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질 때로 떨어진 자존감 회복의 방안
오랜 시간이 지나버려 놓쳐버린 관계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어색해져 버린 요즘. 마지막 연애의 순간들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다행히도 청승과 궁상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을 위해 과거의 연애를 되돌아보고 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본 지인들은 “무슨 연애를 그렇게 분석적으로 하려고 하냐.”, “누가 T 아니랄까 봐”라는 잔소리를 늘어놓곤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연애에 대한 나의 접근은 항상 조심스럽다.
그렇게 돌이켜본 나의 연애는 부족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건 아무래도 ‘불안감’이다. 달콤한 연애를 하면서도 늘상 쓰디쓴 ‘불안감’이 함께했다. 그 불안감은 번아웃으로 길바닥과 지하를 뚫고 들어가다시피 한 나의 자존감 때문이었다. 낮은 자존감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연애는 가뭄 속의 단비 마냥 달콤했지만, 가뭄으로 메말라 버린 틈을 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단비를 맞으면서도 “이 단비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를 걱정했다.
아주 칠칠치 못하게도 “OO이가 떠나버리면 어떡하지?”라는 쓸모없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의 전 여자친구는 연하였지만, 누구보다도 성숙하게 나를 이해해 주었고 기다려주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씩 변화해 나갔고, 지인들은 나의 여자친구에게 감사함을 표할 정도였다. 하지만, 갖은 노력에도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의 모습에 건강한 연애를 기대했던 여자친구는 마지막 한계점을 넘어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굴러 들어온 복을 스스로 ‘뻥’하고 차버린 셈이다. 물론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이별의 사유는 더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망할 ‘불안감’의 존재감이 상당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때의 나는 정말 답이 없었다.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자.”
이별을 한지도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를 괴롭혔던 자존감도 꽤 원상 복구되었다고 느끼는 이제서야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떠올렸어야 했던 답은 한 가지였다.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자.” 서로가 좋아서 시작했던 연애였던 만큼 내가 OO을 사랑한 만큼 나를 사랑하면 될 뿐이었다. 그리고 사랑이 깊어질수록 나 또한 나를 더 사랑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단순한 해답을 그때는 깨우치지 못했다.
물론, 이 답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정답이 명확한 단답형 보다는 길고 긴 서술형이기에 나는 이 답안으로 부분점수라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다음 인연을 맞이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