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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Aug 31. 2017

우리에겐 좀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하다.

개강당해버리기 하루 전.

제목을 저렇게 적으니까 되게 무슨 사랑꾼 같아 보이는데, 그건 아니다. 며칠 전에 키스디에서 자료를 찾고 올라와서 C와 함께 카페에서 일을 하다가 한강을 걸었다. 같은 연구실이기도 하고, 동갑이라서 공감대가 통해서 그런지 존나 묵묵히 잘만 걸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아무 상관없다. 


왕십리역에서 뚝섬유원지역까지 걸으니 지칠 수밖에 없다. 이름 모를 대교 근처에 앉아 약간 추운 강바람을 맞으며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많은 커플이 있었다. 아마 우리를 제외하곤 대부분 연인이었던 거 같다. 그래서 유난히 추웠던 건가. 이런 씨 ㅃ


뭐, 그래도 이 세상엔 좀 더 많은 세상이 필요하다. 물론, 사랑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개인과 개인이 사랑하기도 어려운 세상이고, 개인이 세상을 사랑하기도 어렵다. 세상을 생각하면 시니컬하고 염세적인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정의를 말하던 언론사부장은 자식의 취업을 청탁하고, 돈과 부모를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는 말에 딱히 대항할 말도 없고, 약자에 대한 혐오 표출이 당연하기도 하고, 거부해야할 차별도 관행이라든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든지 현실의 벽이라는 수사를 받는다. 악습이 악습이 아니라 관행이라는 이유로 꾸준히 굴러간다. 빨간 꽃과 노란 꽃이 꽃밭에 가득 피어도 미싱이 돌고 도는 것처럼, 악습은 멈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 어려운 세상이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기꺼이 사랑받아 마땅하다. 지금 세대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언제 있었겠나 싶기도 하고, 꿀이 다 빨린 시기에 태어난 것도 안쓰럽고 (…). 물론 부자 친구들은 항상 사랑합니다. 사랑사랑사랑^^7


애정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볼 때 좀 더 긍정적인 바-이브가 나온다. 짬에서 나온다기엔 내 삶이 너무 짧으니까, 그냥 바이브라고 하자. 동물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동물은 생존에 최적화된 친구들이고 우리는 생존을 넘어선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생존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이라면, 우린 그것을 넘어 항상 무언가를 이루었다.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건 삶에 대한 욕심이 충만하다는 점인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욕심이 생겼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잘보이고 싶을 때,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하고 싶을 때, 남자친구 앞에서 이뻐보이고 싶을 때 등등 말이다. 스스로를 사랑할 때에도 나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자기계발이라는 게 결국 나를 가꾼다거나 발전시키고 싶을 때 하는 거고, 그건 나를 사랑해야만 가능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에 나오는 명대사가 하나 있다.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인데, 한국어로 치면 당신이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했어 이정도겠지. 나에 대한 욕심이 허락되고, 적극적으로 추앙받을 때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할 때다. 생각해보면, 내가 삶에 대해 열의를 가지게 된 건 누군가를 사랑할 때나 나에 대해 욕심이 생겼을 때다. 정규직이 되겠다는 욕심 때문에 장그래는 그렇게 열심히 살았고, 난 여자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뭐했더라? 여튼. 


친구들도 그런 얘기를 하더라. 과거의 사랑을 생각하면, 그 사람에 대한 생각보다 그 사람을 열렬히 사랑했던 내 모습이 생각나서 아련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고. 그때는 “뭔 개소리야 자존심 오지네” 라고 말했는데, 이제는 좀 이해할 수 있겠더라. 그렇다. 이렇게 정신적 성장이 느린 놈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단순히 성적인 사랑을 말하는 건 아니다. 사람을 측은지심으로 보거나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애정이 있는 시각도 포함한다. 어제 오늘 화제가 된 건설적인 비판 역시 세상을 사랑해야만 가능하다. 내가 서있는 이곳을 사랑해야지만 더 안타깝고, 좀 더 나은 곳이 되게끔 하는 비판을 한다. 이곳을 싫어할 때의 비판은 비판이 아니라 그냥 비난과 저주인 경우가 많다. 


헬조선이라. 난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기도 하고, 그 단어가 유행한 것에 대해 딱히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다. 좋든싫든 내가 살 곳은 아마 이 나라일 거고, 이 나라의 좋은 면만 보는 건 너무나 신민적 삶이 아닐까 싶었다. 안 좋은 면을 해학적으로 푸는 건 막말로 한국의 종특 아니었던가. 


뭐, 사랑이라는 말을 썼지만 난 우리네 삶이 아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라도 나아질 거라는 생각과 같은 시대는 사는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이 필요하다 싶다. 누구나 열심히 살지만, 누구나 잘살 순 없다. 잘 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불행한 사람은 모두 행복해지고 싶었고, 행복한 사람은 운이 좋아 행복하게 된 걸 수도 있다. TV의 조명을 받진 않지만, 항상 묵묵히 열심히 사는 모두는 기꺼이 사랑받아야 하고 존경받아야 한다. 썩었다라는 푸념이 나오는 적폐가 그득한 사회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항상 애처롭다.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는 원래 그랬다. 그럴수록 사랑받아야만 한다. 그것이 온정이든, 애정이든 말이다. 


사랑이 혐오와 차별을 이긴다라는 문장엔 딱히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애정 어린 시각과 사랑을 담은 태도가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 거다. 인류애와 인간애가 떨어진다라는 말이 자주 들리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좀 더 사랑 아니아니 쿠쿡,,,사람답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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