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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아저씨 Apr 11. 2020

아르바이트!!

    

70년대 말 80년대 초, 대학 다니는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과외에 관한 화려한 무용담.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어떤 선배는 과외를 해서 개인 용돈과 학비 해결은 물론 시골 부모님께 용돈도 부쳐드린다고 했고, 

또 다른 선배는 매일 술에 절어 살아도 과외 몇 개 더 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등, 

고등학생 신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던 꿈같은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물론 어느 정도 허세와 과장이 섞인 이야기였겠지만 그 무렵 대학생 개인과외가 워낙 판을 치던 시기였고 언론에서는 연일 “과외 망국론”이 회자되던 시기였으니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했다.


“아!!  나도 서울에 있는 명문대만 들어가면 학비 걱정, 용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에 문대 진학을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런데 웬걸 80년대 초 전두환 장군이 정권을 잡은 후 대학 본고사를 폐지하고, 후속 조치로 고교 재학생 과외 및 일반 학원 수강을 금지하였다.


1982년도에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가까스로 입학했지만 목숨 걸고 하는 비밀 입주과외가 아니면 학생 개인과외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선배들의 화려한 과외 무용담이 "일장춘몽"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어차피  성격상 - 사실 공부하는 것도 싫어하지만,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더욱 성격에 맞지 않았음 - 개인과외는 적성에 맞지 않기도 해서 그 대신에 매 학기 방학 때마다 육체노동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하게 된 것이,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음식점 배달 아르바이트,

겨울방학 때 안동 시군민의 밥상을 책임지는 두부공장에서 두부 제조 및 판매,

그리고 2학년 겨울방학 때는 과외 단속이 다소 느슨해진 틈을 타 형님 친구분 아들의 과외,

그렇지만 공부를 가르쳤다기보다는 인생수업을 했다고나 할까!!


그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과외를 했던 그 제자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무난히 입학을 했다.


마지막으로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아르바이트생으로서는 최고의 보수와 대우를 받고 한 현대자동차 설문조사요원.


현대자동차에서 전국 각 대학 재학생 200명을 선발하여, 자동차 홍보 및 시장조사를 하는 일이었는데, 당시로서는 2개월에 100만 정도를 지급하는 파격적인 아르바이트였다.


학과 동기인 친구 아버님의 도움으로 운 좋게 자리를 얻어서 대구에서 약 2개월 동안 근무를 했었고, 그때의 인연이 나중에  현대그룹에 입사한 동기가 되지 않았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몸으로 직접 부대끼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하는 일이다 보니 여러 가지 사건들도 많았었다.


식당 배달일을 할 때는 차마 말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도 많았고, 사람 사이의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나름대로 느낀 점도 있었다.


오일장이 벌어지는 시장판에 음식 배달을 할 때는 외상 손님으로부터 가끔씩 음식값을 받지 못해 돈을 대납한 경우도 있었고, 

오랫동안 교류가 뜸했던 친구들 집에 우연히 배달을 가면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여학생 동기들도 있었다.(한때는 공부도 잘하고 잘 나가던 친구였는데 왜 저렇게 되었을까 라는 느낌!!)


방학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래도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에피소드 #1.


음식점에서 배달을 할 때 거스름돈을 준비해 가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음식값을 오백 원 올려 받았던 적이 한 번 있었다.


대부분 여관 손님들은 일회성이므로 음식값을 알 수도 없고 오백 원정도 더 받은 것은 큰 흠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별다른 생각 없이 잔돈을 거슬러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다음 날 같은 여관 동일 호실에서 배달요청 전화가 와서 배달을 가보니 어제 그 손님이 똑같은 음식(돼지고기 찌게)을 주문한 것이었다.


내심 많이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이 또 음식값을 올려 받을 수밖에 없었고, 돌아오면서 "내일 또 시키면 어떻게 하지?"걱정하면서 식당으로 돌아왔다.


그다음 날도 어김없이 비슷한 시간에 전화가 왔고, 4일 연속 그 손님으로부터 배달요청 전화가 왔다.


이제는 식당에서 전화소리만 들려도 경기가 날 지경이었다.


더 이상의 스트레스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퇴근 후 집에서 손님에게 드릴 편지를 썼다.


부득이하게 음식값을 더 받게 된 그간의 사정을 소상히 적고, 이번에 배달하는 음식은 서비스로 그냥 드리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그다음 날도 여관에서 배달전화가 왔고, 음식상(비싼 소고기 찌게로 준비)을 차린 후 쪽지와 같이 손님의 방에 넣어 드리고 방문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3분쯤 지난 후 손님이 방문을 열고, 잠시 들어오라고 했고 미안한 마음으로 방문턱에서 손님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은 충분히 이해한다며, 오늘 음식값을 지불하려고 했다.


나는 "이러면 제가 진짜 죄인이 된다"면서 한사코 만류를 했고,

다행히 나의 뜻을 받아주신 손님 덕분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식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전화 벨소리에  마음을 졸이지 않았지만, 그닐 이후 그 손님으로부터 주문전화가 오지 않았다.


"에이씨, 하루만 더 참아 볼걸"하는 생각도 들기도 했지만 돈보다는 마음이 편한 게 제일이었다.


참, 그 손님방은 가끔씩은 커플이었다.




에피소드 #2.


두부공장에 다닐 때의 기억들.


두부공장에 다닐 때의 하루 일과는,

새벽 4시경에 기상해서,

어제 만들어두었던 두부를 물에서 건진 후,

 배달트럭에 싣고,

오전 5시경 시내 두부가게에 배달을 시작한다.



아침 7시경 시내 전역에 배달을 마치고, 

공장에 돌아와 식사를 한 후, 

잠시 쉬고 8시부터 점심때까지 내일 팔 두부를 만들어서 저수조에 담가 둔다.

     

점심 식사 후에는 콩비지를 소 축사에 먹이로 갔다 준 후, 

두부 200판 정도를 소형 트럭에 싣고, 

시골 마을로 직판을 하러 가곤 했다.


그 당시 판매를 나간 시골 마을에서는 돈으로 두부를 사는 사람도 가끔은 있었지만 대부분은 곡식과 물물교환 형태로 맞바꾸는 것이 일상이었다.


쌀이나 보리 조 콩 등의 가격을 미곡상에 가서 미리 알아본 다음,

곡물을 현 시세보다 조금 낮은 가격으로 쳐서 두부를 판매했다.




두부를 팔아서 1차 수익을 얻고, 싸게 산 곡물을 미곡상에 넘기면서 덤으로 수익을 얻는 구조였다.


두부를 팔기 위해 시골마을로 들어갈 때는 트럭에 설치된 외부 확성기로 음악에 맞춰 노래도 하고,

 “두부가 왔습니다....  두부”를 목청이 터져라 외치며 두부장수 트럭의 등장을 알렸다. 


거의 한 달 동안 판매를 다니며 불러보지 않은 노래가 없을 정도로 가요를 불렀던 기억도 나고, 수입이 좋았던 날은 판매를 나간 트럭기사 아저씨로부터 담배 한 갑과 특별 보너스를 받으며 즐거워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다 가끔씩은 남의 판매구역에 잘못 들어가서 우격다짐과 실랑이가 벌어졌던 일들도 있었다.

(시골마을도 각자 지역의 두부공장들이 판매를 다니는 구역이 나름대로 정해져 있었다.)


휴일도 없이 매일 새벽 4시부터 저녁 7사까지의 고된 일과였지만 공장에 근무하는 직원들과 몸으로 부대끼며 숙식을 같이하며 지냈던 시간들이 나에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현대자동차 아르바이트 근무 시에도 두 달 동안 조사요원으로서 다양한 직업의 많은 사람들을 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있었고, 한여름 무더위로 대로변에서 쓰러져 의식을 잃어버릴 뻔한 적도 있었지만 이런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요즈음은 알바몬이라든지 공식 아르바이트 소개 사이트가 있어서 쉽게 정보를 접하지만 과거에는 알음알음으로 주변 사람들의 소개를 받아 아르바이트를 했던 시기였고, 사실 정상적인 대우는 거의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이었기에 오히려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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