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남의 돈을 떼먹으면 저주를 받는다
안타깝지만 프리랜서 생활을 하다 보면 다들 한 번쯤 정산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는 경험을 한다. 그냥 제때 이루어지지 않는 수준에서 끝나면 다행이라고 봐야 한다. 일한 보수를 아예 받지 못한 채로 물러나는 경우도 많으니까. 이런 상황에 처한 몇몇 프리랜서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고용주를 압박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과 신에게 끝없는 폭언을 퍼부으며 평생에 걸쳐 그 회사에다 저주를 내리는 무시무시한 무당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2. 남의 돈을 떼먹으면 저주를 받는다
그러니까... 내가 초창기에 했던 일들의 대부분은 계약서를 쓰지 않은 채로 진행되었다. 많은 프리랜서 선배들과 고용노동부는 내게 (제발) 계약서를 쓰라고 끊임없이 권고했지만 어쩐지 나는 클라이언트에게 '계약서를 쓰자'라고 요구하는 말을 꺼내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 어차피 일주일, 길어도 한 달이면 끝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고 금액 자체도 워낙 얼마 안 되다 보니 자꾸만 '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다. 하지만 기억하자, 계약서를 쓰지 않으면 내 작업물과 작업에 대한 보상은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한다.
이번 일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적은 금액과 더불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회사의 듣도 보도 못한 제품의 홍보용 콘텐츠 제작에 대한 건이었다. 프리랜서 초창기에는 확실히 세상을 좀 새로 배우게 되는 경험의 순간이 많았던 것 같다. '오... 이런(쓸데없는) 접근을 하는구나...'라든지, '흠... 이게 정말 합법적인 건가...?'라든지. 이런 경험은 때로는 무척 흥미롭고 때로는 굉장히 우려스러우며 심지어는 나의 윤리적 가치관을 뒤흔드는 일이 되기도 한다. 이번 건의 경우에는 '과연 이런 물건이 세상에 정말 필요할까?'라는 정도의 질문으로 그치는 수준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일을 마쳤다. 늘 그랬듯 성실하게, 하라는 대로(아니 그 이상으로), 원하는 기간 안에. 이제 남은 건 입금이다. 정산해 주기로 약속한 날짜가 하루, 이틀 지나간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좀 순진하고 소심한 구석이 있어서 이런 '돈 얘기'를 꺼내는 걸 어려워했다. 괜히 상대방을 껄끄럽게 만드는 건 아닐지, 혹시 이런 얘기를 기분 나빠하진 않을지. 그러나 이건 정말 웃기는 발상이다. 그쪽에서 먼저 약속된 날짜에 약속된 대금을 지불하지 않아서 나를 껄끄럽고 기분 나쁘게 만들고 있는 중인데! 그리하여 나는 정산일이 일주일 가량 지났을 때, 드디어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정산 날짜가 지났는데 아직 입금이 되지 않아서요..." 나는 막연히 내가 이 정도 액션을 취하면 그쪽에선 '앗, 죄송합니다. 빨리 정리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줄 것 같았다. 우리 사회는 그 정도 상식은 있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줄 알았다. 아니! 그런 발상은 진짜 크나큰 착각, 무지, 순진함이다. "아, 근데 제가 이제 담당자가 아니라서요. 저도 퇴사했거든요." 이건 그리 놀랍거나 충격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 회사에 비전이 없다는 것쯤은 나도 작업하면서 많이 느꼈으니까. 오히려 퇴사했다기에 '현명한 선택을 하셨군요. 잘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할 뻔했다. 문제는 이다음에 이어진 이야기였다. "사실 저도 퇴직금을 아직 못 받아서 좀 문제가 있거든요." 자, 봐라. 퇴사한 직원의 퇴직금도 못 주는 회사인데 계약서도 안 쓰고 딱 한번 줏어다 쓴 나 따위 프리랜서한테 먼저 정산을 해줄 리가 없다. 그렇다. 나는 계약서를 안 썼다. 고작 요정도 금액에 요정도 일하는데 '굳이?'라고 생각했더랬다. 멍청한 자식. 순진한 자식. 이제는 퇴사한 전 담당자는 내게 회사 대표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겠다고 했고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후에 회사 대표에게 연락을 했느냐고? 당연히 했다. 처음에는 문자를 주고받으며 이야기 나누던 사이였는데 얼마 안 가 대표가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는 식으로 나와 절교를 하려 했다. 아직 연 끊을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그때부터 전화를 걸었고, 물론 통화가 자주 연결되진 않았지만 어쩌다 연결이 된 때에는 비난과 고성이 오갔으며... 여차저차하여 결국 떼일 뻔한 돈을 받아내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런데 돈을 받고 나서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쩐지 좀 흥미로웠다. 퇴직하고도 원통해했던 그 담당자의 퇴직금도 이제는 지급이 됐을까? 혹시 내게 달린 금액은 워낙 소액이라 그냥 줘버릴 수가 있었지만, 직원의 퇴직금은 금액이 훨씬 클 테니 그것만은 아직까지도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회사의 대표는 지금 얼마나 곤경에 처했으며, 퇴사한 담당자의 삶은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나는 쓸데없이 이런 것들을 궁금해하며,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면서 '돈 벌기'를 지속하고 있을 수많은 회사의 대표들과 프리랜서들, 사장님들 그리고 담당자들의 복잡한 심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이후 시간이 흘러 나 또한 한 회사의 대표가 된 지금까지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직원들 월급만큼은 밀리지 않고 주고 싶다'라고 말하는 수많은 대표와 사장들의 마음을 몸소 체험하며 이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때가 많다. 그날의 내가 그 대표를 얼마나 원망했었는지(그리고 얼마나 원색적으로 비난했었는지), 퇴직금을 받지 못한 담당자가 내게 대표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얼마나 쉽게 넘겨줬었는지 등등. 내 사업이 언제 어떻게 무너지든, 나도 고용한 사람들에 대한 페이만큼은 절대로 떼먹지 않을 것이다(제발). 물론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책임감에서 비롯된 이유가 주요하지만, 또 동시에 그 어느 누구로부터든 그날의 내가 입 밖으로 뱉었던 대표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와 같은 표현은 절대로 타인으로부터 돌려받고 싶지 않다...
프리랜서는 참 애매하다. 법적인 위치를 따질 때에도 '근로자'로 딱 잘라서 분류해주지 않는 것 같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행정적으로 사각지대에 놓이는 경우도 많다. 노동의 방식이 자유로운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걸까? 사실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지급받는 것은 경제 활동에 있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걸 지키지 않는 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현대 사회에서는 터무니없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건지, 선뜻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다. 회사의 상황이 어려워서 임금을 지급하기가 곤란할 것 같으면 애초에 프리랜서를 고용해선 안 됐다. 쭉 일하는 직원도 아니고 단발적으로 치고 빠지는 프리랜서인데, 이들에게 지불할 자금의 확보가 불투명한 상태로 일을 시킨다는 건 어찌 보면 굉장히 무책임한 행동인 것이다. 물론 상황이 갑자기 나빠진다든가 예상치 못한 문제로 임금 지불에 어려움이 생기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럴 때에는 최소한 연락을 회피하거나(!), 회사를 공중분해시키는 식으로 일처리를 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 처한 상황과 우선순위가 다르기야 하겠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서 프리랜서든 직원이든 임금을 떼먹는다는 건 참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고용한다는 건 그 사람의 시간을 돈을 주고 산다는 의미와도 같다. 나 대신 이 일을 해줄 사람을 찾음으로써 나는 그 일을 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셈이므로. 그런데 이 사람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나는 그냥 시간 도둑놈이 되는 것이다. 차라리 돈을 훔치지, 남의 시간을 훔치다니? 그 시간이면 다른 데 가서 더 좋은 보수를 제대로 받으면서 일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니 이건 두고두고 저주를 받아도 할 말이 없어야 마땅하다...
나는 수많은 프리랜서들이 계약서 작성에 대해 부담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회사 측에서 먼저 제안해주지 않으면 선뜻 나서서 '계약서를 쓰고 싶은데요'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무래도 고용자와 피고용자라는 관계에서 오는 부담일 수 있다. 현실적으로 계약서 작성이 거추장스럽거나 '굳이?'싶은 일이 될 때가 많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일단 한번 써두기만 하면 든든할 것이다. 행정적으로 프리랜서와 관련한 제도가 아직 미비한 것이 사실이고, 어떤 식으로든 내 작업과 보수를 안전하게 보호하려면 계약서를 쓰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제일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어디다 신고를 하려고 해도 일전에 작성해 둔 계약서가 있다면 신고 과정 또한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임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