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ll Moon In Paris, 1984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사랑에 실패한다. 필모그라피를 따라갈수록 그것이 더 이상 놀랍지 않게 된다. 이제는 실패할 건데, 어떻게 그 실패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가 더 궁금하다. 홍상수의 영화도 그렇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로메르의 경우 초월적인 어떤 현상으로 성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성공에는 대가가 따른다. 로메르의 영화도, 홍상수의 영화도 우리 일상의 순간들을 담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로메르의 영화에서 사랑은 일상에서 벗어나 있다. 일 년 만에 떠난 휴가지에서 잠시 그렇다던가, 혹은 거주지에서 거리가 있는 어딘가로 떠나서 만나게 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도 그렇다. <오! 수정>(2000)은 경복궁에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에선 수원 화성 행궁에서였다. 우리의 일상에서 고궁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강원도의 힘>(1998)은 강릉으로의 여행에서, <생활의 발견>(2002)에선 춘천으로의 여행에서였다.(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 요즘에는 더더욱 그럴 것 같다.) 왜 일상에서 벗어난 곳에서만 사랑을 보여주는 것인가. 일상과 사랑을 왜 그렇게 떼어놓으려는 것일까. 일상과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인가.
루이즈(파스칼 오지에)는 동거하는 남자 친구가 있으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 루이즈는 레미(체키 카료)를 사랑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공간과 순간에서만 그렇다. 심지어는 그와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도 다르다. 밤이면, 특히 금요일에 라면 친구들과 만나 유흥을 즐기고 싶은 루이즈와, 토요일 아침부터 운동을 하고 싶어 하는 레미다. 레미는 직장과 가까운 교외에 거주하고 있고, 루이즈는 자신의 여가를 위해 파리로 나와야 한다. 루이즈는 작가인 친구 옥타브(파브리스 루치니)와 자주 만나기도 하지만, 옥타브는 루이즈를 단순히 친구로만 보진 않는 것 같다. 루이즈는 레미와 여가에 대한 다른 생각으로 빚는 갈등을 줄이기 위해 교외에 위치한 레미의 집에 거주하면서도 파리에 자신의 아파트에서 거주하길 원한다.
<만월의 밤>은 단지 루이즈가 남자 친구 레미가 있는 상태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는 이중생활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닐 테다. 영화는 공간에 대해 말한다. 루이즈는 레미와 집 안에선 서로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한다. 하지만 집 밖으로 나와선 갈등을 빚는다. 집에 손님이 오면 겉옷을 받아주고, 앉을자리를 안내해주고, 마실 것을 내어주는 장면이 교과서적인데 루이즈는 그렇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루이즈의 집에 온 옥타브가 한참을 서서 얘기하다가 “좀 앉아도 돼?”라고 묻는 것이었다. 루이즈가 레미의 집에서 나와 독립하고자 한 것엔 자신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 영역에서 온전히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원하는 대로 성을 쌓아 올리는 데에 친한 친구에게도 내어줄 공간은 없다. 그렇게 구축한 공간에 앉는 것만으로 인물들은 다른 분위기를 형성한다. 레미와 시간을 두고 보이는 차이도 공간에 대한 것이다. 어두운 밤중에 할 수 없는 테니스와, 밤중에 열리는 파티가 그렇듯 말이다.
<만월의 밤>이 인용한 “두 여자를 가진 자는 영혼을 잃고 두 집을 가진 자는 이성을 잃는다.”는 격언은 단지 루이즈가 두 공간에서의 사랑에 실패함을 말하고자 함은 아닐 것이다. 루이즈는 교외에서 파리로 나와 자신을 다른 공간에, 그러니까 다른 위치에 두고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 시선의 대상은 레미가 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되기도 할 것이다. 다르게 보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다는 걸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바캉스에서의 사랑도 그렇다. 그때는 무슨 콩깍지가 씌어서 대단한 미인을 사랑한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경우도 있다. 혹은 지나고 나서 놓친 사랑에 후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은 알 수 없고, 지나고 나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보름달이 뜬 밤 카페에서 만난 이가 “동전을 던져 봐요!”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하비 덴트의 양면이 같은 동전이 없다면야, 실패 후 맞이할 외로움을 각오하고서라도 두 가지 선택지를 모두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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