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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Nov 29. 2017

마블 VS 디씨

요즘 가장 잘 팔리는 '21세기 히어로들'에 대하여

히어로의 시대

 바야흐로 슈퍼 히어로의 시대다. 극장에 갈 때마다 늘 어딘가 한 켠에는 보기만 해도 강해 보이는 자세의 슈퍼 히어로가 서 있기 마련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포스터를 장식하는 히어로들도 변화한다. 얼마 전까지 토르와 헐크(<토르 3 : 라그나로크>)가 있었는데 지금은 배트맨과 원더우먼(<저스티스 리그>)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화려한 볼 거리를 제공하는 히어로물 장르의 인기는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코믹스에서 넘어오는 확실한 지지층, 능력자 배틀을 통한 오락성과 대중성 덕택에 이 장르는 수많은 제작사들의 도전과 시도가 이어져 왔다. 그 덕택일까. 어린이들이나 히어로물을 보지 않겠냐고 말하던 과거에도,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걸출한 작품들이 있어왔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엑스맨 시리즈>,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시리즈> 등이 이러한 고전작품에 해당될 것이다.


 나름의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슈퍼 히어로 장르에 새로운 방식으로 도전장을 내민 것은 미국 양대 코믹스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마블 Marvel'사 였다. 이전까지는 판권 장사만을 하던 마블은 2008년 영화 <아이언맨>과 <인크레더블 헐크>를 통해 직접 메가폰을 쥐는 전략을 취한다. 그들의 대범한 전략은, 오랜 시간 공들여 가꿔온 코믹스 세계관 그 자체를 스크린에 구현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영웅들이 한 스크린에서 만나는 것. 오랜 히어로 팬들의 꿈을 이뤄준 이  영화 속 세계관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Marvel Cinematic Universe', 통칭 MCU라 불리며, 2016년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스타워즈 등의 쟁쟁한 선배 세계관을 제치고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성공한 프랜차이즈 세계관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러한 MCU의 성공은 2010년대를 '대 히어로 장르 시대'로 만든 시작이 된다. 더불어 할리우드 제작사들에게 '세계관 장사'에 대한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거대 제작사들은 MCU를 본떠 앞다투어 저마다의 세계관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레전더리 픽쳐스'와 '워너브라더스'는 킹콩, 고질라 등 거대 괴수들이 크로스오버 되는 '몬스터버스 Monsterverse'를 만들어냈다. (<고질라>, <콩 : 스컬 아일랜드> 등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였다.) '유니버설 픽쳐스'는 미이라, 프랑켄슈타인 등 판타지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다크 유니버스 Dark Universe' 계획을 발표했지만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 '미이라 ' 등의 개별 작품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며 사실상 세계관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다크 유니버스'는 미이라, 프랑켄슈타인, 투명인간, 드라큘라, 늑대인간, 오페라의 유령, 노틀담의 꼽추 등의 화려한 라인업을 공개한 바 있다.


 마블의 오랜 라이벌인 '디씨 코믹스 DC Comics'가 서둘러 '디씨 필름스 유니버스 DC Films Universe', 속칭 DCFU를 선보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히어로는 대부분 디씨 소속이었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에 비견될만한 마블 히어로는 10년 전에는 하나도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스파이더맨과 헐크의 인지도가 꽤 있는 편이었으나,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가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며 슈퍼히어로를 대표하는 간판 얼굴이 되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디씨는 아쉬움과 착잡함이 복합된 마음을 담아 DCFU의 영화들을 선보였지만, 대다수가 매몰찬 혹평을 받으며 갈수록 MCU와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많은 디씨 팬들의 관심은 11월에 개봉하는 <저스티스 리그>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언맨 시리즈로만 호평을 받아 오던 마블이 <어밴져스>라는 이벤트를 통해 매력적인 세계관을 어필하며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처럼, <저스티스 리그>는 디씨를 구원해야만 했다. 

※ DCFU 세계관인 <맨 오브 스틸>과 <원더우먼>은 나름 괜찮은 평을 받았지만,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과 <수어사이드 스쿼드>은 팬들의 매몰찬 혹평을 받아야만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에도 디씨는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경쟁자인 마블이 내년 있을 초대형 이벤트 <어벤저스 3 : 인피티니 워>를 위해 올해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 <토르 3: 라그나로크>를 잇달아 흥행에 성공시킨 것과 대조되는 초라한 성적표이다. 특히 <토르 3 : 라그나로크>는 기존 계획되었던 비장한 내용을 180도 변경하여 스페이스 오페라에 걸맞은 가볍고 화려한 재미를 선사하는 전략을 취했음에도 대성공을 거둔 것과 비교된다. 마블의 이러한 전략 변경은, 기존부터 오랫동안 쌓아온 토르와 헐크라는 캐릭터의 매력과 가볍고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허용되는 MCU만의 서사 문법이 어우러진 절묘한 조화 덕분이었다. 그에 비해 디씨의 희망이었던 <저스티스 리그>는 작품 내내 지속되는 심각하고 우울한 분위기, 서사에 대한 다소 불충분한 설명 등을 이유 삼아 사람들의 외면과 혹평을 감내해야만 했다. 다수의 영화팬이 평가는 적절했겠으나, 이미 마블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디씨만의 문법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어려웠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히어로 장르의 팬으로서 감히, 덕심을 십분 발휘하여 마블과는 다른 디씨만의 서사 문법을 좀 더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를 해보자. 서양 문명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컨텐츠를 둘 고르라면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일 것이다. 2010년대 할리우드를 지배하는 미국 발 슈퍼 히어로 세계관 역시 여기서 자유롭기 어렵다. 작금의 히어로들과 같이,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에도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초인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반신과 영웅들이 그러하고, 성경의 성인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영웅들은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힘을 지녔지만, 다채로운 감정을 지니고 실수를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존재'들로 묘사된다. 그들은 우리처럼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서로 질투하거나 싸우기도 한다. 복수와 후회를 반복한다거나, 실수 한 번에 세상을 위험에 빠트리고 절망하기도 한다. 단지 힘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보다 더욱 고결한 존재로 비추어지지 않는 그들은, 그렇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감정 이입을 쉽게 하게 된다. 그들이 가진 약점이나 모순, 감정들은 그들을 인간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요소임과 동시에 각자의 개성과 매력을 자아내는 속성이기도 하다. 칼에 찔리지 않는 불사의 육체를 지녔지만 발뒤꿈치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아킬레우스, 광인이 되어 자신의 자녀와 아내를 죽게 만들고 후회하는 헤라클레스, 호기심을 끝내 버리지 못한 채 뒤를 돌아보는 실수를 저지른 오르페우스 등 인간다움으로 점철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영웅들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한다.


 성경 속 초월자인 성인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영웅과는 두 측면에서 매우 다르다. 첫째로 성경 속 초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위계관계가 존재한다. 힘의 우열이 있을지언정 서로 다른 영웅들이 동등하게 어울리는 신화와는 다르게, 성경 속 성인들은 신의 권능을 행사할지언정 신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존재들로 묘사된다. 이는 신 그 자체이자 그의 독자(獨子)인 그리스도와 성인 간의 명박한 위계를 보여준다. 둘째로 그들은 고결한 인품을 지닌다. 힘만 강력할 뿐 정서적으로는 필부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영웅들과는 다르게, 인간을 계도해야 하는 성인들은 사람들을 바르게 이끌기 위한 고뇌를 필히 수반한다. 그들 역시 인간이기에 때론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그를 거울 삼아 보다 더 바른 길로 사람과 사회를 나아가게 하려는 목적의식을 가진다. 성인들의 고뇌가 영웅들의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갈등에 비해 보다 사회적인 성격을 띠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콤플렉스'로 읽는 마블 세계관 (MCU)

 이런 점에서, 마블 영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유사하다. "재난과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때 각각의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콤플렉스는 어떻게 발현되는가?" 마블 영화가 히어로를 바라보는 핵심 관점 중 하나이다. 마블의 슈퍼 히어로들은 강력한 힘과 더불어 모두가 지독할 정도의 콤플렉스를 내재하고 있다. 콤플렉스는 그들의 약점임과 동시에 개성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각자의 콤플렉스에 따른 고민들이 맞붙는 접점에서 캐릭터의 입체적인 깊이가 드러나게 된다. 사람들의 공감은 이러한 캐릭터에 대한 몰입감 있는 이해에서 시작된다. 마블 발 세계관의 성공방정식은, 이와 같이 캐릭터들의 매력적인 콤플렉스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MCU의 첫 영화 <아이언맨>이 개봉한 이래, '아이언맨-토니 스타크'는 최고의 인기 캐릭터였다. 유별난 유머 감각과 멋진 슈트 장착 씬에 묻힌 감이 있지만, 스타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9년 동안 늘 한결같다. 많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내는 스타크의 무기들은, 제작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늘 무고한 사람을 위협하게 된다. 제리코 미사일, 아크 원자로, 아이언 패트리어트, 울트론까지. 아이언맨은 양날의 검이 되어 돌아오는 자신의 무기를 억제하기 위해 더 강력한 무기를 항상 만들어야 하는 존재다. 이러한 '억제력이 지니는 모순'은 그의 말마따나 토니 스타크가 지닌 유니크한 유산(Legacy)이다. <아이언맨 3>에서 스타크의 편집증적인 모습과 불안함이 가장 잘 엿보이는데, 그는 잠도 자지 못한 채 닥치는 대로 아이언맨 슈트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그런 그를 이해하는 관람객들은, <캡틴 아메리카 3 : 시빌 워>에서 그가 히어로를 합법적으로 통제할 수단인 '초인 등록법안'을 지지하며, 그들을 가둘 '특수 감옥'을 개발하는 것을 당연하게 수긍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아이언맨의 모습에서 냉전 시대의 핵 억제력, 9.11 테러 이후 통과된 애국자법으로 대표되는 현대 미국의 모습을 발견한다. 


 2011년 <퍼스트 어밴져>로 데뷔한 '캡틴 아메리카-스티브 로저스'는 아이언맨보다 늘 인기가 조금 덜한 히어로였다. 그런 그가 <어밴져스>에서 리더의 역할을 맡자 관객들은 의아해했다. 그저 강한 인간에 불과한 그가 헐크, 토르, 아이언맨과 같은 엄청난 강자들의 리더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캡틴 아메리카 캐릭터는 그거 '그저 강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가 다른 히어로들에게 인정을 받는 이유는 늘 바른 길을 찾고자 고민하는 그의 태도에 기인한다. MCU는 지속적으로 로저스에게 "국가(미국)의 행동은 정당한가?"를 묻는다. 국가, 대의라는 명목 하에서 거대한 시스템이 만드는 패권주의, 안보를 위시한 자유의 침해 등이야 말로 그에게 주어진 시련이자 물음이다. 이름부터 '미국 대장'인 이 히어로는 고민 끝에 늘 미국 정부의 대척점에서 대항하는 결정을 하게 된다. '프로젝트 인사이트'와 '초인 등록법안'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억제력에 맞서며, 그는 통제가 아닌 자유를 대변하고자 노력한다. 이렇게 각자의 입장과 모순을 가진 두 히어로들의 갈등이 <캡틴 아메리카 3 : 시빌 워>를 통해 폭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캐릭터들에 대한 깊은 이해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쌓아온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갈등을 그린 <캡틴 아메리카3 : 시빌 워 (2016)>


 그 밖에도 신을 때려눕힐 정도로 강하지만 분노로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헐크, 삼촌이 죽은 후 힘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는 가난한 스파이더맨, 뛰어난 회복력을 지녔지만 자신의 기억만은 회복하지 못한 채 현재를 부유해야 하는 울버린, 나치의 우생학에 의해 희생된 유태인의 후예지만 뮤턴트의 유전적 위대함을 설파하는 매그니토 등등. 마블 발 캐릭터들에 내재된 모순은, 영화라는 컨텐츠와 결합하며 그들의 매력을 더하는 강한 기폭제로 작용하게 된다. 


'절대자'로 읽는 디씨 세계관 (DCFU)

 마블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가깝다면, 디씨의 세계관은 성경과 유사한 색채를 띤다. 마블보다 진지하고 어두운, 다소 종말론적인 배경은 이러한 색채론에 무게를 실어준다. 뒤늦게 탄생한 DCFU 세계관에 포함되는 작품은 아니지만, 히어로물의 전설로 회자되는 '다크 나이트 삼부작' 역시 배경인 고담을 통해 이러한 색채를 강화한다. 


 MCU의 뉴욕, 소코비아, 와칸다 등이 그저 현장이 벌어지는 장소 그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데 반해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고담은 상징적이다. 고담은 지속적으로 타락에의 유혹과 시험이 넘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 얼마나 선한 이가 많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사바세계의 대표성을 띤다. 이러한 설정은 마치 선한 이가 없어 사라진 성경 속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킨다. (한글로 보면 유사한 '고담 Gotham'과 성경 속 '소돔과 고모라 Sodom and Gomorrah'는 실제 영어 철자로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빌런들은 이렇게 타락이 진행되는 고담시를 향한 일종의 상징이다. 타락 중인 고담을 불태워 정화시키려는 광신도 '라스 알 굴', 문명이라는 가면을 파괴하는 순간 중력과도 같은 타락이 수반된다 믿는 혼돈의 사도 '조커', 질서 자체를 무너뜨리기 위해 덧없는 희망을 활용하는 테러리스트 '베인'까지. 삼부작 동안 배트맨이 상대한 빌런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타락의 징표로서 그려진다. 배트맨은 시리즈 내내 선한 인간을 지키고 그들이 스스로 일어나게 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악인들을 공포에 떨게 할 상징(배트맨)을 만들고, 합법적인 정의의 수호자라는 우상(하비 덴트)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노력한 두 개의 축이 모두 무너진 후,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통해 고담 시민 각각이 스스로 일어나도록(Rise) 유도하는 모습은 그래서 완결성을 보인다. 배트맨의 고뇌는 개인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고담이라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측면도 컸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자경단 영웅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는 고민과 결정이야말로 다크 나이트 삼부작의 핵심인 것이다. 

<배트맨 비긴즈>의 라스 알 굴, <다크 나이트>의 조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베인


 새롭게 재편된 DCFU는 어떨까. 성경의 텍스트와 유사하게 DCFU에는 다른 히어로들보다 유별나게 강력한 존재가 있다. 성경의 '그리스도'에 비견되는 이는, 바로 슈퍼맨이다. 그리고 미우나 고우나 DCFU의 작품들은 이 "슈퍼맨을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많은 초점과 질문을 할애한다.


 크립톤 행성에서 불시착한 외계인, '슈퍼맨(칼 엘)-클라크 켄트'는 국가를 초월한 힘과 동시에 선한 의도를 가진 존재로 등장한다. '세상이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그는, 오랜 시간 자신의 초월적인 힘을 통제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는 토네이도에 휩싸여 죽을 때조차 클라크의 도움을 거절한다.) 아버지의 말씀에 충실한, 강력한 힘과 선한 의지를 동시에 지닌 초월자. <맨 오브 스틸> 이후 많은 이들이 이러한 슈퍼맨을 경외하고 우상화하며 심지어 메시아의 현현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DCFU의 배트맨은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경단 역할을 해온 중견 히어로이다. 그는 고담시를 구원하기 위해 범죄자들을 단죄해 왔지만 그 과정 속에서 좌절만을 키워 왔다. '고담에 선한 이가 얼마나 남았겠냐'는 그의 자조 섞인 질문에서 오랜 히어로 활동으로 인한 회환과 울분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조커'에 의해 소중한 사이드킥인 '로빈'마저 희생당한 상황이다. 선한 의도로 시작했으나, 피해의식과 울분으로 점철된 늙은 히어로는 범죄자들에게 사적인 분풀이를 한다.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그는 범죄자들에게 박쥐 모양의 낙인을 찍는데, 낙인이 찍힌 범죄자가 감옥에서 살해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를 계속한다.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사적인 힘의 사용이 가져올 위험에 대해 배트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배트맨은 슈퍼맨을 의심한다. 강력한 힘은 선한 의도에서 시작했더라도, 견제되지 않으면 타락한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배트맨 활동을 통해 경험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신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강력한 슈퍼맨을 그는 의심한다. 더불어 한 치의 어두움도 없이 선한 슈퍼맨을 질투한다. 20년간 괴물로 추락해버린 자신을 바라보며, 그는 슈퍼맨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초월자가 선한 의지를 거두었을 때 우리는 그를 억제할 수 있을까. 브루스 웨인이 품는 이 질문은 DCFU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메시아가 재림하여 법과 국가보다 더 초월적인 힘을 가졌을 때, 우리는 그 선하고 강력한 힘을 통제할 수 있을까. 혹은 통제하여야 하는가. 슈퍼맨의 선한 의지만을 믿고 그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공동체의 합의와 존중이라는 틀에 묶어 억제할 수 있어야 하는가. 이러한 통제에의 욕망은, 다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질투하고 불안해하는 인간만의 한계일까. 


 초법적으로 선을 행하는 강력한 존재에 대한 이러한 '당연한 의심'은 끝내 슈퍼맨을 법정에 출두시킨다. 이 상징적인 장면에서 DCFU는 법정 내 국회의원의 입을 빌려 메시지를 전달한다.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죠. 우린 대화를 하고 상호 합의에 따라 행동합니다. 개인의 독단적인 행동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배트맨 대 슈퍼맨>에 가혹한 혹평을 내린다. '전투씬은 스펙터클 하지만, 전개가 다소 어색하며 이해하기 어렵다.'가 정론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나마 많은 이가 호평한 전투씬은 이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슈퍼맨을 경외하지만 의심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는 인간 배트맨, 더불어 그 힘을 갈망하는 인간 렉스 루터의 시선이야말로 영화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저스티스 리그> 역시 마찬가지다. DCFU의 문법에 비추어 본다면, 새로이 등장할 사이보그, 플래시, 아쿠아맨에 대한 캐릭터 설명은 최소한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슈퍼맨이라는 강력한 초월자가 부재한 순간, 서로 다른 초인들이 힘을 합쳐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영화는 오히려 배트맨의 모습만을 시종일관 비춘다. 슈퍼맨이라는 신을 의심하여 죽게 만든 인간, 그를 부인했기에 그의 역할을 대행해야 하는 인간, 서로 다른 초인을 모아야 하기에 지쳐버린 인간. 영화는 배트맨의 버거운 고뇌와 지친 모습을 충실하게 보여주며, 다시 한번 절대자에 대해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음울하고 진지한 고뇌야말로 디씨 영화를 즐기는 나름의 묘미 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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