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그렇다.
우리 집은 그리 가난하지 않았다.
비록 나는 말도 못 할 시골 깡촌에서 나고 자라긴 했지만, 우리 부모님은 번듯한 직장이 있었고 시골에 넓은 땅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부모님은 어린 시절을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보내도록 하는 편이 나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실제로 도시의 아이들이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방법과 차도에서 함부로 뛰어다니지 않아야 하는 이유, 누군가와 부딪치거나 실례를 범했을 때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배우는 동안, 나는 우리 집 마당의 수돗가에 서서 어떤 모양의 풍선에 물을 채워야 던졌을 때 가장 멋있게 터질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만약 나중에 도시에다 삶의 터전을 꾸릴 계획이라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도시의 방식을 미리 체화해 두는 편이 훨씬 좋을 거라고 나는 충고하고 싶다. 운이 좋아서 머리에 비해 과분한 수능 등급표를 받아 들고도 당당하기만 했던 18살의 나는 이제 몇 달 뒤면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될 거라는 사실 앞에서도 한치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했다. 모두가 서울, 서울 하면서 겁을 주려고 해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서울이 뭐 어때서? 다 사람 사는 곳이지. 자고로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어. 꼴같잖은 소릴 지껄이며 그저 폼이 난다는 이유로 학부 전공으로 예술 과목을 선택할 만큼, 어린 시절의 나는 오만했던 것이다. 서울, 대학, 예술, 인생, 미래 그 어느 것도 나는 앞서서 생각해 보고 계획하는 법이 없었다. 시골에서 보낸 유년시절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학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강물이 시원해 보인다면 뛰어들면 그만이고, 뒷산에 처음 보는 무늬의 개구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 때는 그저 가보면 되는 일이라는 것뿐, 강물에 옷이 다 젖고 다리에 거머리가 붙으면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지와 같이 미리 생각하고 겁내는 법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비록 대학 생활은 술과 연애로 엉망진창이었지만 4학년 때 만들었던 나의 졸업 작품만큼은 꽤 호평을 받았다. 기분 좋은 초대와 부름이 끊이지 않던 그때까지도 나는 시골 생활에서의 심플한 가르침을 신성하게 따르는, 여전히 촌스러운 인간이었다. 오라는 대로 오고 마시라는 대로 마시고 인터뷰하라는 대로 인터뷰했지만 내가 빛나고 있는 이 황금 같은 기회의 순간을 어떻게 잘 활용하면 좋을지, 이 순간으로부터 안정된 미래로 통하는 구멍을 만들 수 있을지, 내가 과연 이 필드에서 한 자리를 쟁취할 수 있을지와 같은 약삭빠른 두뇌 게임을 벌여 봐야겠다는 포부 같은 건 도통 떠오르지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저 기분이 좋았고, 즐거웠으며, 행복했다.
그렇게 폼 나면서도 한가로운 몇 년이 흐르고, 나를 부르던 손짓들과 목소리들이 차츰 멀어지면서 마침내 돈이라도 벌어보고자 마음을 먹던 그 무렵까지도 나는 그 촌스러움을 버리지 못했다. 대학에서 배운 것이 있으니, 그걸 가지고 프리랜서로 일하면 남들처럼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도 돈을 벌면서 폼 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름대로 동기부여를 한답시고 당당하게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더 이상 용돈을 받지 않겠다고 다짜고짜 선언부터 해버린 것이 내 불안한 경제 활동의 시작이라고 하겠다. 나는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일감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웹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프리랜서를 찾는 공고를 스크랩하고, 졸업 작품을 포트폴리오 삼아 무작정 메일을 보내는 일을 매일 반복했다. 그렇게 며칠, 몇 주가 지나고 마침내 주머니에 이천 원밖에 없어서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살까 말까, 엄마한테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하던 즈음에 드디어 한 곳에서 회신이 왔다. 같이 프리랜서 일을 시작한 동료와 머리를 맞대고 메일을 들여다보며 'R&R'과 '스콥'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견적서는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를 열심히 조사해 답장을 적었다. 그렇게 나는 어엿한 프리랜서가 되어 24시간 열려 있는 카페를 작업실 삼아 돈이라는 걸 스스로 벌게 됐다. 내 작업의 단가가 10만 원이었다가 20만 원이 되고 25만 원, 30만 원이 되는 동안 덩달아 내가 주문하는 음료도 아메리카노였다가, 아이스 요거트 블렌디드였다가, 홀리데이 시즌 음료에 허니버터브레드 세트 등으로 자꾸자꾸 비싸졌던 걸 보면 나는 여전히 시골에서 배운 라이프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도무지 조심하고 계획하며 한 치 앞을 내다보는 법이 없었다.
나는 이 콘크리트 정글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무작정 메일을 돌리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바로 이 질문부터 던졌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시골에서 배운 삶이란 참으로 단순하고도 정직한 것이었다. 유치원 친구는 벌써 한글과 구구단을 다 뗐다거나 옆동네 아파트가 재개발을 추진한다는 식의 소문은 내가 자란 곳에서는 유효하지 않았다. 실제로 우리 부모님의 중대한 걱정거리의 대부분은 머리에 이가 생겼다는 골목 아랫집 미선이를 내가 자꾸만 자전거 뒷좌석에 태우고 다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거나, 우리 집 대문 앞에 버티고 앉은 커다란 독두꺼비를 어떻게 쫓아내야 할지 등과 같은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었고 어린 내가 독두꺼비를 맨손으로 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는 그럴싸한 건물 로비에 뚱딴지처럼 걸려 있는 한가로운 시골의 풍경화 속에서만 머무르느라 바깥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미리 겁 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사람이 겁을 낼 줄 알아야 미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피하며 앞을 내다보는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법인데, 나는 콘크리트 정글의 복잡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아름다운 온실 속에서만 자란 운 좋은 화초처럼 병충해에 대한 두려움과 면역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무했다. 프리랜서를 직업으로 선택하던 순간에도, 이제는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어떤 막연한 깨달음과 위기감보다는 그저 여태껏 해온 대로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질문했을 뿐이다. 어른이 되고 싶어? 일을 해야 진짜 어른이지. 그 시절의 나는 돈을 버느라 힘들어보고 싶었고, 일 하느라고 바빠져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아이의 순수하고도 단순한 욕구에 지나지 않는.
나도 진작에 세상이 이렇게나 넓고 복잡한 것임을 배웠어야 했다. 세상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고, 이들 모두가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의 멋진 겉모습과는 다르게 물속에선 치열한 먹이사슬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좀 더 빨리 이해했더라면. 나는 서울에 오고 나서야 내가 배우지 못한 것들이 까마득하게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만원 지하철에 내 몸을 마구잡이로 밀어 넣는 요령을 몰랐다. 나는 거리의 바쁜 사람들이 내 어깨를 치고 그냥 지나가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지하철에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돈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일해야 하는지, 주식으로 어떻게 수익을 내는지, 왜 사람들이 이렇게나 바쁜지, 전혀 몰랐다. 나는 적극적으로 삶의 방식을 다시 배워야 하는 순간이 왔음에도 그래야 한다는 사실조차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내가 속한 이 사회에는 사계절의 순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 있음을 배웠어야 했고, 한여름의 매미 소리보다 더 사람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일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도 이해했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이 없다는 건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인 일이라는 사실부터 당장 깨달았어야 했는데. 나는 너무 순진했고, 도시는 순진한 나를 이해시켜 줄 만큼 친절하지도, 여유가 넘치지도 않았다. 모두가 수면 아래에서 최선을 다해 죽기 살기로 치고받고 있었는데, 나는 혼자 몽롱한 강둑을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운이 좋았다. 순진한 태도로 시작한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큰 고생 없이 진짜 프리랜서가 되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전공을 살려서 선택한 분야였기에 일이 크게 어렵지도 않았다. 일을 하기만 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라 할지라도 돈은 꼬박꼬박 내 통장에 숫자로 된 실체를 보여주었고, 나는 그저 돈이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족했다. 그때의 나는 과연 정말로 돈을 벌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돈은 그저 나의 유치한 직업 놀이에 대한 증표에 불과했던 것일까? 지금 돌이켜 보면 정답은 명백해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스스로가 정말로 돈을 좋아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돈의 꽁무니를 쫓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하는 게 어른이고 진짜 사회인이니까. 나는 기분이 좋았다. 뭔가 서울 땅에서 자리를 잡은 것 같은 기분, 드디어 무언가를 해낸 것만 같은 기분. 그때의 내가 이룬 성취를 하찮은 것이라고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실제로 이런 성취감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또 즐겁게 일해서 부모님과 나 자신에게 무언가를 증명해 보였으므로. 그러나 동시에 '돈'의 의미와 가치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시작한 일이었기에, 겉으로는 어떻게 보였든 간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돈'을 쫓았던 게 아니라는 것만은 사실인 셈이다.
모두 잘 알다시피 돈은 장난이 아니다. 돈은 현대인에게 있어 H₂O와 O₂처럼 필수불가결한 기초 원소나 다름없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이런 말들을 스스로 떠올리지 못했고, 그 때문에 돈에 대한 개념을 나 혼자 꽤 오랫동안 오해하며 살아야 했다. 내가 겪을 미래의 경제적 고난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문득, 돈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 시절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 못하는 지금의 내 모습 또한 처량하기 그지없음을 깨닫는다. 액수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기분 하나만으로도 행복하게 일했던 과거의 나를 다시 온전히 되찾고 싶다. 음, 하지만 이런 마음이라면 나는 정말 돈 벌긴 글렀다. 나는 왜 지금보다 더 가난했던 시절을 동경하는 걸까. 대체 왜 나는 이토록이나 돈 벌기를 싫어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