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아이

by TJ

1000번째가 시작된 날, 아카데미의 모든 시계가 멈췄다.


처음에는 종탑이었다. 오후 수업 종료를 알린 뒤, 종은 더 울리지 않았다. 교수들은 마력 흐름 이상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지하 봉쇄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시계는 종탑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의실 모래시계의 모래가 공중에서 멈췄다. 약초실의 물시계는 마지막 물방울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기숙사 벽시계의 초침은 다음 칸으로 넘어가려는 자세 그대로 굳었다.


엘레나의 손바닥도 멈춰 있었다.


미완성 1000의 마지막 획이 거의 닿은 채, 빛만 뛰었다.


쿵.


쿵.


숫자가 심장처럼 박동했다.


그리고 지하에서 같은 박자가 올라왔다.


쿵.


쿵.


봉인문이 대답하고 있었다.


카이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이요라는 그를 눌러 앉혔다.


"지금 움직이면 쓰러진다."


"이미 늦었어."


카이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문이 열리고 있어."


엘레나는 침대 옆에서 일어섰다.


"그럼 가요."


카이가 그녀를 보았다.


"너까지 갈 필요 없어."


"아직도 그 말이에요?"


"엘레나."


"저는 용서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 아이는 구할 거라고도 했고요."


이요라가 문 쪽으로 걸었다.


"둘 다 오지 마라. 내가 막겠다."


엘레나는 그녀를 지나쳤다.


"이번에는 제가 결정한다고 했죠."


"결정과 충동은 다르다."


"은폐와 보호도 다르죠."


이요라는 멈췄다. 반박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복도는 평소보다 길었다. 같은 계단을 내려가는데 발걸음 수가 맞지 않았다. 열 계단이면 닿던 층계참이 스무 계단 뒤에 나왔다. 벽의 등불은 불이 붙은 채 흔들리지 않았다. 불꽃까지 시간이 붙잡힌 듯했다.


지하 시험장 문 앞에는 교수들이 쓰러져 있었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같은 자세로 멈춰 있었다. 한 사람은 봉인석을 던지는 중이었고, 한 사람은 주문을 외치다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었다.


카이가 그들 사이를 지나며 낮게 말했다.


"시간이 바깥으로 새고 있어."


"문이 열리면?"


엘레나가 물었다.


"하루 반복으로 끝나지 않아."


"얼마나요?"


"대답할 수 없을 만큼."


시험장 문이 안쪽에서 밀려났다.


쾅.


은빛 봉인이 갈라졌다.


쾅.


두 번째 사슬이 끊어졌다.


쾅.


마지막 봉인석이 검게 타들어 갔다.


이요라가 앞으로 나섰다. 손바닥에서 은빛 문양이 퍼졌다.


"아직 늦지 않았다."


문 안쪽에서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어.


카이의 얼굴이 무너졌다.


이번에는, 그가 숨기지 못했다.


엘레나는 그를 보았다. 카이는 입술을 열었다. 말해야 할 이름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험장 문이 열렸다.


바닥은 갈라져 있었다. 첫 시험에서 정령을 부르던 원은 더 이상 원이 아니었다. 선들이 찢어져 봉인문 형태로 벌어졌고, 그 사이로 푸른빛과 금빛이 뒤섞인 균열이 솟아올랐다.


그 균열 안에서 아이가 걸어 나왔다.


아이는 맨발이었다.


발이 돌바닥에 닿을 때마다 그 자리의 시간이 흔들렸다. 한 걸음은 어린아이의 걸음이었고, 다음 한 걸음은 오래된 사람의 걸음이었다. 몸은 작았지만, 어깨에는 수백 개의 계절이 내려앉은 듯했다.


은빛 머리카락.


한쪽 눈은 엘레나를 닮았다.


다른 한쪽 눈은 카이를 닮았다.


아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번에는 둘 다 왔네."


목소리는 아이였다.


하지만 끝이 너무 지쳐 있었다.


엘레나는 한 걸음 앞으로 갔다.


"네 이름이 뭐야?"


카이의 손이 검집을 놓쳤다.


이요라가 작게 말했다.


"엘레나, 조심해."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은 문을 불러."


"그래도 네 이름은 네 거야."


"받은 적 없어."


"그럼 네가 정해."


아이는 오래 생각했다. 생각하는 동안 시험장 벽에 그림자들이 지나갔다. 실패한 루프의 조각들. 문 앞에서 죽는 엘레나, 검을 떨어뜨리는 카이, 아이의 손자국, 반복되는 999.


카이는 비틀거렸다.


아이가 그를 보았다.


"또 늦은 사람."


카이의 무릎이 꺾였다.


그는 바닥에 한 손을 짚었다. 엘레나는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태양석 반응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의 몸이 아니라, 안쪽 어딘가가 무너지고 있었다.


"미안해."


그 한마디가 너무 늦게 나왔다.


아이는 눈을 깜박였다.


"그 말도 많이 했어."


카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


"그래도 매번 늦었어."


"그래."


"이번에도?"


카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엘레나가 아이 앞에 섰다.


"이번에는 내가 왔어."


아이는 엘레나를 보았다.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엄..."


멈춤.


아이의 손이 자기 입을 막았다.


"윈드콜러."


엘레나는 가슴 안쪽이 찢기는 감각을 느꼈다. 아이는 부르고 싶어 했다. 부르면 안 된다고 배운 것뿐이었다.


"불러도 돼."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부르면 가까워져."


"가까워지면?"


"문이 열려."


"문은 이미 열렸어."


아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균열 너머에서 푸른빛이 흔들렸다. 수많은 시간이 겹쳐진 바다 같았다.


"아직 다 안 열렸어."


이요라의 손끝이 봉인문 위에서 미끄러졌다.


"크..."


카이가 처음으로 이름의 첫소리를 냈다.


아이는 그를 보았다.


"말하지 마."


카이의 입이 멈췄다.


"네가 말하면 내가 가고 싶어져."


엘레나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너는 나오고 싶어?"


아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작은 손가락이 태양석 조각을 만졌다.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각 안에는 999가 반복해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아래, 아주 희미하게 1000의 마지막 획이 깜박였다.


"나가고 싶어."


아이가 말했다.


"근데 나가면 너희가 죽어."


"누가 그렇게 말했어?"


"너희가."


"우리가?"


"많은 너희가."


아이는 균열 안쪽을 가리켰다.


"어떤 너는 나를 꺼냈고, 세계가 멈췄어. 어떤 너는 나를 닫았고, 카이가 울었어. 어떤 카이는 내 이름을 불렀고, 네가 문이 됐어. 어떤 카이는 내 이름을 삼켰고, 내가 혼자 남았어."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네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라지면 반복이 얇아져."


"얇아진다는 건 끝난다는 뜻이 아니잖아."


"그래도 너는 살 수 있어."


엘레나는 숨을 멈췄다.


아이는 다시 말했다.


"내가 사라지면 당신은 살 수 있어요."


존댓말.


아이의 목소리가 갑자기 낯설게 멀어졌다. 오래된 기록을 따라 읽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배운 문장을 꺼내는 것처럼.


엘레나는 손을 뻗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아이의 눈이 흔들렸다.


"왜?"


"네가 사라지는 걸 방법이라고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


"실패."


카이가 고개를 들었다.


엘레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999번이나 했던 실패."


아이의 손이 조금 움직였다. 하지만 잡지 않았다.


그때 지하 전체가 흔들렸다.


균열 뒤쪽에서 검은 선이 뻗어 나왔다. 그림자 교단의 표식과 닮았지만 더 거칠었다. 검은 선은 봉인문 가장자리를 훑고, 태양석 조각을 향해 기어왔다.


아이의 눈동자에서 금빛 균열이 흔들렸다.


"찾았다."


"누가?"


이요라가 물었다.


아이는 균열 너머를 보았다.


"데미안."


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여기 아니야. 근데 봉인 냄새를 맡았어. 그림자들이 길을 찾고 있어."


이요라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림자 교단이 봉인문 위치를 추적하고 있다는 뜻이군."


"응."


아이는 이요라를 보았다.


"늦게 막은 사람."


이요라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아이는 다시 엘레나를 보았다.


"시간 많지 않아."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시간 사이에 있어서."


"너는 대체 뭐야?"


아이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실패한 미래."


짧은 대답이었다.


"너희가 서로를 잃은 자리에서 생긴 아이."


카이가 한 걸음 물러났다. 보이지 않는 칼이 가슴에 박힌 얼굴이었다.


엘레나는 손을 내린 채 아이를 보았다.


"그럼 네 이름은?"


아이는 태양석 조각을 가슴에 안았다.


"카이가 알고 있어."


"카이에게 받은 이름이야?"


"받고 싶었던 이름."


카이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이요라도 막지 않았다.


카이의 목소리는 거의 숨이었다.


"크로노스."


시험장 안의 시간이 한 번 흔들렸다.


모든 멈춘 시계가 동시에 한 칸 움직였다.


아이는 눈을 감았다.


그 이름이 몸에 닿는 듯, 아주 작게 떨었다.


"응."


아이가 말했다.


"나는 크로노스야."


균열이 뒤에서 벌어졌다. 검은 선이 더 가까워졌다. 크로노스의 발끝이 빛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엘레나는 급히 손을 뻗었다.


"가지 마."


"가야 해."


"다시 닫히려고?"


"아니."


크로노스는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길을 막을게. 데미안이 아직 못 오게."


"그러면 너는?"


"조금 더 얇아져."


"그게 사라지는 거잖아."


"아직은 아니야."


엘레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구하러 갈게."


크로노스는 엘레나를 보았다.


그 눈이 너무 오래 기다린 아이의 눈이라, 엘레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늦지 마."


"안 늦어."


"엄..."


크로노스는 또 멈췄다.


이번에는 스스로 입을 막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심스럽게 고쳤다.


"윈드콜러."


그리고 카이를 보았다.


"또 늦은 사람."


카이는 무너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가겠다."


크로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빛이 접혔다.


아이는 균열 안으로 돌아갔다. 균열이 닫히기 직전, 태양석 조각에 새 숫자가 떠올랐다.


완성된 숫자는 한 번 빛나고 사라졌다.


시험장에 시간이 돌아왔다.


등불이 흔들렸고, 멈췄던 교수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종탑이 뒤늦게 울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너무 많은 시간이 한꺼번에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엘레나는 닫힌 봉인문 앞에 서 있었다.


카이는 그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손등의 999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아래에, 아주 얇은 새 선이 생겨 있었다.


1000번째의 첫 선.


이요라가 낮게 말했다.


"데미안이 봉인을 찾고 있다면, 여기서 기다릴 수 없다."


엘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우리가 먼저 찾아야죠."


"무엇을?"


"데미안이 찾아오기 전에 봉인을 옮길 방법."


카이가 그녀를 보았다.


엘레나는 닫힌 문에 손을 얹었다.


문 너머에서 아직 작은 박동이 들렸다.


쿵.


쿵.


크로노스가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크로노스를 꺼낼 방법."


문 안쪽에서 아이의 손바닥이 다시 한 번 닿았다.


이번에는 울음도, 웃음도 아니었다. 손가락 끝이 안쪽의 먼지를 밀어 짧은 문장을 남겼다.


데미안이 오면, 심장은 넷이 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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