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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원 Jul 24. 2024

나는 깨끗하게 죽겠다고 했어

연명의료 결정제도

  토요일 오전, 거리두기 중이던 자격증 공부를 위해 집 근처 카페를 찾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공부를 시작한 지 30분 정도 만에 나의 손가락은 빨간 바탕 속 하얀 시작버튼을 눌러버렸고, 카페인과 도파민을 동시에 맛보는 극락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색적인 상황들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카페 입장과 동시에 노이즈 캔슬링을 뚫고 들어오는 할아버지 4분의 목소리. 주름이 짜글짜글하다는 게 이런 거구나라고 할 정도로 살아온 세월이 느껴지는 말 그대로 '노인(老人)'분들이었다. 키오스크 주문을 어려워하셨지만 이제는 익숙한 일인 듯 자연스레 직원분들께 요청하셨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가냘퍼진 두 팔로 음료를 테이블로 가져가실 때에는 혹시나 쏟진 않으실까 하는 마음에 카페의 모든 사람들이 조마조마한 순간을 경험했다.


  할아버지들의 목소리는 불과 10분 전의 카페와는 어울리지 않는 높은 데시벨이었기에 모두들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자칫 실례가 될까 하는 마음으로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한 할아버지께서 여러 명의 신경을 의식하셨는지 나이가 들어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양해를 구하셨고 그 이후부터는 모두들 자연스레 10분 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도 큰 소리 탓에 할아버지들의 대화를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 없었는데 또 듣다 보니 내용들이 재밌었다. 


  A 할아버지는 아들의 아들이 아기를 데리고 와서 집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B 할아버지는 이제 나이가 있으니 치매검진을 꼭 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셨다. C 할아버지는 시청역 사고를 언급하시며 자기는 이미 면허증을 반납하셨다고 말씀하셨고, D 할아버지는 C 할아버지의 면허증 얘기에 자신이 신진자동차학원 대형면허 1기 수료생이라며 자랑하셨다. 이 와중에 나는 C 할아버지께서 그다음으로 내뱉으신 한 문장을 듣고선 왠지 모를 긴장감을 느껴버렸다.


나는 일찌감치 건보공단에 가서
깨끗하게 죽겠다고 했어

  C 할아버지의 말씀은 연명의료 중단에 관한 이야기였다. 병원도 아닌 카페에서 연명의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줄이야. 귀를 의심했다. 따지고 보면 하지 못할 말은 아니지만, 어색한 건 사실이다. C 할아버지는 각자 다른 말을 하시는 친구들에게 자랑하시고 싶으셨던지 지갑 속에서 카드를 한 장 꺼내셨다. 직접보지는 못했지만 대화의 흐름상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이었던 것 같다. 먼가 신기한 게 눈앞에 보이고 나니 그제야 다른 할아버지들도 궁금해하셨고 C 할아버지는 말을 이어 나갔다.


주렁주렁 달고 병원에 누워 있느니,
이게 낫지 애들한테 피해 안 주고


  연명의료는 쉽게 말해 치료의 효과가 없는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의 의학적 시술을 통해 임종과정의 기간을 연장하는 것을 말한다. 말 그대로 더 이상 치료가 무의미한 임종기에서 생명을 시간적으로나마 연장하기 위한 의료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이러한 임종기의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연명의료를 중단할지 여부를 미리 지정된 기관을 통해 등록하고 나중에 이 내용을 의료기관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해놓은 제도이다. 


  공공기관에 근무 중인 나조차도 연명의료가 정부 차원에서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현재는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인 '국가생명윤리정책원'이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연명의료는 내가 대학에서 법을 배울 때 '보라매병원 사건'과 '김할머니 사건'을 바탕으로 찬반 논란이 뜨거웠던 주제였는데, 결국엔 사회적 합의를 거쳐 「호스피스ㆍ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2018년 2월부터 시행되었던 것이다. 올해 5월 기준으로 237만 명이 동참했다고 하니 웬만한 흥행영화 관람객수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제법 정착된 제도라고 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연명의료결정제도는 만 19세 이상의 사람이면 신청할 수 있지만, 생명과 연관되어 있기에 엄격하고 엄중한 절차를 요구한다. 2022년 UN이 발표한 전자정부지수 3위의 대한민국이지만, 이 절차는 오로지  보건복지부의 지정을 받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에서 오프라인으로만 이루어진다. 즉, 담당 직원과 대면한 상태로 상세한 설명을 들은 뒤에 연명의료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인 스스로 작성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의사표시는 나중에 언제든지 철회할 수 있다.


나라면 어떡할까?


  나는 이전의 글에서 사후에 장기기증을 희망했음을 밝힌 바 있다. 장기기증은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라 결정을 하는데 크게 망설이지 않았지만,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것은 오롯이 나를 위한 결정이기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C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자손들한테 피해를 안 주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도 스스로 오랫동안 고민을 하여야 하고 필요하다면 가족과도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생각해 보면 C 할아버지의 의중처럼 가족이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그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내가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연명의료 중단은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비슷하게는, 이 제도의 시행으로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하는 것 자체가 폭력성을 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답은 없다.
본인의 결정이니까.


  자신의 삶에 있어서 마지막 선택일 수도 있는 연명의료 중단 결정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하면서도 오랜 생각을 거친 의사표시임이 분명하다. 당연하게도 단순히 내린 결정은 아닐 것이기에, 나는 그 의사표시를 그저 존중하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도 미래에 이러한 의사표시를 한다면, 나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으면 좋겠다.


  죽음을 대신할 수 없듯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결정하는 것도 남이 대신할 수 없다. 옛말처럼 결국에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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