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 Amours D'Astree Et De Celadon, 2007
<몽소 빵집>(1962)로 시작한 “여섯 도덕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80년대의 “희극과 잠언”, 90년대의 “사계절 이야기”까지 에릭 로메르는 사랑에 대한 영화들을 만들었고, 그의 마지막 작품인 <로맨스>는 그것들의 집대성 같은 느낌을 줬다.
집안의 반대로 아스트레(스테파니 크라옌코르)와 셀라동(앤디 질렛)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사람들 앞에선 서로 아무 사이가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셀라동은 부모님이 마음에 들어할 법한 여인과 연인인 척 연기를 하는데 그 연기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아스트레의 화를 사고 만다. 아스트레는 셀라동을 나무라고, 자기가 원할 때까지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한다. 셀라동은 충격에 강물로 뛰어들고 만다. 그렇게 찾을 수 없게 사라진 셀라동을 사람들은 죽었다고 여기게 된다. 한편 셀라동은 님프들에 의해 살아나게 됐지만, 아스트레에게 갈 수 없다. 도를 넘은 셀라동의 순진함에 고개를 갸웃하게 되지만, 로메르는 다시 모럴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수집가>(1967)이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1969), <만월의 밤>(1984), <겨울 이야기>(1998) 등을 관통하는 믿음, 그중에서도 사랑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어기지 않는 정조에 대해 말한다. 셀라동이 아스트레에게 가지 못하고 숲 속에서 머물 땐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1987)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을 느끼지만 눈물이 나던, 파비앙과 한 없이 가깝게 있고 싶지만 내가 싫으면 아무것도 안 한다던 블랑쉬의 장면. <로맨스>는 프랑스 중남미의 포레즈 고원에서 17세기의 신화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했다. 셀라동은 아스트레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그녀의 이름을 딴 신전을 만든다.
<겨울 이야기>의 펠리시는 샤를르를 언젠간 만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았다. 아스트레는 셀라동에게 모질게 말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 슬픈 나날을 보내던 그녀의 앞에 사제 복장을 한, 셀라동과 꼭 닮은 이가 나타난다. 아스트레는 신께 기도한다. 이게 꿈이 아니길. <녹색 광선>(1986)의 델핀느가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도 그랬다. “여섯 도덕 이야기”는 사랑을 포함한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에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밀며 이야기를 끝냈다. “희극과 잠언”에선 그 이후의 시점에서 시작해 갈등과 선택에 대해 말했다. <로맨스>는 아스트레가 겪었던 찰나의 순간을 제외하곤 사랑에 대한 헌신에 집중한다. 셀라동은 아스트레의 이름을 딴 신전에 사랑의 계명을 적는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서 시작했을지 모를 로메르의 현실적인, 그러나 신화적 요소를 가미한 영화에서 더 이상 불신과 질투, 배신 같은 건 없고 사랑을 절대적인 것, 종교적인 것의 지위에 올려놓는다.
“완벽한 연인이 되려면 끝없이 사랑하라. 지고한 사랑만이 값지며, 옹졸함은 정조보다 배신에 더욱 가깝도다. 한 곳에서만 사랑하고, 이 사랑의 모든 면을 사랑하라. 추구하는 행복의 대상은 오로지 하나여야 한다.”
에릭 로메르는 그간 바닷가에서, 휴양지에서, 도시에서 여러 모양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줬고, 마지막엔 중세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신비한 힘을 지녔을 것 같은 떡갈나무가 있는 숲에서 그 사랑이 이루어지게 했다. 로메르의 많은 영화를 봤음에도 결코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 어서 그의 다음 영화를 보며 그것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에 아쉽다. 한동안 아스트레를 보지 못했던 셀라동은 우연히 숲에서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보고 온몸에 눈이 달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많은 눈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잘 담을 수 있게 말이다. 로메르의 영화를 보는 동안 나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내 몸에 눈은 둘 뿐이고, 기억 속 이미지들은 지금도 날아가고 있다. 그것이 너무나 아쉽지만, 보고 있어도 보고 싶지만, 그런 아쉬움을 주는 영화가 좋은 영화가 아닐까. 다음에 다시 보게 될 때를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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