며, 그녀는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임을 자각한다. 그런 그녀에게는 연극만이 남았다.

"왕치아즈, 여기로 올라와"

 대학에서의 첫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연기와 이에 대한 무대 밖 반응에서 희열을 느낀다. 애초에 그녀는 독립운동에 대한 거창한 뜻이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제안을 받았으며, 자신의 연기의 범위를 확장했을 뿐이다. 

 애초부터 그녀는 불합리할 정도로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었다. 물려받은 돈으로 집을 구한다거나, 바닷가에서 총연습을 하는 것은 그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그녀는 순결하면서 요염한 막 부인을 연기하기 위해 원하지 않는 첫 섹스를 하고야 만다. 왕치아즈를 저당 잡힌 채,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던 막 부인의 무대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막을 내리고야 만다. 

"제가 공항으로 갈게요."

 그녀는 결국 도망치고야 만다.


#2.5  막부인

 그 시절의 나는 어설펐다고, 4년 후의 그녀는 말한다. 군데군데 왕치아즈로 덧칠되어 있던 어설픈 캐릭터, 막 부인은 4년 후 상해에서 화려하게 컴백한 것이다. 연출의 기량은 절정으로 치달아 올랐기에, 이제는 막부인에 왕치아즈가 덧칠된다. 그녀는 그래서 이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경계해야만 했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연기에 포획당한 왕치아즈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역할인 막부인마저 경계해야 하는 진한 고독을 맛보게 된다. 때때로 이에 대해 경고를 하지만,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타인은 아무도 없었다. 최전방에는 여전히 그녀뿐이었다.

"그는 한 마리 뱀처럼 제 심장까지 들어옵니다."

#3.5  선물

 진실된 것이라고는 없는 그녀의 삶. 덧없는 인생 속에서 그녀는 6캐럿 다이아몬드를 선물 받는다. 정말 아릿할 정도로 아름다운 반지 앞에서, 그녀는 황망해하고 또 황망해한다. 

"이런 귀한 반지를 끼고 다니는 건 겁이 나네요."
"내가 지켜줄게"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인생을 바친 최대의 연기를 실패한다. 버려진 그녀의 삶에 비추어 볼 때, 이가 준 반지는 그녀에게 생애 첫 선물이었을는지 모른다. 처음 반지를 보았을 때 그녀의 반응은, 매혹보다는 어색함에 가까웠으리라. 막 부인의 연기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 지켜주겠다는 이의 말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그 순간 그녀는 막 부인이 아니라 처음으로 왕치아즈이길 바라지 않았을까.


#4  쇼윈도

 이는 사력을 다해 도망갔다. 왕치아즈는 자신이 연기를 망치는 순간, 어떠한 비극이 올 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쇼윈도를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이제야 왕치아즈로 돌아왔음에도 거리는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비극의 마지막 장면으로 나아가는 그 순간에도, 사람들은 분주하고, 바람개비는 아름다웠다. 밥을 지으러 가야 한다는 행인의 외침처럼, 진짜 삶과 쇼윈도의 간극은 가깝고도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봉쇄된 도로에서 거닐던 왕치아즈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결국 역사는 '계가 색을 이겼다'고 기록할 것이다. 경계를 돌이킨 이는 다시금 살아 남았다. 어쩌면 냉철한 독립운동가들 역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승리자로 기록될 것이다.

 다만, 한 번 무너져 버린 경계에는 여전히 색이 강하게 남아 있다. 막 부인이 떠난 침대를 만지며 흐느끼는 이에게도, 총살을 당하기 전 타인의 눈길을 피하지 않던 왕치아즈에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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