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의 경계

시간을 거스르는 자들

by TJ

카이의 왼손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아니, 투명해진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사진이 빛에 바래듯, 그의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소멸은 손목을 지나 팔뚝까지 번지고 있었고, 그 경계선에서는 미세한 빛의 입자들이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남은 거야."


엘레나의 목소리는 질문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대답하라는.


카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거울 속의 내가 말하길... 빠르면 반나절. 느려도 하루."


"폭풍의 요람까지는 최소 이틀이야."


"알아."


"알면서 말을 안 했어?!"


엘레나의 손에서 바람이 폭발했다. 통제되지 않은 감정의 바람이 주변의 나무들을 휘게 만들었다. 낙엽이 아닌 가지째 꺾여 날아갔다. 카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말했으면 네가 날 두고 갔을까?"


"......"


"안 갔겠지." 카이가 성한 오른손으로 엘레나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은 거야."


엘레나는 이를 악물었다. 분노와 슬픔과 공포가 뒤엉켜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울고 싶었지만 울 시간이 없었다. 소리치고 싶었지만 소리칠 대상이 없었다. 카이를 만든 크로노스는 이미 시간 속에 녹아들었고, 이 잔인한 운명을 설계한 자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방법이 있을 거야." 엘레나가 말했다.


"엘레나—"


"방법이 있어." 그녀의 눈이 불타올랐다. "시간의 조각이 있잖아. 크로노스의 힘이 담긴."


"시간의 조각은 데미안을 멈추기 위한—"


"네가 사라지면 데미안을 멈출 수도 없어!"


카이가 입을 다물었다. 엘레나의 말이 맞았다. 근원의 빛을 만들려면 둘이 함께해야 한다. 카이가 사라지면 모든 계획이 무너진다.


엘레나는 주저앉아 배낭을 뒤졌다. 시간의 조각, 폭풍의 심장, 진실의 파편. 세 유물이 각각의 빛을 내며 그녀의 손 위에 떠올랐다.


"시간의 조각은 시간을 다루는 힘이야."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크로노스가 시간을 되돌려 우리를 만들었다면, 이 조각에도 비슷한 힘이 남아 있을 수 있어."


"하지만 유물의 힘을 지금 쓰면 최종 결전에서—"


"전부를 쓰자는 게 아니야."


엘레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하늘학당에서 배운 것, 거울 차원에서 깨달은 것, 크로노스에게서 물려받은 것. 그 모든 지식이 하나의 실타래로 엮이기 시작했다.


"시간의 조각을 쪼개는 거야."


카이의 눈이 커졌다.


"유물을... 쪼갠다고?"


"크로노스가 자신을 시간의 직물에 녹여넣었잖아. 그건 하나의 존재를 무수히 많은 조각으로 나눈 거야." 엘레나의 목소리에 확신이 실리기 시작했다. "같은 원리로 시간의 조각에서 아주 작은 파편 하나만 떼어내는 거야. 네 존재를 붙잡아둘 수 있을 만큼만."


"그게 가능해?"


"모르겠어." 엘레나가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해야 해."




엘레나는 땅 위에 원을 그렸다.


바람으로 그린 원이었다.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공기의 흐름으로 만든 마법진. 하늘학당에서 배운 기초 결계술과 거울 차원에서 터득한 차원 조작술을 결합한 것이었다.


"가운데 앉아."


카이가 원의 중심에 앉았다. 그의 왼팔은 이제 어깨까지 투명해져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엘레나가 시간의 조각을 양손으로 감쌌다. 은빛 빛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차가웠다. 시간의 본질이 원래 차가운 것인지, 아니면 크로노스의 슬픔이 스며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집중해.'


바람이 속삭였다. 과거의 바람부름꾼들의 목소리.


'시간은 강물과 같아. 흐름을 바꾸려 하지 마. 흐름에서 한 방울만 떠내.'


엘레나는 눈을 감았다. 시간의 조각 속으로 의식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보았다.


시간의 내부는 강이 아니었다. 바다였다. 끝없이 넓고 깊은, 은빛 바다. 수면 위로 무수한 장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


그 바다 한가운데서, 엘레나는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크로노스.


아니, 크로노스였던 것. 소년의 형체는 이미 사라지고, 은빛 빛의 그물처럼 바다 전체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 그물의 중심에서 희미하게 맥동하는 것이 있었다. 심장처럼.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크로노스의 마지막 조각.


'...엄마?'


목소리가 아니었다. 파동이었다. 시간의 파동으로 전해지는 감정.


엘레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시간의 바다 속에서도 눈물은 흘러내렸다.


'크로노스. 아빠가 사라지고 있어.'


파동이 흔들렸다. 슬픔과 공포와 죄책감이 뒤섞인 파동.


'...내 잘못이에요. 아빠를 만들 때 시간이 부족해서... 제 존재의 일부를 아빠에게 줬는데, 그게 충분하지 않았어요.'


'고칠 수 있어?'


긴 침묵. 시간의 바다가 잔잔해졌다.


'방법이 하나 있어요. 하지만...'


'뭐든 말해.'


'시간의 조각에서 파편을 떼어내는 건 엄마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시간의 조각은 시간의 본질이니까. 바람의 힘으로는 건드릴 수 없어요.'


'그럼 어떻게—'


'제가 도와줄게요.'


파동이 강해졌다. 크로노스의 마지막 조각이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걸 하면 저는... 진짜로 사라져요. 시간의 직물에 녹아든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 잔향으로 남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엘레나의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남편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 아들의 마지막 흔적마저 지우는 것이었다.


'크로노스, 안 돼. 다른 방법을—'


'없어요, 엄마.' 파동이 따뜻해졌다. 미소 짓는 것 같았다. '그리고 괜찮아요. 저는 처음부터 이걸 위해 남아 있었던 거니까.'


'무슨 소리야.'


'아빠가 불완전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그래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시간 속에 남았던 거예요. 이 순간을 위해서.'


엘레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시간의 바다가 그녀의 눈물로 출렁였다.


'엄마. 부탁이 하나 있어요.'


'......뭐든.'


'저를 기억해주세요.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는 거니까.'




엘레나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양손 사이에서 시간의 조각이 갈라지고 있었다.


은빛 빛이 폭발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이 숲 전체를 삼켰다. 카이가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울부짖었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빛 속에서 한 소년의 형체가 나타났다.


크로노스.


투명하고 희미했지만, 분명히 그 아이였다. 은빛 머리카락, 엘레나의 눈과 카이의 턱선을 가진 소년.


크로노스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수천 개의 빛 입자로 흩어졌다. 그 입자들이 시간의 조각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파편을 감싸며 카이에게로 날아갔다.


빛이 카이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투명해지던 카이의 왼팔이 다시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손끝부터,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빛이 사그라들었다.


숲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엘레나의 손에는 원래보다 조금 작아진 시간의 조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반딧불처럼 작은 빛 하나가 떠 있었다. 크로노스가 남긴 마지막 파편.


엘레나가 그 빛을 손으로 감쌌다. 따뜻했다. 아이의 체온 같았다.


"...고마워." 엘레나가 속삭였다. "반드시 기억할게."


빛이 한 번 깜빡이더니, 엘레나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카이가 자신의 왼손을 바라봤다. 쥐었다 폈다. 단단했다. 실체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카이가 물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가슴이 아팠다. 무언가를 잃은 것 같은,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


엘레나는 한동안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크로노스가... 너를 살렸어."


카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자신의 마지막 존재를 너에게 줬어." 엘레나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담담했다. 울 만큼 울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크로노스는... 어디에도 없어."


카이가 무릎을 꿇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깨가 떨렸다.


"왜... 왜 그런 짓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대." 엘레나가 카이 옆에 앉았다. "네가 불완전하다는 걸 알고, 이 순간을 위해 남아 있었다고."


"바보 같은 놈..."


"누구 닮은 거겠지."


카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엘레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말없이. 숲의 바람만이 그들 사이를 오갔다. 그 바람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소년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마 착각이었을 것이다.


아마.




해가 기울기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은 다시 일어섰다.


시간은 벌었지만,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시간의 조각은 작아졌고, 폭풍의 요람까지의 거리는 여전히 멀었다. 그리고 데미안은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었다.


"경로를 바꿔야 해." 엘레나가 말했다.


"바꾼다고?"


"원래 계획대로면 이틀이 걸려. 하지만 시간의 조각이 작아진 지금, 근원의 빛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의 힘이 남아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그럼 어떻게—"


"지름길이 있어." 엘레나의 눈이 어두워졌다. "실비아 님이 말하지 않은 길."


카이가 엘레나를 바라봤다.


"거울 차원에서 봤어." 엘레나가 말했다. "폭풍의 요람으로 가는 또 다른 길. 시공간의 균열을 직접 통과하는 길."


"그건 데미안의 영역 한가운데를 뚫고 가는 거잖아."


"맞아."


"미쳤어?"


"아마도."


카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길고 깊은 한숨. 그리고 검을 뽑았다.


"좋아. 미친 짓은 익숙하니까."


엘레나가 웃었다. 전쟁 전야에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카이 옆에서는 가능했다.


엘레나가 손을 들어 허공을 갈랐다. 바람이 아닌 다른 힘—진실의 파편에서 빌려온 차원의 힘—이 공간을 찢었다. 균열 너머로 검은 풍경이 보였다. 하늘도 땅도 없는, 순수한 어둠의 세계.


데미안의 영역.


"들어가면 돌아올 수 없을 수도 있어." 엘레나가 말했다.


"돌아올 필요 없지." 카이가 말했다. "우리가 가는 곳이 끝이니까."


두 사람이 균열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데미안의 영역은 소리가 없었다.


바람도, 숨소리도, 심장 소리도 삼켜버리는 절대적인 침묵. 엘레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람을 느낄 수 없었다. 평생 곁에 있던 친구가 사라진 것 같았다. 공허함이 폐부를 파고들었다.


"바람이 없어." 엘레나가 속삭였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몇 걸음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어둠에 흡수됐다.


"내 검도." 카이가 칼날을 바라봤다. 태양석의 힘을 담고 있던 검이 완전히 빛을 잃어 평범한 쇳덩이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힘이 억제됐다. 데미안의 어둠이 다른 모든 힘의 근원을 차단하고 있었다.


"유물은?"


엘레나가 확인했다. 폭풍의 심장—미약하지만 맥동하고 있었다. 시간의 조각—거의 빛을 잃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진실의 파편—오히려 이곳에서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진실의 파편이 반응하고 있어." 엘레나가 말했다. "이 어둠 속에서 진실이 더 선명해지는 건가..."


"길을 안내하는 거 아닐까."


카이의 말이 맞았다. 진실의 파편이 특정 방향으로 더 강하게 빛났다. 두 사람은 그 빛을 따라 걸었다.


어둠 속을 걷는 것은 물속을 걷는 것과 비슷했다. 저항이 있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어둠이 밀어냈다. 돌아가라고. 여기는 네가 올 곳이 아니라고.


그리고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포기해.'


처음에는 속삭임이었다.


'너희는 복제품이야. 가짜가 세계를 구한다? 웃기지도 않아.'


'원본도 실패했는데, 열화 복제품인 너희가 뭘 할 수 있겠어.'


'크로노스는 헛된 희망을 품고 사라졌어. 너희 때문에.'


엘레나의 걸음이 느려졌다.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이성으로는 데미안의 술책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감정은 이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


'네가 진짜라고? 거울 속의 네가 진짜 너야. 넌 그림자에 불과해.'


"닥쳐." 엘레나가 이를 악물었다.


'카이는 크로노스의 희생으로 겨우 붙어 있는 존재야. 네가 그를 끌고 다니는 거지. 짐이야, 짐.'


"닥치라고!"


엘레나의 외침에 진실의 파편이 강하게 빛났다. 빛이 주변의 어둠을 밀어냈다. 목소리가 잠시 물러났다.


카이가 엘레나의 손을 잡았다.


"듣지 마."


"...알아. 알고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카이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저 목소리가 하는 말 중에 맞는 것도 있어."


엘레나가 놀라서 카이를 바라봤다.


"우리는 복제품이야. 그건 사실이지." 카이가 말했다. "크로노스는 우리 때문에 사라졌어. 그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카이가 엘레나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사실이라고 해서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


어둠 속에서 카이의 눈이 빛났다. 검도 잃고, 힘도 잃고, 존재의 기반마저 빌려온 것이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어떤 어둠도 삼킬 수 없었다.


"우리가 복제품이어도 이 감정은 진짜야. 크로노스가 사라졌어도 그 아이의 선택은 진짜였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네 손을 잡고 있는 이 감각도 진짜야."


엘레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 어둠의 세계에서도 눈물은 따뜻했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흐리다면." 카이가 말했다. "우리가 그 경계를 지워버리면 돼."


진실의 파편이 폭발하듯 빛났다. 카이의 말에 응답하듯, 유물이 스스로 공명했다. 빛이 어둠을 갈랐다. 길이 열렸다.


그리고 그 길 끝에, 무언가가 보였다.


거대한 소용돌이.


하늘과 땅을 잇는, 아니 하늘과 땅 자체인 거대한 폭풍. 검은 바람과 흰 번개가 뒤엉킨 혼돈의 기둥.


폭풍의 요람.


"도착했어." 엘레나이 숨을 들이쉬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곳. 세계가 태어난 곳.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날 곳.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어둠이 맥동했다. 심장처럼. 규칙적으로. 강력하게.


데미안이 거기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카이가 엘레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저기 봐."


소용돌이의 가장자리, 어둠과 빛이 충돌하는 경계선에 두 개의 형체가 매달려 있었다. 사슬처럼 생긴 어둠의 끈에 묶인 채, 의식을 잃고 떠 있는 두 사람.


여자의 얼굴은 엘레나와 똑같았다.

남자의 얼굴은 카이와 똑같았다.


원본.


원본 엘레나와 원본 카이가 거기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그들이. 크로노스가 그들의 죽음 이후에 복제품을 만들었다고 했던 그들이. 살아 있었다.


아니—살아 있는 것인지, 죽어 있는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소멸한 것도 아니었다. 어둠의 사슬이 그들을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에 묶어두고 있었다.


"데미안이 잡고 있었던 거야." 엘레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원본의 우리를... 죽이지도 않고, 살리지도 않고."


"왜?"


"먹이."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속삭임이 아니었다. 또렷하고 깊은, 대지를 울리는 목소리.


"오래 기다렸다."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어둠이 응축됐다.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한 그림자가 인간의 윤곽을 만들었다.


데미안.


그는 아름다웠다. 그것이 가장 소름 끼치는 부분이었다. 칠흑의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 그리고 별이 죽을 때의 빛을 담은 눈. 악의 화신이라기보다는 타락한 신에 가까운 존재.


"원본의 영혼은 좋은 양분이었지." 데미안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복제품의 영혼은 어떤 맛일까. 꽤 궁금했어."


엘레나가 진실의 파편을 들어 올렸다. 유일하게 이 영역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유물.


"우리가 왜 왔는지 알잖아."


"근원의 빛?" 데미안이 웃었다. 그 웃음이 어둠을 진동시켰다. "만들어 봐. 내 앞에서. 네가 그릇이 되어 소멸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계획이 바뀌었어." 카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릇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야."


데미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둘?"


"그리고 하나 더." 엘레나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어둠의 사슬에 묶인 원본들에게로 향했다. "넷이면 더 좋겠지."


데미안의 미소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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