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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Aug 27. 2017

좁은 문

좁디 좁아. 



1. 무언가 어색했지만, 내용이 느껴지는 책


    문장이 아름답다거나 엄청나게 아름다웠던 표현이 있던 건 아니다. 아무래도 한국어로 된 책이 아니다보니 번역투가 강하다. 더군다나 꽤 예전에 나온 거라 최근의 어투와도 많이 다르고. 좋든싫든 책의 내용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금방 읽었다. 

    제목인 좁은 문은 마태복음의 한 구절에 나온 단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넓은 문은 들어가기는 쉬울지언정 그 끝엔 허무만 있을 것이고, 좁은 문은 길과 문이 모두 좁을지언정 그 끝엔 생명이 있을 거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신일 수도 있고, 본인이 간절히 바란 무엇일 수도 있겠더라. 


2. 세상의 바깥에서 그녀를 원했던 그와 세상의 안에서 그를 원했던 그녀


    원서도 아니고, 어색한 번역투로 쓰여졌고, 나의 언어생활과도 거리가 멀어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마음은 알 수 있었다. 책에 나오는 제롬과 알리사는 누구보다 서로를 열렬하게 사랑했다. R은 이를 “세상에 서로밖에 없는, 그 누구에도 영향받지 않고 서로만 바라보는 사랑”이라고 묘사했는데 이제 와서 그 뜻을 알겠다.

    하지만, 사랑의 방식은 매우 달랐다. 성서의 가르침대로 미덕을 쌓아온 알리사와 달리 제롬은 알리사를 위해 미덕을 쌓았다. 스스로를 희생해 제롬의 행복을 바라는 알리사와 달리 제롬은 그녀 없이 행복할 수 없다고 수없이 되뇌인다.

    사랑의 방식이 다른 이유는 그들이 다른 위치에 서있기 때문이다. 알리사는 성서의 가르침이 이끄는 금욕주의적 세계관의 안에 있다. 제롬은 같은 세상일지언정 세상의 중심을 성서가 아닌 알리사로 두었다. 금욕주의적 세계관의 끝에 있는 생명은 하나님이고, 제롬의 끝에 있는 생명은 알리사다.

    비록, 다른 위치에 있지만 서로는 서로를 끔찍하게 여긴다. 스스로를 하나님과 제롬 사이에 있는 방해물이라 여겨, 제롬의 행복을 위해 제롬을 떠나려는 알리사다. 하지만, 제롬을 통하지 않으면 그 어떠한 세상의 행복도 행복으로 느끼지 못하는 알리사다. 알리사에게 제롬은 생명으로 이끄는 길이자, 문 그 자체였다. 그동안 배워온 가치관과 본인의 마음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알리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제롬을 떠나려 한다. 죽음만이 그와 그녀를 갈라놓진 않았지만, 죽음만이 그녀로 하여금 그를 잊게 만들었다. 비록 종교적 세계관에 살아 하나님을 바랐던 그녀지만, 그녀의 마음은 제롬을 향했다. 

    제롬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은 크게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알리사를 향한 제롬의 마음을 보여준다. 1부 전체가 사랑 그 자체다. 알리사가 본인이 배워온 가치관에 따르면 하나님과 결합해야만 행복하기에 제롬과 하나님의 결합을 위해 인간적 욕망과 행복을 버렸다면, 제롬은 인간적 행복을 위해 시대의 가치관을 버리고자 했다. 오히려, 끝까지 독신을 지키려는 제롬을 보면 그는 ‘알리사’를 본인의 가치관으로 삼은 듯하다.


3. 이런 사랑 할 수 있을까?


    순수하게 상대방만을 바라보는 사랑은 사실 쉽지 않다. 우리는 연인의 친구를 질투하기도 하고, 연인에게 짜증을 내기도 한다. 결혼은 더하다. 결혼하는 연인들보다 파혼하는 연인이 더 많지 않을까라고 내심 생각해본다. 스스로를 계발해 밥값하는 것만 해도 벅찬 요즘 세상에 누군가만 미친듯이, 열렬하게 사랑하는 건 쉽지 않다. 이런 때일수록 서로만 생각하는 연애가 낭만적으로 느껴지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서로만을 바라보는 연애라면 연인과 자신을 아무 것도 없는 진공상태에 두고, 그 혹은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닐까. 상대방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의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영혼이라는 표현을 쓰니 괜히 성스럽게 느껴지는데, 결국은 본인의 모든 것의 중심을 그 사람으로 두는 게 아닐까.

    나도 그랬던 적이 있다. 분명히 그랬었다. 그런데 그 축이 갑자기 발이 달려 스스로 나를 떠나갔다. 그렇게 세계가 하나 무너졌다. 그러니까 겁이 나더라. 그래도, 다시 한 번 이 허망한 내 세상의 축을 다시 채우고 싶다. 겁이 나는데, 해보고 싶긴 하다. 언젠가는 말이다. 내 모든 것을 던져 그녀를 내 세상의 중심으로 두고, 나와 그녀를 끊임없는 둘 만의 진공에 두는 것 말이다.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는 일은 그 자체로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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