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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Dec 29. 2016

나와 당신의 결여

같은 문법으로 사랑에 대해 말하는 영화들

※ 영화 '500일의 썸머', '캐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그녀', '이터널 선샤인'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소설 Essays In Love(1993)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적확하게 해부하고자 노력한다. 작가는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이상화'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상대를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존재로 인식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은 상대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 작가는 이것을 사랑이 아닌 '갈망'이라고 선언한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 Essays In Love


톰과 썸머의 경우

(500) Days of Summer, 2009

 보통이 정의한 대로 해석하자면, 톰은 사랑에 빠졌다고 믿었을지언정 썸머에게 빠진 것은 아니다. 썸머의 몸에 난 점까지 하트 모양으로 둔갑시키는 그의 감정은 사랑이 아닌 갈망이었으리라. 영화 <500일의 썸머>는 놀라우리만치 집요하게 남자 주인공인 톰의 입장에서 쓰인 영화다. 그 관점은 영화 포스터의 문구에서도 여전히 지속된다.

 Boy meets girl. Boy falls in love. Girl doesn't - 500 days of summer

 톰의 관점에서 쓰인 이 문장과는 대비되게도, 실제로 상대를 제대로 사랑하려 노력한 사람은 썸머였다. 톰에게 썸머는 그의 세계관 속에 봉헌된 여신의 이미지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숨 쉬는 썸머와 여신이 불일치하는 지점마다 톰의 세계관은 붕괴한다. 링고스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는 톰의 세계 속에서 그의 여신인 썸머가 링고스타를 좋아할 수는 없지 않은가. 톰은 사랑에 빠졌으되, 썸머를 제대로 바라보는 데는 실패한다.

 제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둘의 마지막 대화에서 힌트를 얻고자 한다. 사랑은 환상이라고 믿던 썸머는 영화 속 500일이 지난 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노라 톰에게 고백한다.

"식당에 앉아서 도리언 그레이를 읽고 있을 때, 그가 다가와 그 책에 대해서 물어봤어."

 관계는 늘 찬란한 '이상화'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현실에 닻 내린 필부필부들은 모두 그릇이 넘칠만한 단점들로 가득하다. 머릿속 제단에서 벗어나 현실감 넘치는 상대를 바라보는 과정. 타인의 결여를 바라보는 데서 관계가 발전한다는 사실은 진부하지만 간과하지 않아야 할 점이다.


캐롤과 테레즈의 경우

Carol, 2016

 좋은 문법은 작품을 넘나 든다. 테레즈에게는 리처드라는 헌신적인 남자 친구가 있다. 아침 일찍부터 출근길을 함께 하고자 방문하고, 같이 갈 유럽 여행 일정을 알아보며,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러나 리처드는 테레즈의 사진 촬영에 대한 애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와 가는 파리 여행보다 카메라가 좋다고 하더군. 여자들이란." 리처드에게 테레즈는 헌신할 대상일지언정, 이해의 대상은 아니다.

 이러한 괴리는 캐롤의 남편, 하지에게서도 나타난다. 하지는 캐롤을 사랑한다 외치지만, 그가 바라는 캐롤의 역할은 아름다운 아내이자 그의 딸의 어머니일 뿐이다. 파티룸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남편의 말에 캐롤이 서글픈 표정으로 화답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괴리에 기인한다. 살얼음처럼 불안한 역할극 위의 삶. 자신에게 규정된 역할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녀는 곧바로 환자로 치환된다. 딸을 만날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정신과 치료를 받노라고 시인하는 캐롤, 그런 그녀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하지의 모습은 가히 폭력적이다. 자신의 틀에 타인을 귀속시키려는 갈망. 사랑이 아닌 갈망이 가득한 영화 <캐롤> 에서 캐롤과 테레즈 둘만이 환하게 빛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Ask me.. Anything.. Please..

 캐롤은 고백한다. 자신이 원해서 테레즈를 사랑했으며 그 사랑에 후회하지도 않는다고.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않겠다고 남편에게 외치는 캐롤과 테레즈를 향해 무엇이든 물어봐 달라고 흐느끼는 캐롤은 모두 그녀가 애절하게 찾는 상대방으로 귀결된다. 자신의 결핍을 발견해 줄 수 있는 상대, 공허하고 거대한 나의 동공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상대야말로 갈망에서 사랑으로 전이되는 첫 번째 요건일 것이다.


츠네오와 조제의 경우

ジョゼと虎と魚たち, 2003

 한 사람의 결여가 외현에 두드러지게 발현된다는 점에서 조제의 사례는 극단적이다.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걸을 수 없는 여자, 그런 조제를 향한 츠네오의 감정은 모호하다. 사랑과 동정, 호기심과 배려 그 언저리를 넘나드는 츠네오의 감정 때문에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둘의 헤어짐 이후에야 더욱 감각적으로 빛을 발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도 다리를 자르면 되겠네 - 조제

 둘은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마냥 맥없이 이별한다. 츠네오가 조제에게 전동 휠체어를 사는 게 어떻냐고 묻던 그 순간, 조제의 결여이자 츠네오를 잡을 수 있던 마지막 무기는 휘발된다. 분명 상대의 결핍을 양껏 품은 것은 츠네오였음에도 어째서 그의 사랑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가. 둘이 이별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츠네오의 실패를 설명할 수 없다. 둘 중 다른 하나인 조제의 사랑은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제는 츠네오늘 만나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던 호랑이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고,  헤어진 후에도 전동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거닐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말처럼 마치 물 밖에서 살 수 있게 된 물고기 마냥.

 정작 사랑에 실패한 것은 어디 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츠네오였다. 둘의 연애를 조명하는 장면에서 조제가 츠네오의 결핍을 채워주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조제와는 상반된, 공허와 결여가 없던 츠네오. 조제를 향한 그의 감정은 사랑이었을지언정, 츠네오를 향한 조제의 감정은 갈망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츠네오의 공백을 메우지 못한 조제는 떠난다. 마지막 츠네오의 오열은 자신의 내면에서 동공을 찾지 못한 이의 오열이자 처절한 실패의 상징처럼 보인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경우

Her, 2013

 츠네오와 다르게 테오도르는 자신의 부족함을 보다 명확히 알고 있다 자부할 수 있다. 캐서린과의 이혼을 진행하게 되면서 테오도르는 타인의 감정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노라고 자신한다. 편지 대필 작가인 그는, 타인의 아픔을 섬세하게 짚어낼 줄 아는 인물처럼 묘사된다. 그런 그가 인공지능 맞춤형 OS인 사만다를 사랑하게 된다.

 영어 표현 'In a relationship'이야말로 영화 <그녀> 속의 테오도르와 사만다를 가장 적합하게 표현해주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우리말로는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를 정의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관계를 사랑이라고 표현하면 언어의 후사일까. 2010년대의 사람에게 둘의 관계는 사랑이라기엔 결격사유가 넘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둘의 관계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역시 사만다를 바라보는 테오도르의 태도이다.

 맞춤형 OS라는 단어의 뜻처럼,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딱 맞는 이상적인 상대로 등장한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성장해가는 사만다에게 테오도르는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에게는 처음 겪은 이질감은 아니었으리라. 전 아내인 캐서린이 석사/박사 과정을 끝내는 동안, 그녀를 지원해주던 테오도르는 외려 정체하고 만다. 테오도르는 끊임없이 과거의 캐서린을 반추하지만, 그 시절의 캐서린은 존재하지 않는다. 발전한 캐서린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 그들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준보다 성장한 대상은 그 기준보다 결여된 대상과 일견 상반된 듯 보이지만, 그 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양태는 매우 유사하게 나타난다. 사만다가 떠나고서야 테오도르는 자신을 제대로 돌이켜 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얻는다. 변화하느냐 안주하느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이전과 다른 선택을 보여준다. 처음으로 대필이 아닌 진심을 담긴 편지를 쓰는 테오도르를 보여주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편지가 성장의 의미를 지닌다면 수신인은 캐서린이지만, 사만다이기도 하며, 또한 테오도르이기도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의 결여를 직시해야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테오도르의 친구 에이미의 말처럼 말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경우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같은 맥락에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확연히 신선하고 매력적인 결말을 자아낸다. 서로를 서로에게 맞추려다가 처참히 실패한 남녀. 심지어 기억마저 지우고 서로에 대한 흉을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직면했음에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처음부터 관계를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비록 다시 시작된 관계가 서로의 결여를 메꾸지 못할 것임을 알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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