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두려워하지 않은 죄

두려움을 잊은 자는 생존이 위태롭다

by joni


지금 적어 내려 가는 나의 모든 이야기가 그저 소설이라면 좋았을 텐데. 이런저런 갈등과 사건사고를 참고 견디기만 하면 언젠가는 기어코 마지막 장에 도달하도록 되어 있는. 지금은 알지 못하는 멋진 결말부에 이르기만 하면 어떻게든 이 모든 고통과 슬픔이 끝나고 새 시대가 열릴 거라는 확신이 있는. 이 모든 것이 그저 독자들에게 교훈이나 깨달음, 멋진 감상 따위를 주고자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임을 안다면 주인공인 나도,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이 곤란한 상황을 훨씬 더 참고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느꼈을 텐데.


돌발적이고 충동적이었던 이집트에서의 긴 휴가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 나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 거라 착각을 했다. 그 희망적인 착각은 너무나도 크고 깊어서 내가 휴가 전 마지막으로 일할 때 던져두었던 물병이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한치의 변화도 없이 고대로 놓여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지독할 정도로 똑같은 사무실을 둘러보며, 나는 오만하게도 여기 서 있는 나 자신만은 한 달 전과 비교해서 많이 달라졌을 거라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등받이가 삐걱대는 내 의자에 새로 태어난(줄로 착각했던) 내 등짝을 붙이자마자, 나의 기분이 전에 느꼈던 것과 똑같은 바로 그 막막함과 두려움 속으로 다시금 빠져들기 시작하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나 나약한 마음을 타고난 것일까. 새로 떠올린 나의 삶에 대한 아이디어들과 단단히 고쳐먹은 마음 따위는 서울로 돌아온 지 채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허울뿐인 웅변가의 공허한 외침처럼 공중으로 죄다 흩어져버렸다...


그래도 분명 달라진 점이 있긴 했다. 정말 그래서는 안 됐지만, 나는 이제 진심으로 돈을 벌기가 싫어져버렸다. 더 이상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미팅을 다니며 열정적으로 우리 회사에 대해 소개하는 짓을 관두고 싶었다. 이제 내 사업은 더 이상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게 되어버렸고, 나는 죽도록 일만 하고 돈만 벌던 과거의 삶을 더 이상 삶이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산다는 게 대체 뭘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이런 종류의 변화, 이런 종류의 질문들은 이 세상 그 어떤 인간도 피할 수 없는, 한밤중의 날벼락처럼 갑작스레 처맞을 수밖에 없는 끔찍한 재앙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견뎌내느냐가 한 인간의 남은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태막을 찢고 나와 생애 처음으로 폐를 통해서 산소를 들이마시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그저 엥-하고 울면서 참아냈듯이, 이 두 번째 시련 또한 엉엉 울면서도 어떻게든 참아내야 하며 또 그에 앞서 나를 감싸고 있는 이 멀쩡한 삶을 갈가리 찢어내어 또 한 번 태어나야만 한다. 삶이 어째서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인지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지만, 결국 이것이 지금 내게 주어진 현실이었으므로, 나는 이제 피할 데가 없는 심정으로 이 벼락을 온몸으로 맞아내는 수밖엔 없다.


그때도 지금처럼, 새해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좋든 싫든 한 살씩 더 먹었고 떠오르는 새해의 태양을 찡그린 눈으로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기 위해 기를 썼다. 그러나 삶에 대한 재앙적인 질문들을 갑작스레 시작해 버린 나는 한 살 더 먹기를 거부하며 삶을 잠깐 멈추고자 했다. 태양 아래에서는 애써 눈을 감은 채로 잠을 청하면서 달이 간접적으로 반사하는 햇빛만 쬐려고 했고, 나와는 수십억 광년쯤 떨어져 있는 아득한 별의 빛만을 내 것으로 삼고 싶었다. 서른세 번의 종소리가 아직 공중에 메아리치듯 맴도는 1월 말, 헬스장에 새로 등록한 사람들, 영어 공부를 결심한 사람들, 자격증을 따서 이직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채 꺾이기도 전에, 우리 회사는 처음으로 적자를 냈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1월보다 사흘 모자란 다음 달은 아마도 더 심한 적자가 발생할 것이다. 지난 수년간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해 온 나로서는 당분간 달리기를 멈추고 천천히 걸으며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지는 게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고, 내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간 벌어놓은 돈이 제법 됐으므로, 몇 달쯤 적자가 나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갑작스레 내게 던져진 벼락같은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몇 달간 사업 적자를 내기만 하면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아둔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조금씩 일이 줄어드는 상황을 체감하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들어오는 일을 마다하진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하려 애쓰지 않았고, 될 것 같던 일이 중간에 흐지부지되어도 내버려 두었다. 직원들의 월급과 사무실 월세는 이제 회사 운영 자금이 아닌 내 주머니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나는 내 통장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도 태연자약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이제 아무래도 겁대가리를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 돈과 빚이 두려워서 밤낮도 주말도 휴일도 없이 노예처럼 일만 하던 겁쟁이는 이제 죽고 없는 모양이다. 돈이 없어서 슬픈 것보다 내 삶이 돈 때문에 망가져버린 것에 대한 슬픔이 몇 배는 더 컸다. 그 슬픔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무기력함으로 변모했다. 나는 해야 할 일들을 내팽개쳤고 그 모든 것들이 무기력함 속으로 가라앉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의 이런 행태가 한 달, 두 달, 세 달 이어지는 동안 회사로 들어오던 일은 하나둘씩 서서히 끊어져갔다. 그럼에도 일이 없어 돈을 벌지 못하던 그날들이 오히려 즐거웠다고 말한다면 과연 누가 믿어줄까. 일을 통해서 열심히 자기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혹시 죄가 되는 것일까. 하지만 정말로 그랬다. 나는 한참 돈을 많이 벌던 지난 몇 년간의 나보다 이때의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하는 나 자신을 견디는 편이 훨씬 쉬웠다. 적어도 이때는, 내가 나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아도 되었으니까. 바쁘게 일하던 때에 항상 어깨에 메고 다니던 자책과 자기혐오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는지를, 그걸 벗어던지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나는 그렇게 어딘가 망가져버린 인간이 된 듯했다. 내 삶을 바꾸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걱정과 두려움을 이기는 해방감에 도취되어 문자 그대로 삶을 반쯤 놓아버렸다.


두려움을 상실한 인간이란 어떤가? 지구의 생명체에게 있어 두려움이란 말 그대로 생존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쥐와 토끼 같은 피식자들은 이 두려움 때문에 예민하게 발달된 청각과 후각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은 포식자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을 통해 위험을 피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쳤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멸종되지 않은 채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토끼의 큰 귀와 쥐의 재빠른 움직임이 얼핏 기괴하고 경박스럽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생존 앞에서 그런 감정 따위가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쥐와 토끼가 자신들의 이런 생존 방식들을 수치스럽게 여긴다면 생존은 진작에 물 건너간 일이다. 인간 또한 자신이 속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모습을 조금씩 기괴하고 경박스럽게 바꾸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돈 앞에서 좀 더 치사해지고, 냉정해지고, 못돼지는 것이 토끼의 긴 귀, 쥐의 현란한 몸놀림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진화의 증거이자 더 우월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가? 현대인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자신의 삶을 미리 설계하고 대비함으로써 생존을 보장받고자 노력하는 것뿐이다. 다 쓰고 죽지도 못할 만큼 재산을 불리기 위해 본인이 사용하지도 않을 부동산을 매입하고, 값이 많이 뛸 거라는 소문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는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 사회 속에서 찌질한 인간이 되기를 서슴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남들보다 한치라도 더 멀리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애쓸 뿐이다. 삶이 초래하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정면돌파하기 위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속에서 돈은, 황홀하면서도 두려운 것이다. 돈은, 끔찍하고 잔인하면서도 풍요롭고 자비로운 것이다. 우리는 돈이 끔찍하고 잔인하기 때문에 갖고 싶어 한다. 돈만큼 끔찍하고 잔인한 것은 없으므로, 이것만 가지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 따위 얼마든지 무찌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남들처럼 제대로 진화하지 못했다. 오히려 거꾸로 걷고 있다. 생존에 꼭 필요한 두려움을 상실해 버린 나 같은 인간은 어떻게 될까? 생존에 대한 절박한 두려움 때문에 돈 앞에서 좀 더 치사해지고 냉정해지고 못돼지는 내 마음을 수치스럽게만 느끼는 나는 과연 멸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존을 보장하는 두려움보다, 내 귀가 전보다 커지거나 몸놀림이 기괴하게 재빨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내게도 미래가 존재하는가?


나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몸동작을 잘 배우지 못했다. 나도 버둥거리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내 움직임은 그리 효율적이지도, 효과적이지도 못했나 보다. 열심히 돈을 벌다가도 금방 지쳐 나가떨어져버린 나의 지구력과, 감히 '돈 벌기가 싫다'라고 말해버릴 정도의 겁 없음이 내가 잘못 진화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나의 부모님은 멀쩡한 분들인데, 나만 혼자 돌연변이로 태어난 듯싶다. 돈을 벌지 못하는 나는 사회에 아무런 쓸모없는 인간이다. 자기 비하의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더 이상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면 나는 그저 비용을 축내는 악당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가난을 약한 것으로 취급하고 쉽게 용서하지 않으니까. 모두가 생존을 위해 치열한 경기를 벌이고 있는데, 나 혼자 링 바깥에 우두커니 서있는 것은 여기선 용납되지 않으니까. 이런 방식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 물을 자격이 내겐 없다. 나는 이제 돈 벌기가 싫어져버렸고, 돈을 못 번다는 건 결국 아무런 힘도 없다는 뜻이므로. 일단 돈을 벌고 생존해서 강해져야 마이크를 잡고 떠들 자격도 주어지는 세상이다. 이렇게 서로 돈 때문에 치고받으며 사는 걸 행복한 거라 말하는 인간은 거의 없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의 삶에 동의한 모양이다. 그러니 나도 얼른 이 허튼 '자아 성찰'과 '철학적인 질문'의 시간을 끝내고 세상이 말하는 '옳게 된 삶'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 같다. 이제 다시 '돈을 두려워하는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지금의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나는 내 삶이 그렇게 되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


나는 다시 한번 떠올린다. 내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만약 내 이야기가 소설이라면 이제 막 중반부에 접어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이 이야기 속에 어떤 일말의 교훈이나 깨달음이 있기나 할지,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고전적인 내러티브일지 아니면 끝끝내 모든 것을 잃고 파국을 맞이하며 끝나는 절망극일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는 주인공을 시간 순서에 맞추어 앞으로 전진시킬 따름이다... '돈을 벌기가 싫은 나', '돈을 두려워하기를 거부하는 나', '사회적인 진화를 체화해내지 못한 나'는 이 돌연변이 같은 유별남 때문에 주인공이 될 자격만큼은 충분하다는 것을 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다시 돈을 열심히 벌든 아니면 돈으로부터 해방된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하든, 내 존재의 가치와 이유를 세상에 똑바로 증명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삐뚤빼뚤하고 모가 난 인간이 생존하는 방식, 멸종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나의 남은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당시의 나는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돈을 벌기가 싫다는 욕망 때문에 내 사지가 조금씩 마비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월말이 되어 뒤를 돌아볼 때마다, 몇 년 전 받았던 대출금의 상환액이 내 통장의 잔고를 골리앗의 걸음으로 성큼성큼 따라잡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전 10화사업으로부터의 도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