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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이민자 Feb 13. 2017

99일

시네마천국, 그리고 이직.

99일


이직을 결심했을 때 떠오른 이야기다.


국왕의 호위 무사는 어느 날 연회에서

공주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어.

병사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공주와 병사의 신분 차이는 엄청났지.

어느날 병사는 드디어 공주에게 말을 걸었어.

공주 없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야.

공주는 병사의 말에 깊이 감동을 받았어.

공주는 병사에게 말했지.

그대가 100일 밤낮을 내 발코니 밑에서 기다린다면

기꺼이 그대와 결혼을 하겠어요.

병사는 쏜살같이 공주의 발코니 밑으로 달려갔어.

하루, 이틀,

10일, 20일이 지났지.

공주는 창문으로 줄곧 보았고, 병사는 꿈쩍도 안했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변함이 없었지.

새가 똥을 싸도 벌한테 쏘여도 움직이지 않았어.

그리고 90일이 지나자, 병사는 전신이 마비되고 탈진 상태에 이르렀어.

눈물만 흘릴 뿐이었지.

눈물을 억제할 힘도, 잠을 잘 힘도 없었던 거야.

공주는 줄곧 지켜보았어.

드디어 99일 째밤, 병사는 일어서서 의자를 들고 가버렸어.


마지막 밤에요?


그래, 마지막 밤에.

이유는 묻지 마라, 나도 모르니까.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늙은 알프레도가 짝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던 토토에게 한 이야기다. 당시 토토는 부잣집 딸 엘레나와 사랑에 빠져 있었으나 엘레나 부모의 반대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알프레도는 이들이 맺어지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이 이야기를 전해준 것이었을테다. 토토야, 지금은 사랑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 벅차 오르겠지만, 어쩌면 네가 의자를 들고 떠나버려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몰라.


 깔고 앉은 의자를 들고 일어서야 하는지, 하루를 더 기다려 공주와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지, 나는 고민했다. 10년을 머문 직장이었고 부서였다. 살면서 가장 오래 한 곳에 머문 경험이었다. 이곳에 있음으로써 이른바 드라마 업계에 들어왔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배우고 연출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제 장편을 준비해야할 기점이었다. 왜 의자를 짊어지고 떠나야 하는데?


 이 이야기가 삶의 지혜를 담은 교훈담으로 성립하려면 둘 중 하나의 전제는 성립해야 한다. 첫째, 공주의 사랑은 처음부터 진실하지 않았다. 병사에게 사랑을 증명하라는 조건을 내건 것 부터가 이상하다. 병사는 그걸 깨닫고 떠난거다. 이게 아니라면 둘째, 공주의 사랑은 진실했다. 다만 주변을 설득할 명분이 필요했기에 병사에게 어려운 통과의례를 요청한 것 뿐이다. 그래, 주변. 병사는 그 ‘주변’을 결코 극복할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은 거다. 통과의례를 다 채우고 내쳐지는 것 보다는 스스로 떠나며 자존을 지키기를 선택한 거다.


 그럼 나는? 예상되는 실패 앞에서 자존을 선택하는 걸까? 아니면 애초에 성립하기 힘들었던 모종의 계약관계를 깨고 나가고 싶은 것일까. 글쎄, 자기 연민이었는지도 모른다. 10년 세월이라는 판돈을 깔았지만 거두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불안. 감정을 쏟아부었지만 이루지 못한 짝사랑같은.


 다시 토토의 경우. 엘레나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연인은 사랑을 이어가려 노력하지만, 어느 날의 약속은 엇갈리고 둘은 기약없이 헤어진다. 토토는 완벽하게 실패한다. 심지어 연인의 진실성마저도 의심한다. 그런 토토를 보며 알프레도는 이렇게 말한다. 바닷바람이 느껴지는 부둣가에서.

인연은 운명이 정하는 거야.

각자의 길이 따로 있는 법이지.

앞으로 어쩔 셈이니?


이제 병사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하루만 더 기다리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겠지만

공주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거에요.

애당초 말이 안 됐어요.

못 오를 나무를 바라봤죠.

허나 병사는 99일 동안

환상을 갖고 행복하게 견딜 수 있었어요.


너도 병사처럼 하는 거야.

떠나라.

그러다 귀향을 하면... 친구들과 정든 땅을 느낄 수 있어.


 토토는 떠난다.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성공한다. 그리고 먼 후일 알프레도의 죽음을 맞아 귀향한 토토에게는 유년에의 그리움과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있다. 바보 토토. 엘레나를 원망할 일이 아니잖아.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원망과 보상심리를 동력으로 삼았기에 토토는 결국 다른 사랑을 찾지 못했던 걸거다. 사실 그 원망은 애당초 성립되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엘레나의 변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토토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알프레도의 개입 때문이었는데.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나는 왜 이 사랑 이야기에 되도 않게 직장을 대입해서 감정이입을 하려고 하는 걸까. 그냥, 더 나은 조건으로 예상되는 곳으로 몸을 옮기는, 그런 단순하고 건조한 일이 이직의 요체 아니야? 도대체 왜 이렇게 끈적끈적한 비유를 찾아낸 거야?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이야기가 생각난 건 ‘99일’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걸. 내 감정이 일종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직장이 공주님이라니, 애당초 이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그런데 굳이 이런 비유를 왜.

 

‘입사’라는 관문은 운칠기삼으로 표현되는 우연의 결과지만, 그렇게 해서 맺어진 인연은 깊다. 내가 그렇게 머물게 된 곳은 지상파 공영방송이었다. 공영방송의 이상은 높다.


 자본과 권력으로 부터 독립된,

공정하고 심도 있는 보도와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용광로.

대한민국의 주요한 의제들이 설정되고 공유되는 공간.

언론인과 예술가들의 터전.


 과대망상이라 보이는가. 그런데 진짜로 믿었다. 믿고자 했다. 수신료를 취하기에 자본으로부터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시청자에 대한 서비스를 존재 목적으로 할 수 있다. 광고를 취하기에 채널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권력의 요구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실험정신이 꽃필 수 있는 터전이 있다면, 낮은 데로 임하는 정의로운 보도가 가능하다면, 그건 이 곳일 것이라고.


 어렵더라도, 최소한 이런 모토는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Avant-garde, KBS! 흡족했다. 모토 좋아. 전위로서의 공영방송, 그리고 드라마 장르. 내 생김과 취향에 썩 맞았다. 실제로 마주하게 된 현실은 훨씬 구체적이고 뻘밭에 발 딛고 있는 어떤 것이었지만, 난 이 터전에 들어오게 된 것이 좋았다. TV와 라디오, 뉴스와 예능, 다큐와 드라마. 편성의 띠에 따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창의와 노력의 결과물들. 이곳이야 말로 꿈의 공장이었다. 일이 좋았고, 선배들의 성취가 근사했고 부러웠다. 언젠가 그들처럼, 이곳에서, 나도.


 그 후로 10년간, 공영방송은 가파른 몰락의 길을 걷는다. 달리 뭐라 표현해야 할까.


 당황했다. 어떤 태도로 이 몰락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내 자리에서 할 일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내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아마 몰락의 과정이 아니었다면 미처 볼 기회가 없었던 모습들이었을 것이다. 이타심과 이기심, 헌신과 배신, 명예와 수치, 배려와 독단, 의지와 나약함, 그리고 드넓은 회색지대. 이 곳은 일터 이상이었다. 세상의 은유이자 축소판이었다. 직업인으로서의 경험을 넘어선 경험을 준 곳. 그래서 더욱 애틋했다. 그것이 나의 99일이었다.


 병사에게는 병사의 이유가 있고 토토에게는 토토의 이유가 있다. 내게는 나의 이유가 있다. 병사는 이제 성채의 일원이 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토토는 실연을 동력으로 꿈에 매진했다. 나의 99일은 어찌됐든 소중하고 돌이켜 보니 행복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각자의 길은 늘 다른 방식으로 각자 앞에 나타나는 법이다. 남은 이에게도 떠난 이에게도.


 알프레도는 기차 역에서 토토를 떠나 보내기 직전 손을 꽉 잡고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떠나.

무슨 일을 하건, 자신의 일을 사랑하렴.


네 알프레도. 그럴게요. 그리고 나도, 나의 인사를 전합니다.


안녕 나의 공영 방송,


안녕 나의 꿈의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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