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거운 현실을 대하는 누군가의 자세에 관하여
이 문제 투성이 세상에서 어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무작정 견디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살짝 편승하는 것도, 나서서 싸우는 것도 그 어느 하나 쉽지 않은 선택이다. 살아가면서 비일비재하게 마주칠 것이 분명한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 기질 탓인지, 혹은 더는 도망칠 수 없었는지 - 명쾌한 목소리로 소리친 시인이 있었다. 신발보다 더 자주 나라를 바꿔야 했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참여 문학계의 출사표 정도가 되지 않을까.
나는 알고 있다. 행복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그의 목소리는
귀에 거슬리지 않고, 얼굴은 아름답다.
정원의 휘어진 나무는
땅이 나쁘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런데도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무가 휘었다고 욕을 한다.
나는 푸른 조각배나 돛단배들을 보지 않는다.
어부들의 닳아진 어망만을
바라볼 뿐이다.
왜 나는 사십 대에 허리가 구부러진
소작농에 대하여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가슴은
예나 지금이나 따뜻하기만 한데.
시에 운율을 맞추면,
나에게는 그것이 겉멋처럼 생각이 된다.
꽃 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의 정서와
미장이의 연설에 대한 분노의 정신이
마음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글을 쓰도록 하는 것은
오직 두 번째 것이다.
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 - 베르톨트 브레히트
20세기 전쟁의 한 복판에서 쓰인 시인의 문장들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이리도 쉽게 읽히는가. 브레히트와 우리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아, 여전히 가혹하기 때문인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한 이유는 브레히트가 '행동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던 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술자리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셋 있다고 한다 : 종교, 군대 그리고 정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일상에서의 자잘한 갈등을 피하고자, 우리는 애써 '비정치적'인 것이 정상적인 양 행동한다. 정치색이 드러난 사람은 종종 조직에서 모난 돌 취급을 받으며, 사회에 분란을 조장하는 이들로 간주된다. 이토록 다루기 어렵다는 정치란 과연 무엇일까.
정치(政治, politics) :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 David Easton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Who gets what, when and how)'에 관한 것, Harold Lasswell
- 위키피디아
모듬살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나눔에 관한 문제를 우리는 정치라고 말한다. 구성원들의 동의 하에 얼마나 올바른 방법으로, 적절히 자원을 배분하였는가. 이에 대한 끊임없는 논의 과정을 정치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에서 소외된 것처럼 보인다.
겉보기에 정치와 직접적으로 맞닿은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이다. 첫 째, 분배의 구조에 폭넓게 관여된 - 관여할 수 있는 - 사람들이다. 둘째, 분배의 손길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다. 양 극단에 위치한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에게 정치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일 때가 많다. 먹고사는 문제는 늘 가깝고 벅차다. 시인 김수영도 말하지 않았던가. '50원짜리 기름덩어리 갈비'에 분노하다 보면, 어느새 '왕궁의 음탕함'은 조소할 기력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왕궁이 언제는 음탕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면서 말이다.
잔인하지 않은 사람들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잔인한 사회를 가능케 한다. - 지그문트 바우만
특별히 부도덕하지도, 잔인하지도 않은 - 일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굳건한 체제의 옹호자다. 비록 그들이 자각하지 못할지언정 말이다. 알기 어려운 정의보다는 직관적인 질서를 중요시 여기는 우리는, 적극적으로 평화를 쟁취하기보다는 긴장감이 겉보기에 드러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한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며 우리는 사회의 현상을 유지하는 데 일조한다. 각자도생. 각자도생.
"세월호 유가족들은 정치적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비단 '일베' 회원들의 의견이 아니었다.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문장이었다.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차치해보자. 충분한 대화가 이루어졌다면 논쟁을 했을 수도, 혹은 켜켜이 쌓인 서로 간의 오해를 풀었을 수도 있었을 테니. 주목해야 할 것은 저 수많은 끄덕임을 통해 완성된 '정치적'='부정적 단어'라는 하나의 도식이다. 은연중에 탈정치적이 된 수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인 것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개인이 겪은 아픔에 대해 보상-알 권리를 포함한-의 분배를 요구하는 유가족은 왜 '탈정치적'이어야 하는가.
나아가 그들이 선전 선동하며, 정치색이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정치적'이지 않단 말인가.
정치적 무관심과 혐오는 논의되어야 할 수많은 질문들을 사장시킨다. 그리고 단언하건대, 우리는 그 대가를 비싸게 치르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부당한 불평등이 산재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촘촘하게 짜인 불합리의 실타래 속에서 살기에, 문제를 외면하거나 잊기가 쉬울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아닌 누군가는 분명히 아프다.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불편하고 아프지만 그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언어'의 힘을 빌려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예전부터 있어 왔다. 과거에는 그저 단순한 거북함이나 가벼운 통증이었던 것을, 질환이라고 이름 붙여 주는 이들. 그 원인과 치유법을 도식화하고자 애쓰는 이들. 개개인에게 부여된 아픔을 '사회적 문제'로 부각하여준 많은 사람들 - 만평을 그리는 사람부터 대통령 후보에 이르기까지- 덕택에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사회의 치부를 꽤나 구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스스로를 믿는다는 씩씩한 사람들 중 일부는 개인의 작은 아픔에 '사회적 문제'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붙여주는 것에 불쾌감을 표하기도 한다. 그런 나약한 대처법 덕택에 당사자들이 재채기를 감기라고 인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아픔은 대개 누군가가 다른 구성원을 - 자신의 행위를 인식하거나 모르거나 - 때리면서 생겨난다. 명확한 이름표 덕택에 피해자는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아팠는지 깨달을 수 있고,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를 명확히 인지할 수 있다. 나아가 멈출 수도 있으리라.
(왼쪽) 네이버 웹툰 '송곳', (오른쪽) 커뮤니티 '메갈리안'
"난 당신들이 추구하는 목표에는 찬성하지만, 당신들이 행동하는 방식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타인의 자유를 이루기 위한 일정표를 자신이 짜 줄 수 있다고 오만하게 믿으며, 흑인에게 '좀 더 괜찮은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끊임없이 충고합니다.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얄팍한 이해는 악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의 완벽한 무지보다 더 절망적입니다. - 마틴 루터 킹
그래서 말인데, 많이 말해야 한다.
과장스레 악역을 만들어 낸다며 '송곳'을 욕할 수도, 급진적인 방식이 꺼려진다며 '메갈리안'을 비난할 수도, 현실감이 떨어진다며 '버니 샌더스'를 욕할 수도 있다. 인정한다. 하지만 많은 부작용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들을 응원하는 이유는 그들이 절박한 문제에 대해 언로(言路)를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문제와 모순을 똑똑하게 인식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모든 이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길이 애국적인 것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해야 한다. (중략) 만약 온 나라에서 당신만이 다른 방향의 길을 외쳤다 하더라도, 당신의 신념에 따랐다면 조국에 임무를 다 한 것이다. 부끄러워하지 말라.
<시빌 워> 캡틴 아메리카, 마크 트웨인을 인용하며.
프랑스의 대학 입학 자격시험을 '바칼로레아'라고 한다. 복잡한 지문 없이 짧은 한 문장으로 된 철학 문제 세 개 중 하나를 골라 4시간에 걸쳐 답을 작성해야 한다. 프랑스 정치가 탈세로 얼룩졌던 2013년, 바칼로레아에는 다음과 같은 문항이 출제되었다.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질문에 대한 답을 남기지 않으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너무나도 좋은 교보재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필리버스터에 참여하는 의원들마저도 - 자세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 인권과 정치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테러방지법에 대한 야권 인사들의 반대 의견'이라는 투박한 단어는 얼마나 단순하게 의견을 묶어버리는지. 필리버스터라는 프리즘을 통해 알게 된 그들 하나하나의 목소리가 이처럼 남다르고 풍부하다는 것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어쩌면 이번 필리버스터를 통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16.2/25 한겨레 신문 만평
50시간째 토론 아닌 일방적 연설이 계속되고 있다지만 우리가 언제 집회와 시위의 문화와 테러방지법의 쟁점들에 대해 그만큼의 시간 동안 토론하고 설득한 적이 있었던가 - 손석희. `16.2/25 뉴스룸 앵커 브리핑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