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ine, 2020
그리고 <트랜짓>
물의 요정 운디네. 요정과 정령 그 어딘가에 위치하는 존재인 운디네는 인간 남성과 사랑에 빠졌다가 인간인 대상의 수명이 자신과 달라 혼자 남겨진다거나, 남자가 배신하고 다른 여성을 만나 익사시켜 복수한다던가 하는 설이 있다. 무엇이 정확한 지는 잘 모르겠으나, "멀고 먼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에 깊게 빠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크리스티안 펫졸트와 독일에 대해 잘 모르긴 해도, 나는 <트랜짓>(2018)과 <운디네>를 보며 지아장커 감독님의 <스틸라이프>(2006)가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트랜짓>을 볼 때, 나는 온 힘을 다 해 영화를 받아들이고자 애를 썼다. 내가 조금 더 이 영화를 잘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길 바라는 욕구가 내 안에서 치솟았다. 불안한 듯 혹은 신나는 듯 다리는 떨렸고 영화가 끝나니 등에 식은땀이 났더랬다. 내 인생에서 그런 경험이 몇 번이나 있을까. 기대에 가득 차선 고대하던 <운디네>를, 아니 <운디네>의 오프닝만 보고도 나는 펫졸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에드워드 양 감독님의 <하나 그리고 둘>(2000)이 그랬고, 지아장커 감독님의 <스틸 라이프>가 그랬고,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님의 <트랜짓>(<운디네>를 본 후에 작성하는 글이나, <트랜짓>이 더 좋다)이 그랬다. 2000년과 2006년의 작품 이후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만난 슬프고도 담담한 풍경화 같은 영화였다.
물의 요정인 운디네 답게 오프닝에서 캐릭터를 구축할 때 역시 물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카페테리아에 앉아있던 운디네(폴라 비어)에게 맞은편의 요하네스(제이콥 맛쉔즈)는 커피 한 잔을 더 권한다. 운디네는 커피는 됐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한다. 그러지 않고 다른 여자에게 갈 경우 죽일 것이라고. 온통 검은색 의상을 입은 운디네는 킬러인가 싶었다. 그래서 요하네스를 죽이는 스릴러가 펼쳐지나 했다. 운디네는 요하네스에게 거절했던 커피를 부탁하고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눈물을 흘린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운디네와 요하네스의 이야기가 있었고, 여기서 끝이 났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운디네의 시선이 닿는 곳에 영화의 제목이 나오다가 사라지니 요하네스가 고운 거품이 입술에 묻는 카푸치노를 가져온다. 도시 주택 개발위원회에 속해있고 역사학자이며, 방문객을 대상으로 박물관 도슨트를 맡고 있는 운디네는 강의가 있어 잠시 다녀올 테니 요하네스에게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나 강의 후에 그는 사라졌고, 운디네는 그를 찾아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화장실에 갔나? 그러나 누구도 보이지 않고, 다 잠기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고 있다. 수도꼭지를 잠그니 앞서 강의 중 요하네스를 의식하던 때부터 나오던 음악이 꺼진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항 속 잠수부 장식품이 말을 건 것 같다. 이때 운디네의 강의를 잘 들었다던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스키)가 들어오고, 운디네와 대화를 나누던 중 뒷걸음질 치다가 그 어항을 깨고야 만다. 운디네와 크리스토프 위로 어항에 담겨있던 물이 쏟아지고, 어항의 유리파편이 운디네의 복부에 박힌다. 크리스토프는 그 유리파편을 뽑아준다.
나는 감희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이 오프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도시개발 강의까지 말이다. 지나간 사랑 요하네스가 가고 새로운 사랑 크리스토프가 왔다. 그 멜로가 중요한 영화인가? 요하네스와 크리스토프의 등장 사이에 위치한 강의를 일부러 공들여 찍었을 리 없다. <트랜짓>에서 일부러 선로가 바뀌는 장면이 삽입된 것과 같은 것이리라. 방문객들에게 운디네는 “아는 만큼 보일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죄송합니다. 아는 게 적어 보이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나눠놓은 동독과 서독,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모델 그리고 그것이 공존하는 베를린 모델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런 것일까? 싶은 생각에 멈춰있는 나를 두고 스크린 위의 영화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멀리 나아간다. 크리스토프와 운디네는 다시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야 할 거리에 있다. 요하네스와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거리에 있다면, 크리스토프는 그렇지 못하다.
운디네가 강의에서 소개한 베를린의 모델에서도 두 가지 양식을 서로 다른 두 가지 색으로 표현해 구분되도록 해두었다. 휴전선으로 막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국민들은 서로 오갈 수 없지만, 장벽으로 막혀있던 독일에선 그것이 가능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2015)에서도 봤었다. 그래서 물의 요정인 운디네는 산업 잠수부인 크리스토프와 잠수를 하게 되는데, <스틸 라이프>의 그 우주선과도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트랜짓>이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면, <운디네>는 요정이 등장하는 신화와 현실을 오간다. 그 비현실적인 모종의 사건 이후 운디네는 의식을 잃고, 크리스토프는 운디네를 뭍으로 데려와 심폐소생술을 실시한다. 운디네는 크리스토프에 의해 살아났다. 그런데 운디네는 자신을 다시 한번 살려달라고 한다. 다시, 물의 요정 운디네에게 가공품인 카푸치노를 건네는 요하네스, 그와의 이별에서 받은 상처인 유리파편을 크리스토프는 뽑아낸다. 물속에서 의식을 잃었던 운디네를 되살렸다. 요하네스와의 관계를 알고 추궁하는 크리스토프에게 “심장박동이 느껴졌어. 잠시 심장이 멈췄어. 그 사람 없이 못 살 거로 생각했어. 잠시 심장이 멈췄을 수도 있어. 하지만 당신 품에서 다시 뛰었어.”라 말하기도 한다. 요하네스는 딱히 어떤 노동을 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크리스토프는 산업 노동자다. 펫졸트는 자본주의 하 서독을 뒤로하고, 사회주의 하 동독을 지지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운디네를 떠나는 크리스토프를 영화의 종반에 보고 난 이후다.
운디네는 서독의 요하네스도, 동독의 크리스토프도 보낸다. 운디네는 잠수 중 사고로 인해 뇌사 상태에 빠진 크리스토프를 마주한다. 어젯밤에 요하네스와의 관계에 대해 추궁했던 그가 사실 그 전인 낮에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 운디네는 요하네스를 찾는다. 오프닝에서의 경고처럼 그를 죽인다. 그리곤 크리스토프가 사고를 당했던, 함께 들어갔었던 저수지로 향한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깨어난다. 요하네스에 대한 복수를 행했으니 크리스토프가 깨어난 것일까. 서독을 뒤로했으니 동독에 빛이 든 것인가. 큰 감정의 파동 없이, 표정의 변화도 별로 없이 진행되던 영화에 비현실적인 순간들이 있을 때에야 그 파동과 변화가 가장 커진다. 그 힘이 저수지에 잠긴 건축물에 누군가 새겨놓은 운디네의 이름처럼 세월이, 역사가 흐르게 했고, 진보하게 했다.
그리고 그걸 보는 것은 카메라이며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감독이고 그의 연출이다. 영화의 많은 부분에서 카메라는 시점 숏이었고, 영화의 많은 부분에서 점프컷은 사람의 시선이었다.
<스틸 라이프>는 수많은 환경운동가들과 학자들의 비판에도 1994년에 시작해 2003년에 완공된 싼샤댐과 그리고 그 공사로 인해 침몰된 천여 개의 마을을 다룬다. 2006년의 영화 안에선 아직도 물에 잠기고 있고, 아직도 떠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뤘다면, 2020년의 현실에선 엄청난 물난리가 났었다. <스틸 라이프>도 <운디네>도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이 혼재돼있는 영화다. <스틸 라이프>는 현실을 그리며 변화하고 있는 역사를 담았고, 느리지만 처참한 상황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이들을 보여주며 맺었다. <운디네>는 사회주의의 건물과 자본주의의 건물이 혼재하는 베를린의 모델을 보여주었고, 앞으로의 날을 기다린다. 만약 남북이 통일을 이룬다면, 어떤 모습일까. 지금의 서울과 평양은 어떻게 변할까. 운디네는 떠나가는 크리스토프와 그의 아내를 바라보며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훗날 자신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누군가를 기다리며. 훗날 다시 마주할 세상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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