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Girlfriend's Boyfriend, 1987
“세계에 아름다움이 있기에 영화에도 아름다움이 있다. 어떻게 예술, 인간의 작품이 자연의 성스러운 작품과 동등할 수 있을까? 기껏해야 그것은 창조자의 손이 만들어낸 우주의 현시일 뿐이다. 만약 관객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세계의 이미지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만약 삶을 찬양할 수 없다면, 어떻게 삶의 모방을 찬송할 수 있을까? 내가 무언가 촬영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라는 에릭 로메르의 말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가 아닐까. 얼핏 우디 앨런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Vicky Cristina Barcelona)(2008)라는 제목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궤가 다르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는 사랑에 어딘가 흠이 있지만, 그건 그대로 그래서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서는 그런 행동을 하기 전에 사유하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깊이 고민한다. 지극히 일상의 모습이나 단조롭지 않다. 이미 그런 관계 자체가 너무 역동적이고 극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로메르의 영화에서 그것은 많은 양의 대사를 통해 드러나지만 그것은 어려운 철학적인 영역이 아니다. 인물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자신의 일상 속에서 주관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로메르는 사유의 결과나 객관적인 판단보다 사유하는 과정에 중점을 두고, 인물들이 자신의 의식 속에서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과정에 중심을 둔다. 그 모든 것을 화면에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선 그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합리화를 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모든 과정을 지켜봐 왔기에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게 내리는 판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의 언행에 대한 판단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성찰이 되기도 한다. 로메르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자신의 욕망을 두고 하는 사유는 관객에게 일종의 게임이 된다. 내가 저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쉽사리 다수의 타인들과 함께할 순 없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거나, 누군가에겐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블랑쉬(엠마뉴엘 샤울렛)의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도 그런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로메르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반응을 담은 컨텐츠도 볼만 할 것.
영화는 블랑쉬와 레아(소피 르누아르)가 사내 식당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블랑쉬와 레아는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 근교의 도시에서 지내고 있다. 규모가 작은 만큼 그곳의 커뮤니티 역시 그리 크지 않았는데, 블랑쉬는 레아의 친구들을 소개받게 된다. 멋들어진 알렉상드르(프랑수아 에릭 젠드론)와 멜로라인이 형성되나 싶었으나 영화의 제목은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였다. 레아에겐 파비앙(에릭 빌라드)이라는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레아와 파비앙은 시작부터 마찰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을 좋아하는 파비앙과 반대로 수영도 할 줄 모르는 레아. 파비앙이 너무 다정한 나머지 오히려 그것이 부담스러운 레아. 레아에겐 블랑쉬도 그런 편이었다.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에 파동이 생기는 사건은 레아의 여행이다. 레아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블랑쉬에게 파비앙과 친해져 볼 것을 권한다. 연인인 레아와 큰 공감과 믿음을 갖지 못했던 파비앙은 공통점이 많은 블랑쉬에게 모종의 감정을 느끼지만, 블랑쉬는 그가 레아의 남자 친구이기에 사랑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자신도 파비앙에게 어떤 마음들이 생긴 것을 인지하고 있으나, 그게 어떤 감정인지도 알 것 같지만, 도덕적인 이유 때문에 파비앙에게 향하는 감정을 옭아맨다. 서로에게 동시에 사랑의 감정이 싹튼 둘과 레아의 삼각관계는 알렉상드르의 친구네 집에서 열리는 파티의 의상으로 드러난다. 아니,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영화는 색으로 이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전에 로메르의 영화에서 색을 포함한 설정들은 단지 그가 그것을 입었을 뿐, 그곳에 그것이 있었을 뿐, 연출적인 의도가 많이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보였는데,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에서는 다르다. 그 색이란 것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처럼 너무 노골적이기까지 하다.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오프닝에선 파란색과 초록색이 어우러져있는 건물을 보여준다. 파란 자켓을 걸치고 있는 블랑쉬가 보인다. 식당에서 홀로 식사를 하고 있는 블랑쉬에게 초록빛 카디건을 입은 레아가 다가온다. 친구가 없어 외롭다는 블랑쉬와 레아는 점심시간을 같이 보내기로 하고, 식사를 하러 가기도 한다. 초록색 수영복을 입은 블랑쉬와 파란색 수영복을 입은 레아에게 파란 수영복을 입은 알렉상드르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자리엔 알렉상드르의 연인 아드리안느(안느 로르 메리)가 있었다. 다른 날, 노란 상의에 초록 치마를 입고 출근했던 블랑쉬는 초록 상의에 청바지를 입은 레아와 자신의 집으로 가선 초록 치마를 벗고 같은 청바지로 갈아입는다. 이때 레아는 파비앙에게 갖고 있는 서운함을 블랑쉬에게 토로한다. 이후 파비앙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블랑쉬는 파란 상의에 분홍색 옷을 걸치고 있고, 파비앙은 붉은색 셔츠를 입고 있다. 레아는 파란색. 이후 빨간 상의를 입고 있는 블랑쉬와 푸른 계열의 옷을 입고 있는 블랑쉬가 지나가다 우연히 만나고 윈드서핑을 함께 하게 된다. <수집가>(1967)에서처럼 옷의 지퍼를 내려주는 장면은 단지 옷의 기능 때문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에 걸리는 블랑쉬의 마음을 파비앙은 열었다. 이렇게 계속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색의 설정을 가져간다.
이 영화는 로메르의 연작 “희극과 잠언” 중 마지막 작품이다. “희극과 잠언” 연작은 모두 영화가 시작할 때 하나의 격언들이 소개되는데, 이 영화의 경우 “내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이다.”였다. “내 친구의 친구”로 생각해도,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로 생각해도 블랑쉬의 친구 레아의 남자 친구인 파비앙을 생각하게 하지만, 이는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해당된다.
블랑쉬 - 레아 - 파비앙
블랑쉬 - 레아 - 아드리안느
아드리안느 - 알렉상드르 - 레아
레아 - 아드리안느 - 블랑쉬
레아 - 파비앙 - 블랑쉬
파비앙 - 알렉상드르 - 블랑쉬
파비앙 - 알렉상드르 - 레아
...
영화는 개개인이 위치한 작은 실내에서 시작해 점차 공간의 규모를 넓혀간다. 사무실-식당-수영장-호수-공원처럼 말이다. 그리고 개인과 개인에서 시작한 관계는 점차 확장한다. 주인공들을 지나치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이들의 색을 발견할 수 있듯 모두에게 해당되고, 모든 이들이 거쳐 가는 순환의 흐름을 다섯 명의 캐릭터에게 분할하여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앞서 나열한 것처럼 마치 논리적인 구조로 보이는데, 사실 영화는 일상 속에서 우연하고도 아이러니하게 발생하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초반부 식당에서 푸른색의 블랑쉬와 초록의 레아의 만남은 초록의 블랑쉬와 알렉상드르, 파랑의 레아, 블랑쉬를 거쳐 결말에는 초록의 블랑쉬와 파랑의 파비앙, 초록의 알렉상드르와 파랑의 레아로 나아간다. 서로의 색이 서로에게 옮겨 갔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이 순환의 흐름은 단지 이 영화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닌, 지난 “희극과 잠언” 연작들을 모두 관통한다.
블랑쉬는 파비앙에게 고백한다. “내가 사랑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이미지였다는 것을 알았어. 날 따라다니는 이미지. ... 그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졌어. 모든 게 순식간이었어. 흰색이 검은색이 되고,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지.” 파비앙은 반문한다. “이미지라 해도 그렇게 사라지진 않아.”
블랑쉬는 다시 말한다. “사라져. 1달 전에 그가 나를 사랑했거나,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정말 흥분됐을 거야. 하지만 내 생각에 그런 일이 그때 그 자리에서 있었으면, 그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을 거야.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반대인 사람을 만나고 있어.”
이제 파비앙은 말한다.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해?”
- “응.”
“나와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 “그래, 가지마.”
“가야만 해. 월요일에 돌아올게.”
- “또 떠나려고?”
“하지만 너와 함께야, 너만 좋다면.”
-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만월의 밤>(1984)에서도 그랬지만, 그 순환에서 인물 A가 B의 위치에 가기도 하고, B가 C의 자리에 가기도 하며, C가 A의 자리에 가기도 한다.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는 알렉상드르가 되기도 하고 파비앙이 되기도 한다. 내 친구의 친구라면 더더욱 그렇다. 명확하게 보여주는 색의 설정과 어렵지 않은 내러티브이지만 주체와 대상이 명확하지 않게 된다. 관객은 자신의 경험이나 영화를 볼 때의 논리적 흐름을 포함해 다양한 상황과 위치에서의 관점을 갖게 된다. 그렇게 섬세하고 치밀하게 직조된 관계를 보고 있다가 마주하게 되는 블랑쉬의 감정 폭발은 소름이 돋았다. <만월의 밤>에서 루이즈(파스칼 오지에)가 자신을 주체의 위치에서 객체의 자리로 옮겨선 봤을 때, <녹색 광선>(1986)에서 델핀(마리 리비에르)가 초현실적인 현상을 목격하고 겪게 되는 감정이었다. 그 시리도록 맑은 햇빛이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뚫고 블랑쉬에게 비쳤 을 때 나는 블랑쉬의 감정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에릭 로메르라는 이름이 거대하고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단지 극 중 인물에게 공감하거나 이입하는 단계를 넘어 실제로 내가 그것을 겪어봤거나 지금 겪는 것처럼 체현해내는 것 같았다.
<클레오의 무릎>(1970)에서 제롬(장 클로드 브리알리)이 오로라(오로라 코르니)에게 클레오(로랑스 드 모나강)의 무릎을 만진 것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들른 움막에서 제롬은 욕망의 대상이었던 클레오의 무릎을 만지고야 만다. 로메르는 제롬이 클레오의 무릎을 만지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곳에 만지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는 것 외엔 보이지 않는다. 이후 그것을 오로라에게 말할 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제롬이 클레오의 무릎을 만지기 전에, 만질 때,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말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은 스크린이 아닌 머릿속에서 또 다른 장면을 보게 된다. 제롬의 입을 통해 오로라의 귀로 들어간 정보는 오로라의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펼쳐졌을 테다. 화면엔 보이지 않지만 관객 역시 그 이미지를 눈으로 보개 된다. “여섯 도덕 이야기” 연작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에서 블랑쉬가 그 하늘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장면은 지난 20년이 넘는 세월 로메르가 감독으로서 영화에 투영한 것을 다 담아 놓은 것 같았다. 그 한 장면에 스쳐 지나간 로메르의 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의 나의 모습이 보였다.
블랑쉬는 심지어 자신을 울게 만든 고민으로부터 해방된 결말을 맞는다. 영화는 분명 해피엔딩처럼 보이는데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왜인지 벽에 부딪힌 것 같았다. 검은 화면에 올라가는 크레딧 대신, 그렇게 웃으며 안고 있는 블랑쉬와 파비앙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것을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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