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는 무덤 없다

어느 무례한 인간의 고백

by joni

이유 없는 무덤 없다

- 한국 전래 속담


'핑계 없는 무덤 없다'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누군가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거나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사용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만 보고 판단하기보다는 그 아래에 숨겨진 사연(서사)을 들여다보려는 태도가 담겨 있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사람들은 모두가 각자의 사연과 이유를 가지고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삶의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이유로 이걸 하기가 싫듯이, 저 사람도 자신만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저걸 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로는 분명히 다들 알고 있는 얘기일 텐데 삶을 실제로 살아내다 보면 때로는 타인도 그저 나와 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들이 찾아오는가 보다. 얼마 전, 나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사람이 미처 내리기 전에 먼저 쓱 올라타는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던 그 사람은 꽤 오랫동안 말없이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문 앞에 못 박힌 듯 가만히 멈춰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닫히기 시작할 때쯤에야 드디어 천천히 발을 끌며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벽 모퉁이를 돌아나가며 결국 내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나를 빤히 쳐다보며 서서히 멀어져 가는 것이었다. 눈으로 쌍욕을 한다는 게 아마 이런 걸 뜻하는 것일 테다... 사실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내가 잘못한 게 맞다. 얼른 사과를 했어야 했는데 당황한 나머지 멍하니 서있기만 했던 것도 내 잘못이다. 그러나 내가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을지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과연 내가 대한민국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기본적인 상식으로 자리 잡은 '내리고 타기'라는 개념을 모를 정도로 멍청해서 이런 짓을 저질렀던 걸까? 아니면 그런 상식 따위, 알면서도 지킬 의향이 없는 반사회적인 인간이라서 그랬을까? 엘리베이터를 떠나는 내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 사람은 아마도 이 둘 중 하나로 결론을 내렸던 모양이다.


그 사람은 내가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궁금해했을까? 아니, 그 사람은 물론 세상 누구도 나의 이유와 사연을 알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그저 변명이 될 따름이며, 나는 변명을 했다는 이유로 기초적인 수준의 매너를 무시한 지금보다 한층 더 별로인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냥 내가 잘못한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잘못인 채로 내버려 두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내 사연을 구구절절 읊느라고 그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붙잡아둘 권리도 내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는 무덤은 없는 법. 형사가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 ‘범죄 동기’를 캐묻는 과정은 수사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피해자에게도 가해자의 범죄 동기를 알려줌으로써 사건에 종지부를 찍는 것과 함께 일말의 위로를 전할 수 있다. 그러니까 '왜 그랬나?'를 묻는 것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며, 이 '왜?'라는 원인은 같은 종류의 나쁜 일이 미래에 반복되지 않도록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정보다. 인간은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나 감정을 다루는 과정에서 그 원인과 이유를 모르는 채로 남겨지는 것을 고통으로 여긴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가?'를 질문할 수 있을 만큼 전두엽이 발달한 덕분에 우리 인류가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게도 왜 그랬느냐고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내 변명의 기회를 얻고자 함이 아니라, (진짜 그게 아니라) 앞으로는 나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보고도 너무 놀라거나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공격적으로 쳐다볼 필요가 없도록, 그 사람에게 불가해하게만 느껴졌을 이 엘리베이터 사건의 미스터리에 대한 일말의 힌트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궤변 같다고? 아니, 나는 진심이다. 저 사람은 매너 없이 내리기도 전에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나 때문에 짜증이 났을 것이다. 괜히 기분을 잡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왜 그랬는지를 안다면 그 불쾌감이 멎을 수도 있다. 내 이유가 본인에게도 충분히 이해 가능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느껴진다면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또 벌어져도, '저 사람도 그때 그 사람과 비슷한 사연이 있을지도...?' 하는 무의식적인 느낌 때문에 처음 겪던 순간만큼 짜증이 나거나 불쾌해하지는 않을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는 타인 때문에 기분을 잡치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으니까. 예전엔 너무 화나고 짜증 났던 상황을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게 된다면 내 마음도 전과 비교하여 한결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아, 역시 궤변인가?


우리는 종종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과 맞닥뜨리면 ‘이상한 사람이네’, ‘미쳤나 봐’, ‘바보 아니야?’로 생각을 끝내버리곤 하는 것 같다. 입에서 툭 튀어나오는 ‘왜 저래?’라는 말은 사실 질문이 아니지 않은가?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고 그냥 거기서 마무리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나 오늘 이상한 사람을 만났어’로 전해진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도, '재수가 없었구나', '똥 밟았다 생각해'와 같은 말들을 통해 완벽한 타인을 간단하게 '이상한 사람'으로 결론 내려버리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우리가 지은 무리 안에서 돌고 돌면서 점점 더 타인을 향한 이해와 관용의 폭을 좁혀버린다. 키오스크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릴 때, 앞사람이 유난히 오래 걸리면 곧장 화부터 나는 것은 각자의 삶이 너무나도 바쁘고 팍팍하기 때문도 있겠지만, 이런 이해와 관용의 폭이 좁아진 것 또한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 화가 나기에 앞서 '왜 오래 걸리지?'라는 식의 궁금증을 먼저 느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가 있나? 그래서 고개를 빼고 앞을 봤을 때, 빨리 주문할 생각은 안 하고 전화 통화를 하느라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잡아먹고 있는 앞사람을 발견한다면 그때는 화가 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닌데) 내가 '내리고 타기'를 위반하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상대방이 내가 왜 그랬는지를 알았더라면 날 그렇게까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다. 나는 그다지 이해 못 할 만큼 괴상하거나 특이한 인간이 아니다… 나는 더럽게 평범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세상에 흔해 빠진 종류의 그런 인간이다. 만약 내게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랬냐면'으로 시작해서 '그래서 그랬던 거야. 미안해, 앞으로는 주의할게'로 끝나는 문장 몇 개를 상대방에게 들려줄 기회가 있었더라면, 이 모든 일은 별로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고 결국 나 자신의 시답지 않음 또한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우리들이 '왜'를 따져 묻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괴상하고 특이하고 이상한 존재가 되어 내 친구들과의 대화 속을 떠돌아다니는 외계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이상하고 특이하고 괴상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많을까? 유튜브에서,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끊임없이 발견되는 이 유별난 사람들이 정말 이렇게나 흔해 빠졌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흔해빠진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유별나다는 걸까? 나는 그게 의문이다.


이유 없는 무덤 없다. 물리적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 사람은 암으로 죽었고, 저 사람은 사고로 죽었고, 저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기타 등등. 그걸 우리가 모조리 다 알고 기억할 필요는 없다. 그걸 다 알아보려면 머리통이 터지고 말 거다. 하지만 ‘저 사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라는 생각은 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다. 이유 없는 무덤 없다, 이 말은 서로에게 좀 더 이해와 관용을 베풀자는 뜻일지도 모른다. 진짜 내막이 궁금하면 더 질문을 해봐도 되겠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다. 그저 '이유가 있겠지',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너'와 '나'는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결국 그 사람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 모두 그냥 더 잘 살고 싶고 더 행복해지고 싶은 것일 뿐인데, 어쩌면 '대체 왜 그렇게 이상하게 구느냐'라고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걸 텐데, 가끔은 나도 모르게 나만 욕심 많은 인간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나의 세상에 곁다리로 존재하는 NPC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자.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러지 말자. 내가 남의 이유를 궁금해하기 시작하면, 그래서 남의 이유가 나의 이유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세상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게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고독감과 외로움도 한층 덜해질 것이다. 생판 모르는 남 때문에 쓸데없이 기분을 잡치는 날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왜 그날 엘리베이터에 그렇게 급하게 올라탔느냐 하면…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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