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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Jan 15. 2018

신년인사마저 불편하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불편러는 고개를 들어 아재를 지목합니다.

새해부터 불편함을 이야기하다.

2018년, 새 해가 시작되었다. 언제나처럼 카카오톡 대화방(특히 그룹 대화방)에는 신년 인사들로 가득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뜻을 다양한 용어로 재기 넘치게 표현하는 짤방들도 많았다. 특히나 무술년(戊戌年)이니 만큼, 개나 강아지 관련 귀여운 짤방들이 참 좋았다. (작년에 이별하게 된 반려견 '금동이' 생각도 나고 그랬다.)


물론 즐겁고 귀여운 짤방만 있는 건 아니었다. 2018년이라는 발음에 착안들 하셨는지 '십팔년' 관련 짤방은 예사였고, 조선족 관련 혐오 담론을 수면 위로 드러내 준 영화 <범죄도시> 관련 짤방이나 여혐 가득한 짤도 등장했다. 어찌나 센스 넘치는 짤방이신지, 유행에 뒤쳐진 나는 그 대화방에서 말을 잇기 어려웠다.


※ 심지어 마지막 건 맞지도 않다. 병신년(丙申年)은 2016년이고, 지나간 2017년은 정유년(丁酉年)이었다.


재치 있고 센스 넘치는 이런 짤방들을 불편해하는, 나 같은 사람은 소위 '프로 불편러'에 해당하는 사람일 것이다. 아무리 봐도 나 빼고 그들이 '프로 둔감러'일 가능성도 분명 존재하겠으나 넘어가도록 하자. 내가 흥미롭게 느낀 건 굳이 새해의 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문장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타인이 불편할 수 있는 짤을 보내는 그들의 신경줄 굵기였다. 
*주변의 지인 누군가를 저격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짤방이 얼마나 '유행의 첨단'이신지, 꽤나 많은 카톡 대화방에서 동일하거나 비슷한 수준의 짤방을 '선물'받고만 것이다.


 온라인에서 '유쾌한' 짤방으로 자신의 재치를 뽐내던 이들은, 오프라인에서도 역시나 좌중을 휘어잡는다. 송년회/신년회를 명목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고깃집, 술집 등에 모이면 으레 건배사가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 놈의 창의성 없는 '년'드립부터, 꼭 병맛같은 것부터 전염되는 삼행시까지...

"한 상사가 '여성분들은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운을 뗀 뒤 '18년을 위하여'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2018년을 잘 지내보자는 뜻이란 설명이 뒤따랐으나, 김씨는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그는 '팀원이 건배사를 외치자 여기저기서 '그 년은 누구냐' 등 여성비하적인 말들이 농담처럼 이어졌다'며 '윗사람들은 재밌는 건배사라 칭찬했지만 여직원들은 마냥 웃을 수 없는 분위기가 됐다'고 말했다. (중략) 하지만 이곳에서 알려주는 '센스만점 건배사'의 대다수는 성희롱·성차별적 요소를 띠고 있다. 해당 앱은 '(거)절하지말고 (시)키는대로 (기)쁘게 먹자'의 '거시기', '(남)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의 '남존여비' 등을 추천했다. 2010년 남북 이산가족상봉 남측 단장이 만찬에서 했다가 성희롱 논란에 휩싸여 자리에서 물러났던 '오바마(오빠만 바라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봐)' 역시 여전히 인기 건배사로 꼽히고 있었다.

 나이 든 아재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천만에. 나는 카카오톡에서 돌아다니던 선의가 가득 담긴 짤방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 세대와 우리가 아재라 일컫는 저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둔감러들을 향한 조언

몇몇 사람들은 내가 예민하게 군다 말할 것이다. 내가 불편한 건지, 그들이 필요 이상으로 둔감한 건지는 잠시 접어두자. 나는 짤방과 건배사에 두 가지 측면의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째, 그런 섣부른 표현을 불편하게 여기는 나 같은 사람들은 그 순간 형성된 '즐거운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말을 아꼈다는 사실이다. 나는 분위기를 지키기 위해 아꼈는데, 애초에 나를 불편하게 할 단초를 제공한 그들은 왜 그놈의 입을 아끼지 않고 떠들어댈까. 사회적 어젠다에 대한 고민, 공감 능력, 감성의 더듬이 길이는 개인별로 차이가 있다는 누군가의 주장에 백번 동의할지언정. 민감할 수 있는 주제를 구태여 대화의 소재로 끌어오는 마음을 나는 아직 이해하기 어렵다.


뭐, 모를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두 번째 이유는 그들에게 더 중요할 것이다. 그런 발언이야말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가장 힘든 방법이라는 걸 지적하고 싶다. 그저 남들처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신 센스있(다고 생각하시)는 짤방이나 건배사를 시도하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가 있을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대화 분위기를 한껏 고무시키기 위해 서거나, 보다 더 유쾌하고 매력적인 자기 자신을 뽐내고 싶기 때문이거나 말이다. 응, 둘 다 실패했단다.


내가 특히나, 이런 '아재개그'를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인의 불편함에 둔감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과 박수를 받기 위해 구태여 더 유쾌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멋진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누군가의 불편함에 대한 고려를 같이 고민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불편함과 역린을 멋들어지게 피해가며, 모두에게 사랑받을 센스 있는 표현을 쓴다면 언제든 환영이다. 심지어 그 표현이 조금 덜 센스 있거나 덜 멋들어져도, 나는 그러한 노력에 힘껏 박수를 보낼 의향이 있다.


즉, 어쭙잖게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한계에 무지하다면, 굳이 유쾌해지지 말라. 문화적 원시인이 스스로 유쾌하다 여기는 만큼이나 주변에는 불편한 문명인이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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