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수 있는 자유, 쉴 수 있는 권리

보름간의 프랑스, 지독한 감기가 가르쳐준 것들

by joni

작년 이맘때쯤에는 파리에 있었다.

내가 하는 다른 일과 관련한 좋은 기회로 반쯤은 출장이고 반쯤은 휴가 같은 형태로 보름 정도를 프랑스에서 지낼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일주일 정도는 파리에서, 나머지 일주일은 파리보다 약간 아래쪽에 위치한 Tour(투르)라는 작은 도시에 머물렀는데 두 도시의 풍경은 거의 다른 나라라고 해도 될 정도로 판이하게 달랐던 기억이다. 파리는 세계적인 도시라는 명성 그대로 사람과 자동차, 건물, 자전거 등으로 하루 종일 북적거리는 반면, 투르는 대낮이든 저녁이든 차분하고 조용하기만 했다. 특별히 화려할 것 없는 집들의 외관에 더해 무척 오래되어 보이는 교회의 종탑에서 매시 정각마다 울려 퍼지던 종소리가 한적하고 평화로운 소도시의 인상을 주었고, 그 느낌은 파리와는 정 반대의 의미로 강렬했다.


나는 투르에 도착한 첫날부터 컨디션이 나빠지기 시작하더니 거의 그곳에 머무르는 내내 지독하게 아팠다. 단순 감기라고 하기에는 인후통과 콧물의 정도가 지나쳤던 것을 보면 뭔가 독감이라든가 코로나바이러스라든가 하여간 끔찍한 것에 걸렸던 것이 틀림없다. 낯선 도시의 풍경 속에 갇혀 죽도록 아파하는 나를 본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신기할 정도로 극명하게 갈렸다. 한국인 친구들은 주변 약국과 약에 대해 이야기했고, 파리와 투르 출신인 프랑스인 친구들은 따뜻한 차와 털 달린 담요를 권했다. 언젠가 어디선가 유러피언들은 아파도 약을 잘 안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한국인인 우리 입장에선 몸이 아프면 약국부터 찾는 것이 당연한데, 프랑스인 친구들은 이불을 싸매고 누워 끙끙대면서 버티는 것 같았다. 실제로 나와 거의 똑같은 증상으로 무척 고통받던 프랑스인 친구들이 있었고, 어쩌다 간신히 숙소를 빠져나와 서로를 마주치는 날에는 맹맹한 코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병을 이겨내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팁들을 주고받곤 했다. 동병상련인 프랑스인 친구가 내게 자꾸만 재스민, 캐모마일 티를 권하기에 조금 답답해진 나는 차 대신 근처 약국에서 파는 파라세타몰을 꼭 먹어보라고 답해 주었다. 실제로 나는 며칠간 프랑스인들의 방식에 따라 근처 마트에서 온갖 차들을 구해다 몇 날 며칠을 마셔봤지만 정말이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러다 타지에서 병원에 실려가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결국 약국에 들러 파라세타몰을 샀고, 그걸 한두 알 먹은 직후부터 증상이 극적으로 호전되는 것을 체험했던 것이다. 며칠 뒤 다시 만난 그 프랑스인 친구는 이전보다 몸상태가 훨씬 나아져 있었고, 내가 알려준 약(파라세타몰) 덕분에 살았다고 말했다...

나는 이 사건이 무척 흥미로웠다. 왜 진작에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반대로 우리 한국인들이 사소한 병에도 약부터 찾는 버릇이 들어있는 걸까? 생각해 보면 감기는 약을 먹어도 일주일, 안 먹어도 일주일을 간다. 그런 의미에서 몸이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종류의 가벼운 질병(감기 등)이라면 그냥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나의 면역력이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더 건강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삶은 너무나도 바쁘기에, 몸이 아프거나 컨디션 난조로 업무에서 퍼포먼스를 못 낸다든가, 며칠쯤 작정하고 집에서 푹 쉬어야만 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다. 감기는 약을 먹어도 일주일, 안 먹어도 일주일이라지만 약을 안 먹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일주일이 될 것이고, 약을 먹으면 어찌어찌 조금씩이라도 일을 할 수 있는 일주일이 될 거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일주일씩이나 마음 놓고 몸이 나을 때까지 쉴 수 있는 여유가 없다. 프랑스인들이 따뜻한 차를 끓여마시면서 끙끙 앓기만 하는 데에는 어쩌면 약값에 대한 부담 또한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들의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나는 왠지 우리가 약을 쓰는 것에 관대한 이유가 '혹시 삶이 너무 바빠서 당장 몸이 나아야만 하기 때문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는 거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역사적인 도시들의 주거 환경은 꽤 열악하다고 들었다. 우리처럼 난방이 잘 되지도 않을뿐더러 건물 자체가 무척 오래된 경우도 많아 썩어가는 대들보와 삐걱거리는 나무판자 틈으로 수백 년 분량의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기도 하다. 실제로 한 프랑스인 친구의 집에 초대받아 방문했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낡고 비좁은 나무 계단과 언제 빨았는지 알 수 없는 카펫, 어디서 주워온 것인지 모를 형형색색의 소파 등으로 꾸며진 이 친구의 쉐어 하우스는 한국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이런저런 위생 상태에 대한 우려와 동시에 너무나도 편안하고 매력적인 인상을 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러운 카펫 위에 두툼한 방석을 놓고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카펫을 짚고 몸을 팔에 기대거나, 무릎을 굽혀서 신발 밑창으로 카펫을 벅벅 문지르기도 했다. 그러고서는 손도 안 씻고(우리 중 누구도 손을 안 씻었다) 소시지와 바게트 따위를 덥석덥석 집어먹었다... 그러나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그날 이후 우리 중 누구도 배탈이 나지도, 몸이 아파지지도 않았으니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이다. (내 독감은 이 방문과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으므로 무관하다 하겠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1. 그런 형태의 주거 환경을 일반적인 상황이라 여기지 않을 것이며, 2.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행위를 다소 비위생적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반면 또 한국의 시골 마을에서는 이런 투르에서의 삶의 태도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기도 하다.

서울에서 꽤 오래 살아온 나는 이런 상황들이 낯설면서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 아이러니함이 꽤 마음에 들었다. 매번 뭔가를 할 때마다 손 세정제로 손을 박박 닦지 않아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했다. 비록 이렇게 위생 관념이 느슨해진 탓에 지독한 독감에 걸렸던 것이겠지만, 그것마저도 또 뭐 어떤가. 따뜻한 차를 마시며 며칠쯤 버텨보거나 정 안 되겠을 때 약국에 가서 파라세타몰을 사 먹으며 푹 쉴 여유만 있다면 몸은 회복할 수 있다. 독감을 이겨내는 데에 충분히 시간을 썼음에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더란 얘기다. 내가 앓아누웠던 그 며칠 동안에도 내 삶은 계속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누군가는 출장 겸 여행에서 몸이 아파지는 바람에 며칠씩 쉬어야 했던 나를 두고 '스스로 컨디션 관리를 못한 죄'를 따져 묻고 싶어 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삶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너무나도 많다. 내가 아무리 손을 잘 씻고, 더러운 카펫이 깔린 프랑스인 친구의 집에 가는 것을 거절했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아팠을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또 누군가는 여행에서 몸이 아픈 것을 시간 낭비이자 돈 낭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여행의 기회가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한번 떠난 여행에서 최대한 많이 '뽑아 먹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조금 전에 얘기했듯 우리 삶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너무나도 많다. 내가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여도 어떤 사건들은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우며 시시각각 닥쳐와도 우리에겐 그걸 알아차릴 방법이 없다.


나는 계속 자유롭고 싶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태어나던 순간부터 이미 무언가에 얽매여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학생 신분으로서의 의무에,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 노동의 신성함과 게으름의 사악함에, 위생이라는 성역과 죽음의 공포에...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에 지나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더러운 카펫을 깔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정도는 개인의 자유로 남겨둘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나의 카펫 상태에 동의하지 않는 타인이 존재한다 해도 그건 괜찮다. 그 사람이 원하는 삶의 방식이 더러운 카펫과는 잘 맞지 않는 것뿐이니까. 그러나 나의 카펫과 잘 맞지 않는 타인이 열명, 백 명, 천명이라면 어떨까? 이제 더러운 카펫을 괜찮아하는 마음은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 아닌, '이상하고 좋지 않음'이라는 관념이 되어 선택지에서 사라지고 만다... 천 명의 타인이란 결국 집단, 즉 사회를 뜻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때문에 계속 자유롭고 싶은 나는 자꾸만 무언가를 증명하려 든다. 카펫 좀 더러우면 어때요, 아무 문제없는걸. 내 삶의 방식이 남들과 좀 다르면 뭐 어때요. 남한테 피해 안 주고, 내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내 삶의 방식이 자신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느끼는 것도 같다. 내가 돈 벌기가 싫고 지쳤다고 외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나는 요즘 이런 지점들에 대해 줄곧 생각하고 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며, 광막한 우주와 그 너머를 상상하는 동시에 우주 한 귀퉁이의 지구별 속 '나'라는 작고 보잘것없는 개인의 선택과 자유가 어떻게 이리도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인지를.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는 꿋꿋하다. 파리와 투르에서 보낸 보름 정도의 시간을 떠올리며, 삶에는 내가 그전까지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다른 선택지들도 얼마든지 많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 슬프고 끔찍한 삶이란 내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삶이다.

그게 바로 내가 사업을 하며 죽어라 돈만 벌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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