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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Apr 30. 2016

<느와르, 서울>

가난의 경로.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602.html

느와르 영화는 ‘조폭영화’, ‘갱스터영화’ 로 오해받기 부지기수다. 하지만 느와르 영화는 도시 발달과 함께 자라난 현대인의 욕망을 소재로 한 정말 ‘인간적인’ 영화다.


2차 세계대전은 전세계 사람들에게 ‘핵폭탄’의 공포를 알렸다. “우리 도시는 안전할 거야”라는 의식은 ‘핵폭탄’이라는 아웃라이어에 의해 철저히 부정당할 수 있음을 모두가 배웠다. 2차 대전 이후, 폐허의 유럽을 피해 많은 이들이 미국 대도시로 이동했고, 유럽으로 이민간 미국인들도 돌아왔다. 전쟁 이후 미국의 대도시는 성장과 동시에 음울했다. 전쟁이 남긴 PTSD는 군인 뿐만 아니라 도시인 모두에게 남았다.


뉴욕시민의 불안을 담은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에드워드 호퍼 작


전쟁 이전과 달라진 여성들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남성들은 방황했다. 가정의 패권은 여성에게 갔고,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군인과 남성들은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입신양명을 위해 도시로 떠났다.


도시는 욕망과 폭력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하류인생에서 상류계층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욕망, 마천루 꼭대기에 올라하고자는 욕망과 ‘언제 이 도시가 파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기반한 폭력성, 그 폭력성을 걱정하는 불안이 공존했다.


느와르는 여기서 시작된다. 상류층에 편입하고자 하는 욕망과 동시에 도시가 갖고 있는 불안(할렘이라든지)을 동시에 그리는 영화다. 그래서 느와르 영화는 주인공의 욕망을 그리고, 욕망을 위해 갖가지 수를 가리지 않는 모습을 그리고, 욕망 끝에 파멸하는 모습을 그린다. 필연적으로 가난을 그리고, 사치를 그리고, 도시의 발달을 담는다.


1950년작 <Night and the city>, 전형적인 느와르다


여기까지가 캐나다에서 들었던 수업의 내용이다. 저 이야기를 듣자마자, ‘서울’만한 느와르의 소재가 없다 싶었다. 전후 파괴된 도시, 일을 찾아 상경한 청년들, 권위주의 정부의 개발정책 하에 욕망을 이루는 청년들까지. 서울만큼 하류인생의 감성과, 럭셔리 상류 계층의 감성이 공존하는 도시가 없다 싶었다.


타워팰리스, 롯데캐슬 등에 가려져있지만 여전히 서울엔 가난이 산다. 가난과 불평등, 찬란함과 비루함이 공존한다. 철거민의 가난한 삶은 분명 불편하다. 우리가 보는 서울은 사람 때문에 걷기도 힘든 강남역, 새벽 3시 비틀거리는 젊음이 가득한 홍대와 이태원일 확률이 높다. 철거당하는 동자동, 퇴거당하는 남대문로5가는 우리 서울에서 ‘허락되지 않은’ 삶이다. 정권은 철거를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이라고 표현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그리는 유토피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주가 허락 되지 않은 삶은 그렇게 존재마저 부정당한다.


1988년 올림픽으로 인해 집이 철거되자 천막으로 버티는 상계동 주민들

사진출처


권력의 성격은 그렇다. 불편한 사실을 숨기고, 진실을 은폐하는. 정권이 보고 싶어하지 않는 현주소는 그렇게 은페된다. 서울에 사는 우리(모호한 개념이다)가 일종의 권력이라면 아마 이 기사에 올라온 분들은 우리에게 불편한 사실일 수 있다.


언론은 그렇다. 불편한 사실을 발굴해, 진실을 밝혀내는. 기득권이 보고 싶어하지 않는 현주소를 밝히고, 힘이 없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주는 역할. 추상적이고 모호하지만 언론은 원래 그렇다.


가난이라는 게 대에서 대에로 이어지고, 가난에 치여 삶이 표류하는 현장은 불편하다. 하지만, 읽기엔 더없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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