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님 말고
일본 지하철은 운영 주체가 다양하다. 그래서 복잡하다. 스이카 하나로 퉁칠 수 있는데, 노선마다 스이카를 팔지 않는 곳도 있더라. 당황스러웠음.
꿀꿀한 기분도 해소하고, 일본 온 기분도 내려고 나카메구로로 향했다. 커피와 음식 그리고 문화 공간이 이번 여행의 테마였다. 나카메구로는 가고자 한 커피가게가 참 많았다. 나카메구로는 신주쿠에서 한 20~30분 정도 떨어진 조용한 동네다. 외국인이 적고, 그곳에 사는 동네 주민들이 많았다. 한적했다.
차우진님이 말씀해주신 대로 걷다가 보이는 동네 서점이나 미술관엔 무작정 다 들렀다. 도시에서 고즈넉한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현대화의 중심지인 도쿄에서 이런 목가적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다. 63빌딩이나 남산 타워에서 우아하게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보다 강동구 동네 카페에서 조용히 커피 마실 때 도시인이구나라는 걸 깨닫는 나라는 변태에겐 잘 맞았다.
그렇게 이 동네 서점에 갔다. dessin이라는 곳이었는데, 주인장은 영어를 잘하지는 않으셨다. 자기 입맛에 맞는 중고 서적을 가져와 전시하는 공간이었다. 일본 동네 서점은 테마라기 보다 주인장의 큐레이션과 카리스마가 정말 크게 작용한다. 역시 자영업이나 스타트업이나 프리랜서나 개인 카리스마가 모든 곳에 배어들어야 개별 가게로, 유니크한 가게가 될 수 있다.
일본엔 이런 개인 샵들이 많았다. 옷, 소품, 서점 등등.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웠다. 옷가게에서 책을 팔았고, 서점에서도 옷을 팔았다. ‘보더리스’라는 단어가 머리 속을 꿰뚫었다. 직업에 경계가 없어졌듯이 내 가게가 다루고자 하는 ‘품목’의 경계도 사라졌다. 가게 주인장이 원하는, 바라는, 팔고자 하는, 고객이 샀으면 하는 물건을 두는 곳이 가게일뿐이다. 프리랜서의 진화버젼.
날씨가 안좋았다. 계속 흐렸다. 우중충했다. 일본의 회색빛 아파트와 잘 어울렸다. 일본은 고층아파트도 아직까지 복도식에 계단을 더한다. 특히 저렇게 건물 외곽 쪽으로 빠진 계단은 요즘 쉬이 보기 어려운데, 도쿄에선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우중충한 아파트와 주인장의 숨결이 가득한 개인 숍의 거리를 지나면 블루보틀 나카메구로점이 나온다. 여기를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도쿄에 있는 블루보틀 중에 가장 사람이 적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오면서도 “이게 여기에 왜 있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교통도 나빴고, 주변에 뭐가 있지도 않았다.
블루보틀은 커피 맛으로 유명하다. 종업원형한테 난 여기 처음 와봤고, 시그니쳐 메뉴 뭐야? 라고 물었고 추천 받은 게 이 라떼. 오를리언스였나. 이름은 잘 기억 안난다. 여튼 라떼 중 하나였다. 맛은 그저 그랬다. 블루보틀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제외하고 맛만으로 평가하면 안암에 있는 레스 이즈 모어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일본 카페에 오면서 일본 카페에선 노트북 하는 사람도 없고, 와이파이도 없고, 콘센트도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조금 긴장했다. 근데, 개뿔. 한국이랑 똑같더만.
나카메구로에서 츠타야 가덴을 보려고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참 많은 가게가 보였다. 프랜차이즈 천국인 한국과 반대였다. 일본은 개인 샵들의 천국이다. 잔, 그릇, 빵까지. 별의별 가게가 있고 별의별 큐레이션이 있다. 가게 UI가 참 좋았다. 들어왔을 때 1) 이 가게가 뭘로 유명하고 2) 밀고자 하는 제품이 뭐고 3) 모르면 추천해줄게 라는 프로세스가 완벽했다. 일본어를 아예 몰라도 잘만 이해할 수 있겠더라
블보 나카메구로점을 떠나 재호가 추천해준 트래블러즈 팩토리에 갔다. 문구를 다루는 개인샵이다. Customize your notebook이라는 슬로건에 맞게 책, 공책, 펜 등 여러 문구가 있다. 여행객이라는 컨셉에 맞게 여권 커버도 있었다. 무엇보다 비행기표, 여권 사진 등 다양한 여행 관련 상품으로 가게를 꾸며놨다. 누구든 들으면 가슴 설렐 만한 공항, 여행과 관련된 수많은 키워드를 눈으로 표시했다. 이런 힙스터들이 좋아할 만한 밥딜런까지.
음, 비쌌다. 그리고 종이 다이어리에 글을 쓰지 않고 글씨도 못 쓰는 내 성격을 고려하면 사는 게 손해였다. 물론 나중에 모노클 다이어리를 샀지만. 이런 종이 다이어리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생각났지만 사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묻어가는 게 아닐까. 하얀 종이 색깔이 바라듯이, 그때를 기억하는 나와 그때의 기억도 조금씩 바랄 거다.
일본와서 자영업에 대해 참 많이 생각했다. 굳이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소기업 운영 그리고 자영업에 대한 신묘한 원리가 곳곳에 배어들었다. 나아가 개인 계발에도 써먹을 수 있겠더라. 이를 좀 더 추상적으로 표현하자면, ‘개인 세계관의 확장과 운영’이었다. 오너라는 사람이 자신의 카리스마를 어떤 물질로 어떻게 표현하고, 이를 자본주의에 맞게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한 고민이 철저했다.
서비스업도 고민했다. 서로 절대 말을 나누지 않는 조리 종업원, 요리하는 종업원과 접객하는 종업원이 따로 있고 이들의 분업이 ‘효율’인 동시에 절대적인 ‘품질’을 추구한다는 철학까지. 일본 가게는 한국보다 비쌌지만, 이런 디테일과 서비스 비용을 고려하면 절대 비싸지 않았다. 쉽게 실패하지 않는 일본 가게 사용 경험이 도쿄, 그리고 일본 전체 사용 경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사용 경험의 끝판왕이자 이거로 장사하는 곳, 츠타야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