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 D'Hiver, A Tale Of Winter, 1992
펠리시: 원래 선택을 할 땐 잘 모르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선택이 아니지. 선택에는 늘 위험이 따르는 법이니.
브르타뉴에서 휴가를 보내던 펠리시(샬롯 베리)는 샤를르(프레데릭 반 덴 드리에스쉐)를 만나 꿈같은 나날을 보낸다. 해변에서 잠든 둘의 발을 적실만큼 물이 차고서야 둘은 잠에서 깬다. 둘이 헤어질 시간이 벌써 이만큼이나 다가와 있었다. 휴가를 끝내고 파리로 돌아와야 했던 펠리시는 샤를르에게 자신의 주소를 전달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그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다. 펠리시는 뒤늦게 자신이 주소를 잘못 알려줬음을 알게 된다. 야속하게도 “5년 후”라는 자막이 나온다. 실제였겠지만 허구처럼 지나간 둘의 달콤했던 시간들. 펠리시는 샤를르를 향한 마음을 간직한 채 그의 딸 앨리스를 홀로 키우는 미혼모가 돼있었다.
꿈과 환상 같았던 순간들은 첫 시퀀스에서 끝났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어머니와 남자 친구의 집을 오가며 지내는 고단한 펠리시의 삶이 나열된다. 로메르는 펠리시의 고단함을 모두 보여준다. 한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대중교통 안에서의 모습마저 말이다. 심지어 길게. 우리는 대개 어떤 곳으로 향하고 있다. 아주 분명하진 않더라도 목적지가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 길이 너무 멀어서 잠시 노래를 듣거나, 책을 보거나, SNS나 OTT를 사용하기도 한다. 펠리시는 그런 상태에 있다. 샤를르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에 살고 있다. 이미 5년이 넘게 흘렀고, 포기할 법도 한데 펠리시는 언젠가 샤를르를 다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살아간다.
펠리시: 네 말이 맞을 수도 있어. 샤를르가 결혼했을 수도 있고, 이제 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렇다고 그게 내가 그를 포기할 이유가 되는 건 아냐.
로익: 그를 만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단 걸 알면서, 그것 때문에 네 인생을 망쳐선 안돼.
펠리시: 아니, 그를 다시 찾는다면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일 거야. 그걸 위해 내 삶을 기꺼이 바치고 싶을 정도로 큰 기쁨일 거야. 또 삶을 낭비하는 것도 아니고. 희망을 갖고 사는 게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해.
펠리시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이라곤 <로미오와 줄리엣> 밖에 몰랐지만, 우연한 계기로 보게 된 <겨울 이야기>라는 극을 보고 지녀왔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말했던 믿음은 종교적인 것이었으나, 로메르는 선택에 따른 것이라 말한다. 의도치 않게 <겨울 이야기>보다 먼저 개봉한 <여름 이야기>를 보았으나, 그래서 펠리시의 것은 <여름 이야기>의 가스파르(멜빌 푸포)와는 다른 지점이다. 가스파르는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고 믿는지 확신이 없다. 그러나 펠리시는 아주 확고하다. 누군가가 그것을 비현실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겨울 이야기> 보다 6년 먼저 세상에 선보였던 <녹색 광선>(1990)의 마지막 장면처럼, 펠리시의 믿음이 비로소 현현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선택과 믿음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일상은 기다림이 된다. 그리고 매일 반복되던 그 일상은 지루한 것이 아닌 신의 축복 같은 아름다운 것이 된다. 심지어 그 축복은 마을버스 안에서였다. 1월 1일 새해 첫날 펠리시는 샤를르를 다시 만났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다.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가던 펠리시의 일상 속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것. 에릭 로메르의 겨울을 보는 것.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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