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 속에서 굳건하다
시간의 균열이 닫힌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엘레나는 무릎을 꿇은 채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크로노스가 사라진 곳, 그가 마지막으로 서 있던 바로 그 지점. 공기는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시간의 잔향이 피부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손끝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그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미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엘레나."
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서. 하지만 엘레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차가운 돌바닥을 움켜쥐고 있었고, 손톱 밑으로 먼지와 돌가루가 파고들었다.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녀를 현실에 붙잡아두는 닻 같았다.
크로노스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가 남긴 진실, 그 무게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와 카이는 원본이 아니었다. 복제된 존재. 진짜 엘레나와 진짜 카이는 이미 오래전에 데미안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크로노스는—그들의 아들은—부모를 되살리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 그들을 다시 만들어낸 것이었다. 같은 기억, 같은 감정, 같은 힘을 가진 채. 하지만 원본은 아닌 채로.
"엘레나, 제발." 카이가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에 갈라진 틈이 있었다. 마치 유리에 금이 간 것처럼, 겉으로는 온전해 보이지만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 소리였다.
엘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이의 얼굴이 보였다. 시간의 균열을 겪으며 더 깊어진 주름, 한쪽 관자놀이를 따라 내려온 은빛 머리카락.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그 눈빛만은 여전히 그녀를 향해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뭔지 알잖아." 엘레나가 말했다. 목소리는 평평했다. 감정을 담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우리는 진짜가 아니야, 카이. 크로노스가 만들어낸 복제품이야. 원본의 기억을 이식받은, 그림자 같은 존재."
카이는 아무 말 없이 그녀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이 엘레나의 손 위에 놓였다. 차가웠다. 그의 손도, 그녀의 손도. 하지만 그 접촉은 분명했다. 살아 있는 것의 무게가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 건데?" 카이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네가 느끼는 이 고통, 이 분노, 이 두려움—그게 가짜야? 네가 스톰엔드에서 바람을 처음 불러일으켰을 때의 그 전율, 마라와 헤어지며 흘린 눈물, 이요라 마스터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그 결심—그것들이 전부 거짓이었어?"
엘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진짜였다는 것을. 적어도 그녀에게는. 하지만 그것이 원본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빌려온 감정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바람이 불었다.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엘레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했다. 바람의 언어. 스카이 아카데미에서 처음 배웠던 그것. 바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이요라 마스터가 말했었다. 바람은 있는 그대로를 전할 뿐이라고.
엘레나는 그 바람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크로노스의 잔향이 아니었다. 시간의 메아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더 오래된 것, 더 근원적인 것이었다. 대지의 정령들이 은빛 날개를 펼치던 시절부터 이어져 온, 세상의 첫 새벽에 태어난 바람 그 자체의 목소리였다.
너는 너다.
바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갑고 뜨거운 눈물이었다.
스카이 아카데미는 폐허에 가까웠다. 시간의 균열이 열리고 닫히는 과정에서 건물 곳곳에 금이 갔고, 한때 고대 마법사들의 영광을 간직하던 돌벽들은 무너져 내려 잔해가 되어 있었다. 훈련장의 돌기둥들은 반쯤 부서진 채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고, 푸른 풀밭은 검게 그을린 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늘에 떠 있던 도시의 일부가 기울어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고, 멀리서 돌덩이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간간이 울려 퍼졌다.
생존한 학생들과 마법사들이 중앙 광장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혼란, 그리고 지독한 피로가 새겨져 있었다. 부상자들이 곳곳에 누워 있었고, 치유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력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타는 냄새와 먼지, 그리고 피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이요라 마스터가 엘레나와 카이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피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크로노스가 남긴 정보를 정리해야 해." 이요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긴박함이 숨어 있었다. "데미안이 폭풍의 심장을 손에 넣으려 하고 있어. 그가 그것을 차지하면, 이 세계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질 거야. 시간의 흐름마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돼."
"폭풍의 심장."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그 이름은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울리게 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반응하는 듯했다.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고, 바람이 그녀의 주위를 한 바퀴 감아 돌았다.
카이가 말했다. "크로노스는 폭풍의 심장이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다고 했어. 알레리아 대륙의 끝, 세계의 경계선. 그곳에 가려면—"
"스톰엔드를 지나야 해." 엘레나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있었지만, 동시에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담겨 있었다. "내 고향을. 다시."
침묵이 흘렀다. 바람조차 멈춘 듯한 정적이었다. 이요라 마스터는 엘레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엘레나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엘레나, 네가 이 여정을 떠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어." 이요라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크로노스가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단다."
엘레나의 심장이 멈칫했다. "뭔데요?"
이요라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것은 엘레나가 이요라에게서 처음 본 동요였다. 언제나 침착하고 단단했던 이요라 마스터가 흔들리고 있었다.
"폭풍의 심장은 단순한 마법의 원천이 아니야." 이요라가 말했다. "그것은 이 세계를 창조한 고대인들이 남긴 마지막 유산이야. 세상의 첫 새벽에, 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낸 그 힘의 핵심. 그리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윈드콜러뿐이다." 엘레나가 완성했다.
이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야. 폭풍의 심장을 다루려면, 다루는 자는 자신의 존재를 대가로 치러야 해. 원본이든 복제든, 그것은 상관없어. 폭풍의 심장은 다루는 자의 본질을 흡수하고, 그 힘으로 세계의 균형을 재편해. 다시 말해서—"
"사라진다는 거죠." 엘레나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담담했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니, 어쩌면 정말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그녀에게 속삭여왔던 것들, 꿈속에서 반복되던 환영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던 불안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을지도.
카이가 벌떡 일어섰다. "그건 안 돼!" 그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주변의 학생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반드시. 크로노스가 우리를 만든 이유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잖아. 그런데 결국 같은 결말이라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카이의 분노는 진심이었다. 그의 주먹은 하얗게 질릴 만큼 꽉 쥐어져 있었고, 턱은 단단하게 다물어져 있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그의 분노 뒤에 숨겨진 것을 보았다. 두려움.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은 엘레나의 가슴에도 똑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카이." 엘레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부드럽게, 그러나 흔들림 없이. "앉아."
카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전사 왕자, 왕국의 수호자, 태양석을 찾아 떠났던 용맹한 남자. 그가 지금 눈물을 참고 있었다. 엘레나는 그 모습이 가슴을 찢는 듯 아팠지만, 동시에 그것이 그들이 진짜라는 증거라고 느꼈다. 복제품이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그림자가 이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 엘레나가 말했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을 거야. 우리가 원본이든 아니든, 이 세계는 진짜야. 이 바람은 진짜야. 스톰엔드의 사람들, 마라, 할머니—그들은 진짜야. 그리고 그들을 지키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날 밤, 엘레나는 혼자 아카데미의 무너진 탑 꼭대기에 올랐다. 반쯤 부서진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올라간 그곳에서, 알레리아 대륙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하늘에 떠 있는 도시들이 달빛 아래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멀리 바다가 울부짖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잊혀진 마법의 힘으로 울부짖는 바다. 그 소리는 슬프면서도 장엄했다.
엘레나는 탑의 가장자리에 앉아 다리를 허공에 늘어뜨렸다. 바람이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부드럽게,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그녀는 눈을 감고 바람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은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스톰엔드의 현재 상황—마을은 점점 더 거세지는 폭풍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라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대피소를 만들고 있다는 것. 할머니가 여전히 건강하지만,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데미안의 그림자가 스톰엔드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
엘레나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데미안에 대한 분노, 이 상황을 만든 모든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
"내가 더 강했더라면."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더 강했더라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야."
엘레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데미안이—아카데미의 데미안이, 적이 아닌 동료였던 그 데미안이—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죄책감, 분노, 그리고 결의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데미안." 엘레나가 말했다. 경계심이 본능적으로 올라왔지만, 그녀는 그것을 억눌렀다. 이 데미안은 적이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은.
데미안은 천천히 다가와 엘레나 옆에 앉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달빛 아래 펼쳐진 세계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흘렀지만, 그것은 불편한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듯한, 무언의 대화 같았다.
"나도 들었어." 데미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크로노스의 이야기. 네가 복제된 존재라는 것. 그리고 폭풍의 심장에 대한 것도."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래서 말인데." 데미안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나는 네가 처음 아카데미에 왔을 때, 솔직히 네 능력을 의심했어. 기억나지? '바람 마법이라... 정말 대단한 재능일까?' 그때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엘레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기억해. 꽤 얄미웠어."
데미안도 쓸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 네가 여기까지 온 것, 네가 겪어온 모든 것을 보면서 깨달았어. 너는 진짜야, 엘레나. 원본이든 복제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네가 바람과 하나가 되는 그 순간, 네가 사람들을 지키려고 몸을 던지는 그 순간—그건 누구도 만들어낼 수 없는 거야."
엘레나는 그의 말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다시 차올랐지만, 이번에는 삼키지 않았다. 그냥 흘러내리게 두었다.
"고마워, 데미안." 그녀가 말했다.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할 건 없어. 오히려 내가 해야 할 말이 있어." 그는 엘레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거기에는 무언가 무거운 결심이 담겨 있었다.
"뭔데?" 엘레나가 물었다.
"나도 같이 갈 거야." 데미안이 말했다.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폭풍의 심장이 있는 곳으로."
엘레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이건 네 싸움이 아니야, 데미안. 위험해."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내 싸움이 아니라고? 저 바깥에서 이 세계를 집어삼키려는 자가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 같은 얼굴을. 다른 시간선의 나, 다른 선택을 한 나. 그자가 이 세계를 파괴하려 하는데, 내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어."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수치심이 뒤섞여 있었다. 엘레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데미안이 짊어지고 있는 무게를. 자신의 다른 버전이 세계의 적이라는 사실이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데미안..." 엘레나가 말했다.
"동정은 필요 없어." 데미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내 선택으로 여기 있는 거야. 그리고 내 선택으로 싸울 거야. 그자가 나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내가 같은 길을 걸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마치 데미안의 결의에 응답하듯, 강하고 날카롭게. 엘레나의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탑의 잔해가 덜컹거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 속에서, 폐허 위에서, 그들은 굳건히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엘레나는 중앙 광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 섰다. 카이가 그녀의 오른쪽에, 데미안이 왼쪽에 서 있었다. 이요라 마스터는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생존한 학생들과 마법사들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 시선 속에는 두려움과 기대, 의심과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엘레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폐를 채웠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규칙적이고 단단한 박동. 복제된 심장이든 아니든, 그것은 뛰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여러분 모두 알고 있을 거예요." 엘레나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작았지만, 바람이 그것을 실어 광장 구석구석까지 전달했다. "이 세계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데미안이—시간의 저편에서 온 데미안이—폭풍의 심장을 손에 넣으려 하고 있어요. 그가 성공하면, 이 세계는 끝이에요. 스톰엔드도, 스카이 아카데미도, 하늘에 떠 있는 도시들도, 모든 것이."
광장에 웅성거림이 퍼졌다. 두려움에 질린 속삭임들이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하지만." 엘레나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저는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갈 거예요. 폭풍의 심장을 찾아서, 데미안보다 먼저 그것에 도달할 거예요. 그리고 이 세계의 균형을 되찾을 거예요."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카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나도 간다." 카이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왕자의 위엄과 전사의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태양석의 진정한 힘이 희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도망치고 싶었어. 하지만 이제는 알아. 진정한 희생은 도망치지 않는 것이야. 맞서는 것이야."
데미안이 그 옆에 섰다. "나도 함께한다." 그는 짧게 말했다. 하지만 그 짧은 말 속에 담긴 무게는 누구보다 무거웠다.
이요라 마스터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미소를 지었다. "너희가 자랑스럽구나."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기억해라. 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이 아니야. 서로를 믿는 것이야. 바람은 혼자서는 폭풍이 될 수 없어. 여러 갈래의 바람이 하나로 모일 때, 비로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는 거란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카이와 데미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거기에는 더 이상 의심이 없었다. 두려움은 있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결의가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부드럽지 않았다. 강하고, 거칠고, 야생적이었다. 마치 세상의 첫 새벽에 불었던 그 바람처럼. 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낸, 생명을 탄생시킨 그 원초적인 바람. 엘레나는 그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눈이 빛났다. 손끝에서 바람이 소용돌이쳤고, 발밑의 돌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녀는 폭풍부름꾼이었다. 원본이든 복제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여기 서 있다는 것이었다. 혼란 속에서, 폐허 위에서, 굳건하게.
엘레나는 스톰엔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고향. 그녀의 시작점. 그리고 이제, 마지막 여정의 출발점.
"가자." 엘레나가 말했다. 그 한마디에 바람이 응답했다. 광장의 먼지가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치솟았고, 깃발들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하늘 위의 구름이 갈라지며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내렸다.
세 사람은 빛을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 이요라 마스터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돌아와라. 반드시."
엘레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리고 바람은 그녀의 대답을 이요라에게 전해주었다.
반드시.
폭풍부름꾼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혼란 속에서 굳건히,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세계의 끝을 향해. 소용돌이의 심장을 향해.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