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으로부터의 도피

대표가 되고 나서 맞은 첫 휴가의 기억

by joni


중학교 때, 영어 교과서에서 보았던 피라미드를 기억한다.

영어로 된 지문의 내용은 모두 잊어버렸지만 아래쪽에 유치한 그림체로 그려져 있던 피라미드와 파라오의 일러스트는 왠지 모르게 내 머릿속에 영원히 각인되고 말았다. 피라미드, 언젠가 꼭 한번 가봐야지. 같은 페이지를 들여다보고 있던 짝꿍의 교과서 속 피라미드 그림을 샤프로 콕 찍으며 그렇게 말하던 그때의 나는 그게 일종의 '꿈'이라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는 다짜고짜 카이로 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버렸다. 연말이었고, 일적으로는 아직 프로젝트가 한참 진행 중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출국 날짜 전까지 어떻게든 일을 마무리짓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정신이 무너져 내리자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처럼(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고객사에 먼저 '이 날짜 이후로는 프로젝트 진행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맡은 바는 그전까지 끝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반쯤 통보를 했고, 고객사는 언제나 그렇듯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하고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내가 섣불리 정해 버린 일정 안에 모든 일을 끝내기 위해서는 당분간 지독하게 일해야 하겠지만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그깟 프로젝트, 그깟 정산,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남은 일을 조금씩 처리해 나가는 동안 내가 일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예전처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고객사에 제안을 하거나 의견을 묻지 않게 됐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려고 했고, 결과물에 대한 피드백이 오락가락하거나 의문스러워도 알겠다고만 했다. 다시 지난 버전으로 되돌려주세요, 여기서 이걸 이렇게 바꿔주세요, 아니, 다시 전 버전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도 갑갑해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여행을 앞둔 설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과 관련해서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풀리지 않는 의문들과 그로부터 비롯된 두려움을 마침내 털어냈을 뿐이다. '나는 왜 자꾸만 실수를 할까?', '나는 사업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닌 걸까?'와 같은 자기 의심에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상태임을 마침내 인정한 것이다. 내가 이런 막연한 질문에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피라미드가 필요했다.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 나와는 달리 위대했던 일꾼들의(노예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이야기다) 수십 년에 걸친 강렬한 노동. 그걸 직접 목격하기 전까지는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 어떤 의혹들에도 나는 대답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그 엄청난 인간의 노력의 산물을 직접 목격하고 싶었다. 고대의 이집트인들은 어떻게 수십 년에 걸친 장대한 노동을 지속할 수 있었는지, 반대로 나는 왜 고작 몇 년간의 개인적인 차원의 노동조차 버텨내지 못하는지가 궁금했다.


결국 나는 출국 전날까지도 일을 했다. 저녁쯤 어떻게든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헐레벌떡 오래된 배낭을 꺼내 짐을 꾸렸다. 거리는 연말을 맞아 홀리데이 장식과 패딩, 목도리들이 한창이었는데 나 혼자만 정 반대로 여름 반팔과 얇은 셔츠 따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을 바라보는 내 감상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돈을 벌기 위해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혼자만 거꾸로 걷고 있는 듯한 기분. 내 40리터짜리 배낭엔 간단한 세면도구와 여름옷, 슬리퍼, 모기약 같은, 당장 돈 버는 데에는 하나도 쓸데없어 보이는 물건들만 가득 들어차 있다. 내게는 이 여행에 대한 명분이 충분할까? '일하다가 지쳐서',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려서', 이런 것들은 흔히 말하는 '나약한 MZ세대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우리 업계에서는 대목이라고 불리는 이 황금 같은 연말에 휴가 비슷한 걸 떠난다니, 그것도 직장인도 아니고 작은 회사 대표라는 인간이 이런 짓을 벌였다고 하면 다들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려나? 그간 나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려온 유독한 질문들을 이제 겨우 회피했는데, 나는 결국 똑같은 작용을 하는 다른 질문들을 줄줄이 떠올리고야 말았다. 또다시 나 자신이 구제불능의 인간처럼 느껴져 절망감이 엄습했다. 나는 여태까지 나를 지탱해 온 것이 일에 대한 열정과 신념인 줄 알았는데, 혹시 그게 '겁'이라는 감정을 숨기기 위한 나의 변명이었을까? 나는 사실 돈과 빚이 두려워서 그토록 열심히 일해 왔던 건 아닐까. 이집트의 일꾼들은 파라오(신)에 대한 신앙심이라도 있었지, 나는 돈을 그렇게까지 숭배하지도 못하는 채로 사실은 그저 호랑이 앞에 선 쥐처럼 두려워했던 것뿐인 게 아닐는지.


어쨌거나 기나긴 비행 끝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밟아봤다. 나는 19살 무렵부터 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세계의 제법 많은 도시들을 매년 여행해 왔음에도 카이로의 풍경이 독특하다고 느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마치 모래로 빚은 듯이 밝은 베이지색으로 삐뚤빼뚤했고, 사막이 최대 관광 상품 중 하나인 만큼 공기가 무척 건조하면서도 따뜻했다. 한겨울을 건너뛰어 곧장 봄으로 날아온 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카이로 도심으로 향했다. 택시 기사는 외국인 손님을 구워삶아 돈을 뜯어내는 요령이 탁월했다. 어지러운 도로를 요리조리 운전하면서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유명한 관광지들을 하나씩 손으로 짚어가며 내게 꼬박꼬박 이름을 불러주었다. 택시가 구불구불한 약간의 오르막 도로를 힘겹게 통과하는가 싶더니 이내 가장 높은 지점에 도착해 마침내 길이 쭉 뻗은 내리막으로 바뀌었을 때, 택시 기사가 정면을 손가락질하며 씩 웃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그 이름을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택시가 약간의 내리막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동안 도로 끝에 어마무시한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는 거대한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는 반대로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택시 기사는 도로 주변으로 즐비한 여러 노점들 중 한 곳에다 말도 없이 차를 세우더니 상인에게서 시원한 음료수 같은 것을 사 와서 내 손에 덥석 쥐어주었다. 때문에 나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택시에서 내릴 때 어쩔 수 없이 기사에게 두둑한 팁을 주었다. 나는 그것이 이 사람이 여기서 돈을 버는 방식이며, 내가 한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썼던 방식과는 다르게 아주 아주 효과가 좋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카이로에 머무는 내내 숙소의 테라스에서 하염없이 피라미드를 구경하곤 했다. 매일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피라미드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컸고, 멀리서 봐도 끝없이 쌓아 올려진 네모 각진 돌덩이들을 하나하나 셀 수 있을 만큼 생생했다. 피라미드가 세워진 사막은 도시 앞에 마치 인간이 포크레인이나 나침반 따위를 들고는 침범할 수 없는 그 시절의 불가사의한 경계선처럼 막막하게 펼쳐져 있다. 나는 그 경계의 밖에서도, 안에서도 그 누런 돌덩이들을 바라보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오도 가도 못한 채 일과 사업, 빚 따위의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인류는 위대했다. 피라미드의 제작 방식에 대해서는 별의별 토론을 벌일 수 있을지 몰라도, 이걸 끝끝내 완성해 낸 인류란 참으로 위대하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서는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증거가 바로 여기 있다. 고대의 이집트인들은 수십 년에 걸친 헌신과 흔들리지 않는 (종교적) 신념을 통해 당시로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냈다. 고대인들은 (현대의 과학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사실상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 거대한 돌무덤을 만들고자 갖은 지식을 모으고 안간힘을 썼다. 불가능해 보이던 미션을 마침내 완수함으로써 머릿속의 그림을 현실로 이끌어내는 이 고통스러운 일련의 과정을, 시간과 믿음과 노동만으로 견뎌냈다. 피라미드는 불가사의가 아니었다. 가장 단순하고도 기본적인 인간 본연의 작동 방식 때문에 지금,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은 그 어떤 막연한 과제에도 용기와 지성을 짜내어 겁 없이 도전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깨달음은, 나 또한 바로 그러한 인간 중 하나라는 점이다...


인류가 위대하다면 인간도 위대하다. 내가 중학교 영어 시간에 참지 못하고 짝꿍에게 내뱉었던 한마디 말은 즉시 형체 없이 공중으로 흩어져버렸지만, 내 머릿속에서만큼은 끝끝내 살아남아 지금의 나를 피라미드 앞에 서게 만들었다. 마침내 그날의 내가 나도 모르게 가졌던 (소박한?)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당시의 나는 피라미드를 보러 가는 일이 우주 로켓을 타고 태양계의 다른 행성으로 날아가는 것만큼 대단한 일인 마냥 느꼈으면서도, '언젠가 피라미드를 보러 갈 거야'라는 말을 사람들 앞에서 서슴없이 뱉을 만큼 겁이 없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몇 년째 '휴가'라는 말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을 만큼 겁이 많아져버렸다. 프리랜서 때와 마찬가지로 쉬었다간 일거리를 놓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주말을 비롯해 명절과 연말, 연초를 가리지 않고 모든 문의에 'YES'만 외쳐댔던 것이다. 아직 사업 초창기니까, 빚이 있으니까, 쉬면 돈을 못 버니까, 부모님은 내년 설에 뵈면 되니까 등등 내가 쉼 없이 일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나는 '나의 일'이라는 게 이런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내가 일하는 만큼 벌고,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잃는다. 내가 원하는 만큼 할 수 있고, 내가 애쓰고 노력하는 만큼 제대로 해낼 수 있다. 문장 자체는 단순하지만 문제는 내가 한계를 모른다는 점이다. 내가 대체 얼마만큼 일하기를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돈을 왕창 벌어야지'라고 말할 줄만 알았지, 그 빌어먹을 '왕창'이 얼마만큼인지는 정해두지 않았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람보르기니를 살 때까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이렇게나 막연하고 멍청하게 사업을 굴리는 나는 끝없이 일만 하다 죽는 노예다. 그럴 거였으면 최소한 나는 돈을 종교로 받아들이기라도 했어야 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러했듯이, 내 무덤이 될 대피라미드를 쌓는 수십 년 간의 노동을 시작하려면 내게도 돈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외와 철옹성 같은 신앙심이 있었어야 했던 것이다. 돈을 죽도록 사랑하고, 돈을 죽어도 포기하지 않을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당장 사업을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기보다는 두려워하고, 대출금 잔액을 확인할 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힘을 내기보다는 그저 껄끄러운 기분이 되어 불편해지는 나는, '대표님'이 아니라 '노예'인 것이 맞았다.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 수록된 못생긴 일러스트만 보고도 꿈을 키우는 법을 알았던 나는 이제 소인배가 되어 있다. 삶의 행복과 몇천만 원의 빚, 내 사업의 성공과 값비싼 음식점, 내가 사고 싶은 외제차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즐거운 한때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잘못 만들어진 비빔밥처럼 시뻘겋게 버무려진 채 한 그릇에 몽땅 담겨 있다. 어른이 된 나는 이 그릇에서 먹기 싫은 것들만 쏙쏙 골라낼 수는 없다. 편식은 나쁜 거라고 배웠으므로. 너무 오랫동안 이게 맛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른 채로 마구 퍼먹어 온 나는 이제 위대하고도 단순한 피라미드 앞에서 우웩, 죄다 토해내고 있다. 어쩌면 내가 삼킬 수 없는 것들이 들어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업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모자란 인간일 리는 없다. 나는 학창 시절에 품었던 작은 소망을 현실로 끌어내는 색다른 방법을 깨달았다. 나는 이제 비빔밥을 다시 만들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내 몸에 잘 맞고, 생존에 꼭 필요한 재료들도 꼭 포함시켜서, 내가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담아서 다시 준비해보고 싶다. 과연 내게 아직 그럴 시간이 남아있을까? 이 세상이 나를 기다려줄까?


나는 이집트에서 약 한 달간의 긴 휴가를 누렸다. 어렸을 때부터 세상을 돌아보길 좋아했던 나는 일 때문에 잊고 있었던 여행의 즐거움을 되찾고자 침대가 딸린 기차를 탔고 나일 강에서 며칠간 크루즈 여행을 했으며 홍해 바다에서 스노클링을 했다. 이 시간들도 모든 여행이 그렇듯 세상엔 정말이지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음을, 내가 여태껏 고수해 온 나의 방식만이 꼭 정답인 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어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아부 심벨의 거대한 석상, 투탕 카멘의 무덤 그리고 도시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 잡은 피라미드가, 내가 돈을 좇느라 상실했던 나의 인간적인 어떤 부분을 되돌려주었다. 마침내 나는 돈을 버는 것만이 내 삶의 목적일 리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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