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이 흘러도 기회는 온다.
매년 10월이면 어김없이 마주하게 되는 국정감사를 준비하던 어느 날. 야근이 당첨되어 버린 오후의 시간에 사무실 밖의 상쾌한 공기도 쐴 겸 문구점으로 향했다. 며칠사이였지만, 자주 가던 문구점은 갑작스레 냉면집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기존의 문구점은 옆건물의 지하에서 어색하게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 도착한 문구점에는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여러 종류들의 제품들이 매장 이곳저곳에서 정리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구매하려던 물품들을 찾아 숨바꼭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술래를 찾던 중에 지금껏 창고에만 있었는지 먼지로 새 옷을 입은 제품들을 보게 되었다.
어? 만년필 잉크가 있었네?..
사법시험을 공부할 때부터 수험생 만년필로 유명한 '펠리칸 M200(또는 M205)'을 애용했던 탓에 사회초년생이 되고 나서도 만년필의 매력에 자연스레 빠져들었고, 어느 순간부터 서류가방이나 재킷에 늘상 한 자루 이상의 만년필과 동행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제법 고가의 만년필을 보호하기 위한 펜 파우치에도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아직까지는 마음에 드는 제품을 찾지 못했었다.
진열대에는 언제 생산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병잉크와 카트리지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사이로 애용하는 만년필 브랜드인 펠리칸의 로고가 살짝 보이기에 순전한 호기심으로 집어 들었다.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쳤는지 종이상자는 군데군데 닳아 있었고, 나는 이 모습에 딱 봐도 '레어템'일 것 같다는 생각에 곧바로 결제를 마쳤다. 2017년 10월에 정도에 인터넷에서 판매되었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펜 파우치도 얼추 7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찢어질 것 같던 종이상자에서 긴 시간을 보냈던 펜 파우치를 꺼내 보았다. 먼지 가득했던 겉모습과는 다르게 가죽에서 윤기가 나는 펜 파우치였고 나의 마음에 꼭 들었다. 종이상자에 묻은 먼지는 닦아내면 그만이었고, 중요한 건 상자 속의 진짜 펜 파우치였다.
펜 파우치에 넣고 다닐 만년필을 생각하다 수험생활을 함께했던 만년필을 오랜만에 꺼내었다. 외관은 오랜 사용으로 미세한 흠집들로 가득했지만, 만년필의 본질은 ‘글을 쓰는 도구’였기에 크게 중요치 않았다. 몇 년 만에 잉크를 주입하고 손에 쥐어보니 긴 시간 함께하며 나의 필기습관에 맞도록 커스터마이징 된 만년필은 마치 체득한 경험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듯 펜촉에서 잉크를 자연스레 뿜어내며 본래의 역할을 어김없이 다해 주었다.
오랜만의 만남을 뒤로하고 펜 파우치에 펜을 넣어보았다. 창고에서 긴 시간 빛을 보지 못했던 펜 파우치도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우연한 계기로 제 역할을 다하는 날을 맞이했다. 이렇게 오래된 만년필과 펜파우치의 조합이 주는 의미는 단순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기회는 온다.
나름 열심히 했었지만, 지식재산권을 실무로서 접근해 보고 싶다는 생각과 사법시험의 폐지로 결국엔 합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래도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 이어온 탓에 공공기관에 입사할 수 있었고, 펜촉이 닳을 만큼 공부한 탓에 공공기관에서 법무담당자로서의 나쁘지 않은 생활을 해오고 있다.
시험을 준비하거나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오랜 시간 동안 준비했음에도 합격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거나 준비한 프로젝트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보고는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거나 묵묵히 새길을 걷는다. 그러다 보면 내가 공부하고 또 준비했던 내용들이 축적되어 이따금씩 새로운 일에 발돋움 판이되기도 한다.
곧장 쓰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책하지 말자,
결국엔 먼지를 털어내고 쓰여질 날이 찾아온다.
P.S.
사장님께 펜파우치의 가격을 물었을 때, 사장님은 펜파우치가 있었는지도 기억을 못 하시는 듯 한참을 생각하시다 “비싼 건데 그냥 5만 원만 줘요”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사장님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결제를 마쳤다. 사무실에서 확인했을 땐 12만 원에 판매했던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 “땡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