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rpus Christi, 2019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마약을 한 신부님도 아니고, 섹스를 한 신부님도 아니고, 문신을 한 신부님이란다. <Corpus Christi>라는 원제를 보면 성체에 관한 신앙심을 다룰 것 같은, 종교적인 색채가 다분할 것 같은 영화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것은 표면적인 이야기에 불과했다. <문신을 한 신부님>은 옷을 벗기 전까진 알 수 없었던 신부님의 문신처럼, 가려진 허물 내면의 죄, 용서, 사랑, 나아가 구원이라는 것에 대해 날 선 질문을 던지는 영화였다.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단다. 실화가 아닌 픽션이라도 너무나 묵직한 펀치를 날리는 영화인데,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니. 검은 화면 위의 자막이 사라지고, <쇼생크 탈출>(1994)을 떠올리게 하는 성폭행 장면이 등장한다. 목공 훈련을 받던 죄수들이 감독관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여럿이서 한 명에게 린치를 가한다. 흐릿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무겁게 나아갈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퍼스트 리폼드>(2017)의 오프닝에서 역시 우중충한 날씨에 하얀 교회를 찬찬히 바라보던 그것처럼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다시, 감독관이 돌아오자 피해자는 고통에 흐느끼고 있지만, 다른 이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한다. 그 이후 소년원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들에서 그들에게 죄책감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의 주인공 다니엘(바르토시 비엘레니아은)은 전과기록이 있지만, 신부가 된다. 주임신부의 부재로 인한 대행이었고, 사칭이었을 지라도 그는 신부가 된다. 그러나 그것 자체는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니엘의 배경 자체를 중요하게 다루려고 했다면, 신부가 된 이후에 나중에 밝혀지는 과거사로 반전을 줬을 수도 있는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소년원에 있었음을 당당하게 보여주고 시작하니 말이다. 다시, 죄수들이 단체로 린치를 가할 때 다니엘을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는 망을 보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폭행을 가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가담했다. 그리고 카메라가 다니엘을 바라보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도 겹쳐진다. 그리고 그 마지막의 모습은, 다니엘이 가석방된 후 클럽에서 약에 취해 눈을 부릅뜬 그 얼굴과 겹쳐지며, 다시, 그것은 흔히 악마를 표현했을 때의 이미지와도 같다.
다니엘은 직접적으로 가담하진 않았으나, 망을 보고 있었다. 오프닝 이후 본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마을에서는 총 7명의 사망자를 낳은 사건이 있었다. 6명이 탄 차가, 1명이 탄 차와 정면으로 추돌한 것인데, 이 마을에서 사건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것은 아니지만 망을 보고 있었던 것은 주임신부다. 다니엘은 주임신부의 부재를 대체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사건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주임신부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망을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 것인가?
다시, 다니엘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의 모습도 중요하겠다. 석방이 아닌 가석방이 되어 그가 처음 한 것은 친구들을 만나 술과 마약을 하고, 처음 본 심리학과 여학생과 화장실에서 섹스를 한 것이다. 가스파 노에 감독의 <러브>(2015) 속 장면이 떠오른다. 머피가 그랬듯, 다니엘은 순간적인 충동을, 욕망을 이기지 못해 후회할 행동을 한다. 다만, 머피가 후회하게 되는 건 일렉트라의 일침 때문이었으나, 다니엘은 다음날 새벽녘의 공허한 표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소년원에 미사를 오던 신부님의 사제복을 훔쳐 와서 입어보고, 흉내를 낼 뿐이지 신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가 후에 엘리자(엘리자 리쳄벨)의 친구들과 모여 말했던 신앙인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다음 날 마을로 향하는 버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경찰이 다가와 담배를 끄라고 한다. 경찰은 다니엘이 가석방된 상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본다. 마을에 도착해 목공소로 가려니 가기가 싫다. 목공소에 가니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다니엘에게 아는 체하지 않는다. 목공소를 지나니 한 편에 성당이 보인다. 미사가 끝난 성당에 엘리자가 혼자 있었는데, 엘리자 역시 다니엘을 처음 보자마자 가석방됐고, 목공소에서 왔음을 단번에 알아본다. 다니엘은 경찰에게 가석방이 아닌 석방이라 거짓을 말하고, 엘리자의 물음에 역시 가석방이라는 자신의 상황을 숨기고자 신부라고 둘러대기에 이른다.
다니엘은 가석방이 되기 전에 신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토마스 신부(루카즈 시므라트)에게 말하긴 했지만, 전과자라 신학교에 들어갈 수 없다는 답을 받고 단념한 듯 보였다. 그는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지만, 가석방이라는 상태를 숨기고자 하는 의도에서 얼떨결에 신부 행세를 하게 된다. 사제복으로 갈아입으러 들어가서는 덜컥 겁이나 창문으로 도망치려 시도하는 모습에서 역시 유추해볼 수 있다. 어디서 왔는지 보다 어디로 가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다니엘의 대사도 그렇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관심을 두지만, 다니엘은 그것을 원치 않는다.
대행이지만 신부가 되어 처음 미사를 집전할 때, 그는 소년원에서의 토마쉬 신부를 따라 한다.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쓰인 대로 읽는 식의 기계적으로 기도를 하려는 게 아니라는 말을. 그러나 뒷부분은 달리 한다. 토마쉬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신의 사제들이라 했는가 하면, 다니엘은 자신이 신의 사제가 아니니 자신의 기계적인 미사를 듣는 것보다 각자가 진심으로 기도할 것을 말한다. 다니엘은 토마쉬에게 신부가 되고 싶은 열망을 말했으나, 토마쉬는 모두가 신의 사제라고 했으면서도, 다니엘이 전과자라서 신부가 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다니엘은 과거의 토마쉬를 모방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 나아간다.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신부가 된 상황이 아니기에 고해성사 진행 방법을 구글에 검색해보기도 하는 웃지 못할 장면도 나오지만, 그 모든 것이 다니엘의 모습이다. 초등학생의 나이에 담배를 피우는 어린 아들을 때렸다며 온 여인이 어떻게 해야겠냐고 묻는다. 다니엘은 다시 묻는다. 자주 때리냐, 가끔 때리냐라고. 여자는 답한다. 아들이 담배를 가끔 피고, 때리는 것도 가끔이라고. 그러나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 가끔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러나 왜 거짓을 말하냐고 다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다니엘은 해결방법이 간단하다며 아주 센 담배를 사주라고 말한다. 전날 밤 자신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무작정 센 담배를 달라고 했다가, 너무 독해서 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다. 담배에 대해선 그렇고, 폭력에 대해 어떤 처벌을 받아야겠냐는 물음엔, 아들을 자전거에 태워주라고 한다. 담배에 대한 물음에 자신의 경험을 말했듯, 자전거 역시 그러할 것이다. 다니엘은 어렸을 적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어긋났을 것이고, 소년원에 가게 됐을 것이다. 어렸을 적 엄마와 자전거를 타는 것을 소원했을 수 있고, 자전거 자체를 갖는 것을 바랐을 수도 있다. 신부로서 다니엘의 행위들은 어색하고, 엉성했지만, 모두 그의 말처럼 진실한 것이었기에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데에 성공한다.
사실 다니엘이 거짓을 여럿 말하긴 했어도 그는 신앙심에 있어선 진실한 태도를 보인다. 소년원의 독방에서 누구도 보는 이가 없지만 홀로 기도를 하는 모습을 봐도 그렇고, 얼결에 하게 된 미사에 처음엔 당황하고 겁먹은 듯 보였으나 이내 스스로 그것에 심취하는 모습 등이 그러하다. 다시, 오프닝의 장면을 포함해 다니엘은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순간의 난처함을 피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그는 표정에 심리가 단번에 드러난다. 그는 매일, 매 순간 밀려오는 죄책감을 떨쳐내기 위해 그렇게 기도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우중충하고 흐린 이미지들 와중에도 다니엘이 기도나 미사를 할 때면 빛이 한가득 들어오기도 하니 말이다. 다니엘에게 있어 유일한 탈출구가 신앙심이었을 수 있고, 그래서 그렇게 진실한 태도를 강조하고, 본인이 행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다니엘을 예수와 연결 짓는 시도를 많이 하고 있다. 예수는, 그래서 다니엘은 사랑과 평화와 은혜만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메시지가 담긴 설교를 하더라도, 때때로 그것은 마을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를 ‘좋은 사람들’이라 말하고 있었으나, 그 좋은 포장 내면에 숨겨진 모순을 드러내게 하는 시험에 거부감을 보인다. 사람들은 다니엘의 신분증을 본 것도 아니고, 단지 사제복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부님이라 생각해 무조건적인,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다니엘의 말을 거역하고 나선다.
앞서 언급했듯, <문신을 한 신부님>은 단지 신앙심에 대해 말하는 영화도 아니고, <기생충>(2019)에서 기택네 가족이 그러했듯 단지 사칭행위에 대해 말하는 영화도 아니다. 영화의 초반 생략하고, 압축한 다니엘의 설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 신앙인인 나로서는 다니엘이 신부로서 훌륭한 자질을 지녔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주임신부가 미사를 집전했을 때보다 다니엘이 했을 때 더 많은 이들이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니엘이 훌륭하다는 반증인가? 하나 더, 영화는 엘리자를 포함해 다니엘의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의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당에 나오지 않는다. 왜일까. 소년원에서 지내던 아이들은 토마쉬 신부의 지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어떤 과정을 통해 목공소로 보내진다. 그렇기에 다니엘이 먼저 가석방으로 마을에 도착한 후, 소년원에서 같이 있었던 핀체르의 등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소년원(교도소)의 역할이 교화라면, 목공소는 그 연장선에 있는 장소일 것이다. 다시, 기도를 하는 성당이 있지만 영화의 많은 시간을 성당 앞 게시판에 사람들이 모이는 장면으로 할애한다. 왜 사람들은 성당을 두고 그곳에서 기도를 하고 있을까. 망을 보고 있었던 주임신부의 역할에, 종교의 기능에 확신이 없고, 회의를 느꼈기 때문일 테다. 소년원에서 목공소로 나온 다니엘의 이야기와, 성당에서 나와 게시판 앞에 모이는 이들의 이야기는 결코 따로 둘 수 없을 테다.
다니엘을 중심으로 보누스와 엘리자라는 인물도 연결된다. 보누스와 엘리자는 붉은색의 옷을 입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보누스의 동생은 다니엘에게 살해됐고, 엘리자는 자신의 오빠가 사고로 죽었다. 엘리자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녀의 오빠가 사고의 피해자라고 생각할 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모두가 망만 보고, 덮으려고만 할 때 그것을 들춰내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다니엘에게 다가간다. 엘리자의 접근은 모두 고해성사일 것이다. 성당이 아닌 게시판에서 기도를 하던 이들처럼, 성당에 가지 않는 엘리자의 고해성사가 이뤄지는 장면들일 것이다. 그래서 또래의 이성에게 느끼는 감정이 아닐 것이다. 다니엘과 엘리사의 섹스 역시 그것의 연장이라 보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에 다니엘이 자신의 문신을 내보이며 마을을 떠나자 엘리자는 마을을 떠나는 것일 테다. 가석방 조건을 지키지 못한 다니엘이 다시 소년원으로 가 보누스와 맞붙게 되는 장면이 있다. 앞서 망을 보던 다니엘이 피해 당사자가 되고 다른 이가 망을 보고 있다. 박치기로 보누스를 제압한 다니엘을 내쫓은 이들은 창고에 불을 지른다. 마을에서도 사고 피해자들의 유품을 모아뒀던 창고에 불이 났었다.
예수의 아버지는 목수였고, 메시아가 아니었다면 목공소에 있었을 것이다. 다니엘은 마지막 미사를 앞두고 예수의 그림을 올려다본다. 그의 시선을 따라 예수의 모습을 담던 카메라는 다시 다니엘을 봄으로써 둘을 동일시한다. 다니엘의 몸에 난 문신은 신부가 되기엔 부적합한 무엇이 아니라 예수의 손과 발에 박힌 상처처럼 보이게 된다. 성당의 집사격으로 있던, 그리고 엘리자의 엄마인 리디아가 다니엘을 진정 신자로서 대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이 된다. 다니엘은 사제복을 입음으로써 가짜 신부가 되었지만, 오히려 사제복을 벗음으로써 진짜 신부가, 나아가 예수가 된다.
비록 다니엘은 신부를 사칭한 것이었으나 마을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서로 적대시하던 사람들은 성당에 모인다. 그러나 엘리자는 마을을 떠났고, 다니엘은 다시 소년원으로 돌아가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 앞서 언급했듯 섬뜩한 표정의 다니엘은 약에 취해 클럽에 있던 그 모습처럼 악마같이 보이기도 하면서, 박치기로 인해 얼굴에 피가 흐르는 모습은 가시면류관에 찔려 피를 흘리던 예수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니엘은 마을 사람들을 구원한 것인가? 그렇게 독실한 신앙인처럼 보였던 이가 기도조차 거부하고 오히려 과거로 퇴보한 것인가? 그 모든 것이 전지전능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일 수 있고, 계획일 수 있지만, 그것을 겪어나가는, 해쳐나가는 것은 온전히 그의 답을 들을 수 없는 인간의 몫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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