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밤 4시, 대체 뭘 해야 할까?

by 이모리

이사를 마친 후 집을 구했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얼마 간은 집 구할 생각을 안 해도 된다는 것 자체에 감사했고 마음이 겸손해졌다. 어느 땐가부터 원하는 것을 이루면 마냥 들떠 기뻐하거나 성취감에 젖지 않고, 빚진 마음을 갚을 것이 하나 더 늘었다 생각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부채 의식은 절대 아니다. 내게 좋은 일이 생긴 것은 나의 노력으로 된 것도 있겠지만 서로 어떤 모양이든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사회에 속한 이상 그 일의 성취에 있어서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더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축의금 명부에서처럼 부조의 양이 정확히 매겨지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돈으로 측량될 수도 없는 것들이다. 그 도움의 크기가 모래알 하나 정도 거나 종이 한 장의 무게였다고 한들 전혀 상관없다. 모래알이든 종이 한 장이든 더블린에서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일랜드의 겨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가 아일랜드에 도착한 것은 9월 중순, 이사를 한 것은 10월 초였다. 10월에 들어서면 아일랜드는 이미 겨울로 향해 가며 해가 짧아지기 시작한다. 만약 내가 이 집을 구하지 못해 10월 초를 넘기고 중순이 될 때까지 단기 숙소를 전전하며 집을 보러 다녀야 한다면 어땠을까. 다른 방법이 없기에 그대로 부딪혀 나가야 했겠지만 몸과 마음이 훨씬 고생스러웠을 것이다. 집을 보러 다니면 아무래도 처음 가보는 지역일 가능성이 높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면 다행이지만 버스를 타야 하는데 배차 시간이 길거나 간발의 차로 놓쳐버리기라도 한다면 한 집을 보는 것만으로 그날 하루가 다 가는 거다. 게다가 날씨까지 좋지 않아 비바람이라도 분다면 '내가 여기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4시가 넘으면 이렇게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생각해보면 한국에 있을 때 아일랜드에 대해 참 무지했다. 아일랜드가 영국과 가까운 작은 나라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영국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주변에 여행을 다녀오거나 유학한 사람들이 있어서 종종 얘기를 듣곤 했는데 꼭 나오는 얘기가 날씨였다. 영국은 1년 내내 하늘이 흐리고 비가 자주 온다는 것. 얘기만 들어도 마음이 우중충해지는 기분이었는데, 영국보다 날씨가 안 좋다는 나라가 내가 와있는 아일랜드다.


서머타임이 끝나는 10월 30일 이후에는 오후 4시만 돼도 하루의 마무리를 종용하는 듯한 어둠이 찾아온다. 어학원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1시, 점심을 먹으면 2시, 근처에서 숙제를 하거나 장을 보려고 마켓이라도 들렀다 나오면 이미 해는 지고 없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어떻게 이 긴 겨울을 견딜까. 펍이 동네마다 있는 이유가 그제야 보였다. 카페는 일찍 닫고, 그렇다고 식사를 하기엔 부담스럽고. 그럴 때 별 고민 없이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일랜드에선 펍이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나도 밖에서 많이 걸은 날에는 뜨거운 아이리쉬 핫 위스키를 마시며 으슬으슬 추운 몸을 녹였다. 위스키가 들어가서 분명히 술맛이 나긴 하는데 뜨거운 물이 섞여있고, 레몬, 꿀, 약간의 시나몬이 들어가 있어서 술이라기보다 술맛이 나는 허니 레몬티에 더 가까웠다. 뜨끈하고 알싸한 것을 목구멍을 통해 몇 모금 속으로 넣고 나면 몸에 온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랬다. 아일랜드 사람들도 감기 기운이 있을 때 아이리쉬 핫 위스키를 마신다고.



아일랜드 사람들에게도, 또 가족들과 연말연초를 함께 보내지 못할 외로운 이방인들에게도 긴 겨울을 견디기 위해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명분이 있는데 바로 할로윈데이와 크리스마스다. 유럽에서 크리스마스 연휴가 가지는 의미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아일랜드에서 나름 큰 축제의 날인 10월 31일 할로윈데이를 앞두고는 이미 10월 초부터 해골, 무덤, 피 묻은 인형 등 기발하고 괴기스러운 할로윈 장식들이 집 곳곳에 붙어있다. 그렇게 할로윈데이가 끝나기가 무섭게 거리에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시내 중심에서 열리는 할로윈 퍼레이드


몰아치듯이 일찍부터 연말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도 됐다. 4시부터 시작되는 긴 겨울밤의 적막함을 견디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을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일조량이 필요한지를 인지하게 된 것도 아일랜드에 와서였다.


밖에 나가면 으슬으슬하게 추운 느낌이 싫고, 그렇다고 친구들과 매일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먹지도 않던 다이제스티브 초콜릿 비스킷, 그것도 짧은 것 말고 가장 긴 원통형을 사 가지고 와서 자기 전까지 다 먹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몇 개 집어 먹은 것 같지도 않은데 반이 없어져 있는 기적을 맛보았다. 별로 좋아하던 과자도 아닌데 그 겨울 동안에는 왜 그렇게 맛있던지. 과자치고는 밥을 먹는 것처럼 헛헛함이 잘 채워진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지금에서야 찾아보니 그도 그럴 것이 긴 원통형 다이제스티브 하나에 1,000 칼로리가 넘는다.)


무엇을 해도 내일이 올까 싶을 정도로 느리게 흐르던 그 겨울밤들.


그래도 그 해의 겨울이 가장 넘기기 쉬운 겨울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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