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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빈은채아빠 Sep 15. 2021

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내 마음대로 책읽기] 제자리걸음인 삶, 그래도 한 발자국 앞으로

작가 장강명의 소설은  독특하다. <표백>에서는 불공정한 세상에서 자살의 권리를 내세우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댓글부대>에서는 온라인 여론을 조작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조작하는 권력자들의 이야기를, <한국이 싫어서>에서는 기회 조차 불공정한 한국 땅을 떠나 호주에 정착한 이의 실패를 이겨내는 정착 이야기를 해준다. 읽었던 소설들 모두 내게는 작가의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주는데, 주로 과거와 현재가 혼용되어 있다. 그래서 소설이니까 쉽게 읽을  있겠지 생각하고 덤벼들면, 작가가 소설 속에서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붙잡기가 어려워진다.

작가의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도 쉽게 생각했다가 혼동된 머리를 붙잡고 읽기를 마쳤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폭력으로 동급생을 칼로 살해하고 10년 가까이 감옥 생활을 한 주인공 '남자'와, 그와 같은 학교 출신으로 출판사 편집 일을 하는 친구 '여자', 그리고 아들을 학교 폭력으로 잃고 10년 넘게 가해자인 '남자'를 쫓아다니는 '아주머니'가 주인공이다. 나름대로 정신 바짝 차리고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가 '아주머니'에게 살해당하고 난 뒤에 공개된 '남자'의 비디오에서, 사실은 죽은 이가 학교 일진이 아니었고, '남자'가 그냥 죽인 것이라는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책 뒤 문학 평론가들의 글을 보니, '남자'의 비디오는 '아주머니'의 바람을 이루어준 것이었고, 살아남은 '아주머니', 10년 넘게 자신의 아들은 억울하게 살해당한 것이라고 믿는 '아주머니'를 위해 남겨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잉? 그러면 '남자'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아주머니'를 따라서 추모관에도 가고, '아주머니'의 스토킹에도 별다르게 거부하지 않았을까. 살인 자체가 동정을 받을 수는 없지만, 괴롭힘 이후에 벌어진 일인 것 아닌가. '아주머니'의 칼에 맞아 죽는 '남자'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지금껏 읽은 작가의 소설 가운데에서 내게는 나름대로 아쉬움이 남는 소설이다. 내가 무슨 문학 평론가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말이다. 오히려 글을 쓰면서도 전과자라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는 '남자'와, 출판사 편집실에서 작가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는 편집자 '여자'의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닿았다. 삶이 녹록지 않다는 사실 말이다.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 말이다. 거기에 안타까움이 있었다.

또 하나는 학교 폭력에 대한 가해자들의 기억이다. '여자'는 같은 이름의 동급생에게 별 뜻 없이 한마디 한 것이 언어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장난이라고 쉽게 치부해 버리는 언어폭력으로, 어떤 아이들은 삶의 방향을 바꾸거나, 더 어둡고 음습한 곳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내 아이들에게도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좋은 음식뿐만 아니라 좋은 말로도 자랄 테니까 말이다.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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