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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Jul 04. 2018

아무튼 글쓰기 - 시니컬한 하루

키워드는 토익. 반은 사실, 반은 구라


퍼런 하늘이었다. 푸르다기엔 칙칙했고, 남색이라기엔 밝았다. 빅뱅의 블루라는 노래가 어울리는 그런 풍경이고, 나에게 오는 동물이 개인지 늑대인지 알아볼 수 없는 시간대였다. 시계는 새벽 5시를 가리켰고, 내 눈은 제대로 잠을 못 잔 탓인지 뻑뻑했다. 어차피 오늘은 토익 시험을 보는 날이라 일찍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불면의 밤을 보낼지 몰랐다. 


토익, 토익, 토익. 이 불면의 밤은 토익을 위한 밤이었을까. 불면의 밤을 보내고, 지루한 3시간을 버텨 850점을 받아야만 했다. 마치 이카루스처럼 끊임없이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지만, 그런 의지는 꺾인 날개처럼 접힌 지 오래다. 눈을 감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듯해서 리스닝 파일을 켰다. 다행히 시험장은 집 근처다. 부스스 일어나 츄리닝을 입고 패딩을 걸치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세상 모든 검은 패딩이 토익 시험장에 모인다. 마치 짜고 온 듯이 우리 모두 검은 츄리닝과 검은 패딩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이어폰을 귀에 꼽았다. 이제 와서 올라갈 점수라면 애초에 올라갔겠거니 싶지만 혹시나 모른다는 생각에 열심히 들어본다. 깊숙이 넣을수록 통기 점수가 올라가는 것처럼 귀에 푹 꽂았지만, 뇌에 닿지 않으니 별 소용이 없다. 괜히 옆을 둘러본다.


5줄로 정렬된 책상에 앉은 수험생의 표정은 다 똑같았다. 검은 뿔테 안경을 매만지는 사람, 추운 겨울을 녹일 수 있는 커피를 사 온 사람, 하염없이 화이트와 펜을 문지르는 사람까지. 모두들 지겹고 고통스러운 3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아니, 이 지옥 같은 취업준비생이라는 신분을 탈출하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뭐냐면, 마치 말린 먹태와 같은 눈빛이다. 무엇을 하고 싶냐 보다 얼른 탈출하고 싶다는 눈빛. 인생은 장기전이라는 어른들의 말에 코웃음 치고 썩은 미소만 나오는 눈빛. SNS는 접은 지 오래고, 비밀 블로그에 본인의 썩은 감정을 털어놓는 그런 눈빛 말이다. 모두가 이런 눈빛은 아니겠다만, 일요일 오전 8시부터 시험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의 눈빛에 생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 


감독관이 들어오고, 우리들은 각자 책을 집어넣었다. 중학교 1학년부터 28살이 된 지금까지 책을 집어넣는 동작은 같다. 책을 접고, 대충 책상 밑 서랍에 구겨 넣는다. 3시간이 지난 뒤에 구겨진 책을 피면서 가방에 넣고, 각자 다른 표정으로 교실을 나간다.


각자 다른 표정으로, 각자 어디를 가는 걸까 고민한다. 누구는 스터디를 하러, 누구는 밀린 잠을 채우러, 누구는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가만히 두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닭장 같은 곳에 채워 넣으니 모두들 먹태가 된다. 


집에 들어와 뉴스를 트니 난민, 페미니즘 시위 등 온갖 기사가 나온다. 기성세대는 요즘 사람들이 뉴스를 안 본다고 지적하고, 취업 준비엔 뉴스가 필요 없다. 세상 모든 고전보다 해커스 토익 모의고사가 도움되는 시대에 뭔 뉴스냐 싶다. 뉴스 볼 시간에 자소설 닷컴 뒤적이는 게 훨씬 낫다. 


문득 사회를 탓해본다. 이렇게 다원화된 세상에 우린 여전히 줄 세우기를 하고, 즐긴다.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 짜파게티가 보인다. 


일요일은 짜파게티였다. 분명히 그랬다. 내가 아직까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꾸던 초등학교 때까지. 아니 아니, 장래희망란에 사회운동가를 조심스레 적던 19살 때까지 말이다. 일요일은 짜파게티 요리사가 되는 날이었지만 이제 토익 시험 보는 날이다. 바뀐 건 없다. 그저 꿈이라는 단어가 미래에 대한 희망에서 오늘 꾼 꿈으로 바뀐 사실 말고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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