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너머의 진실

반복되는 악몽

by TJ

엘레나는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본 것은 천장도, 하늘도 아니었다. 그녥는 여전히 시간의 근원 앞에 있었다. 카이가 그녀의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악몽을 꾸고 있군." 엘레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카이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 카이가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안 돼... 또... 또 죽어..."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999번째야... 이번에는... 이번에는 꼭..."


엘레나는 깜짝 놀라 카이를 바라보았다. 999번째? 그게 무슨 뜻이지?


"엘레나... 미안해... 나는... 나는 너무 오래 살았어..." 카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무... 외로워..."


엘레나는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카이! 깨어나요!"


카이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은 공포로 가득했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엘레나를 발견하고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치 그녀가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엘레나... 엘레나..." 그는 그녀의 이름을 계속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나 여기 있어요." 엘레나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악몽을 꾼 거예요?"


카이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엘레나는 그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기다렸다. 그가 진정될 때까지.


마침내 카이가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미안해. 나... 이상한 꿈을 꿨어." 그가 말했다.


"999번째라고 했어요."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카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그냥... 꿈이었어."


엘레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를 다그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언제든 말하고 싶을 때 말해요. 나는 여기 있을게요."


카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감사함, 죄책감, 그리고... 깊은 슬픔.


"고마워." 그가 작게 속삭였다.




그들은 시간의 근원을 떠나기로 했다. 데미안은 사라졌고, 그를 조종하던 정체불명의 존재도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엘레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시간의 미로를 빠져나오는 길은 들어올 때보다 쉬웠다. 마치 미로 자체가 그들을 내보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거울들은 더 이상 그들을 유혹하지 않았다. 대신 그 거울들은 이상한 장면들을 보여주었다.


엘레나는 한 거울 앞에서 멈췄다. 그 거울 안에는 카이가 혼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늙어 있었다. 아니, 늙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고대의 존재처럼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완전히 하얗고, 얼굴에는 수천 개의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만큼은... 그의 눈만큼은 지금의 카이와 똑같았다.


그 늙은 카이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형체를. 그리고 그 형체는 점점 사람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여성의 모습. 그리고 그 얼굴은...


"나..." 엘레나가 숨을 죽였다.


거울 속의 늙은 카이는 눈물을 흘리며 그 형체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게 입을 맞췄다. 마치 생명을 불어넣듯이.


"엘레나, 이번에는... 이번에는 꼭 살아남아줘." 늙은 카이가 속삭였다.


엘레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이가 그녀 옆에 서 있었다. 그도 그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손은 떨리고 있었다.


"카이... 저게 뭐예요?" 엘레나가 물었다.


카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카이?" 엘레나가 그의 팔을 잡았다.


카이는 마침내 그녀를 돌아보았다. "가자. 여기서 나가자."


"하지만..."


"제발." 카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발 묻지 마. 아직은... 아직은 말할 수 없어."


엘레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카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매우 중요한 무언가라는 것을.




그들이 시간의 미로를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그들은 스카이 아카데미의 한 복도에 서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상해."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거지?"


카이는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엘레나, 이리 와봐."


엘레나가 그의 옆으로 가서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숨이 막혔다.


스카이 아카데미 아래로 펼쳐진 세상은... 불타고 있었다. 마을들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하고 사악한 무언가가.


"이게 대체..."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시간의 미로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 했잖아." 카이가 말했다. "우리가 거기서 하루를 보냈다면, 여기서는..."


"몇 주가 지났을 수도 있다는 거죠." 엘레나가 그의 말을 끝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엘레나와 카이는 경계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타난 사람은... 이요라 마스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의 로브는 찢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그녀는 그들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레나! 카이! 살아있었구나!" 이요라가 그들에게 달려왔다.


"마스터, 무슨 일이에요?" 엘레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요라는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데미안이... 데미안이 돌아왔어.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야. 그는... 그는 어둠 그 자체가 되었어."


"언제요?" 카이가 물었다.


"2주 전이야." 이요라가 말했다. "너희가 사라진 직후, 하늘이 갈라지더니 데미안이 나타났어. 그는 스카이 아카데미를 공격했고, 우리는 간신히 막아냈어. 하지만 그 후로 그는 세상 곳곳을 공격하고 있어. 마을들이 불타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어."


엘레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스톰엔드는요? 제 마을은 괜찮아요?"


이요라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미안해, 엘레나. 스톰엔드는... 스톰엔드는 첫 번째 공격 대상이었어."


엘레나는 비틀거렸다. 카이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


"할머니... 마라..." 엘레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생존자들이 있어." 이요라가 급히 말했다. "모두가 죽은 건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대피했어. 하지만..."


"하지만 뭐예요?" 엘레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하지만 마라는... 마라는 다른 사람들을 대피시키다가 부상을 입었어. 지금 치료실에 있어."


엘레나는 카이를 밀어내고 달리기 시작했다. 카이와 이요라가 그녀를 따라왔다.




치료실은 부상자들로 가득했다. 침대마다 사람들이 누워 있었고, 치료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엘레나는 그 사이를 헤치며 마라를 찾았다.


그리고 그녀는 마라를 발견했다.


마라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 있었다. 엘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라의 침대로 달려갔다.


"마라!" 엘레나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엘레나를 보자 미소 지었다.


"엘레나... 돌아왔구나..."


"미안해요, 마라. 내가 없는 사이에..." 엘레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니야." 마라가 고개를 저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나는 괜찮아.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살았어."


"할머니는요?" 엘레나가 물었다.


마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할머니는... 할머니는 마을에 남으셨어. 누군가는 남아서 마을을 지켜야 한다고 하시면서..."


엘레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혼자..."


"엘레나." 마라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할머니는 강한 분이야. 그리고 할머니는 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으셨어. 할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어. '엘레나는 꼭 돌아올 거야. 그리고 그 아이가 우리를 구할 거야'라고."


엘레나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나 할머니를 구하러 갈게요."


"안 돼." 카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금 가면 위험해."


"하지만 할머니가..." 엘레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카이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 네가 죽으면 아무도 구할 수 없어. 우리는 준비가 필요해."


엘레나는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찢어지고 있었다.


이요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카이 말이 맞아, 엘레나. 데미안은 지금 너무 강해. 우리는 그를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해."


"방법이 있어요?" 엘레나가 물었다.


이요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카누스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아. 그는 지하 연구실에서 계속 연구하고 있어. 너희를 기다리고 있었어."


카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르카누스..."


"뭔가 알아요?" 엘레나가 그에게 물었다.


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좋은 느낌이 안 들어."


"하지만 지금은 그가 유일한 희망이야." 이요라가 말했다. "그는 시간 마법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어. 그리고 데미안을 막을 방법도 알고 있을 거야."


엘레나는 카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카이가 말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해."




아르카누스의 연구실로 가는 길은 어두웠다. 복도의 촛불들이 대부분 꺼져 있었고, 벽에는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엘레나는 그 흔적들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싸웠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까.


그들이 연구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안에서는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르카누스?" 이요라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카이는 검에 손을 얹으며 앞으로 나섰다. 엘레나도 바람을 불러낼 준비를 했다. 그들은 천천히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연구실은 엉망이었다. 책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실험 도구들이 깨져 있었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벽에 그려진 그림들이었다.


벽 전체에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마법진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나무처럼 생겼다. 아니, 정확히는 시간선처럼 생겼다. 수많은 가지들이 뻗어 나가고, 각 가지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


1, 2, 3... 100... 500... 999...


엘레나는 그 숫자들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999. 카이가 잠꼬대로 말한 그 숫자.


"이게 뭐지?" 이요라가 중얼거렸다.


카이는 그 그림을 바라보며 얼어붙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손은 떨리고 있었다.


"카이?" 엘레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때, 연구실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나."


아르카누스였다. 그는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그의 주위로는 이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아르카누스, 무슨 일이에요?" 이요라가 물었다.


아르카누스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카이를 바라보았다.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카이. 아니..." 그는 미소 지었다. "크로노스라고 불러야 하나?"


엘레나는 깜짝 놀라 카이를 돌아보았다. 카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르카누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예요?" 엘레나가 물었다.


아르카누스는 벽의 그림을 가리켰다. "이건 시간선의 지도야. 그리고 이 숫자들은... 반복의 횟수지."


"반복?" 이요라가 되물었다.


"그래." 아르카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는 이미 999번 이 시간을 반복했어. 매번 엘레나를 구하려고 시도했지. 하지만 매번 실패했어."


엘레나는 숨이 막혔다. 그녀는 카이를 바라보았다. "이게... 사실이에요?"


카이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엘레나. 나는... 나는 너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어."


"왜요?" 엘레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냐하면..." 카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왜냐하면 너는 매번 나를 위해 희생했으니까. 매번 너는 나를 구하기 위해 죽었어. 그리고 나는... 나는 그걸 견딜 수 없었어."


엘레나는 그의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999번. 그는 999번이나 그녀의 죽음을 봤다는 것인가.


"그래서 이번에는..." 카이가 계속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방법을 바꿨어. 나는 크로노스라는 이름으로 너를 다시 만들었어. 그리고 젊은 나 자신도 만들었어. 기억의 일부만 가진 나를."


"그럼 당신은..."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나는 크로노스야." 카이가 고백했다. "늙은 나와 젊은 나. 우리는 같은 사람이야."


이요라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럴 수가..."


아르카누스는 박수를 쳤다. "훌륭해. 마침내 고백했군. 하지만 카이, 자네는 한 가지를 모르고 있어."


"뭐?" 카이가 그를 노려보았다.


"자네가 999번 반복한 건 맞아. 하지만..." 아르카누스의 미소가 깊어졌다. "자네만 반복한 게 아니야."


"무슨 뜻이죠?" 엘레나가 물었다.


아르카누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레나, 자네도 반복하고 있어. 자네도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엘레나는 그의 말에 혼란스러워졌다. "나도?"


"그래." 아르카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와 카이는 원래 한 사람이었어. 고대의 폭풍신이 자신을 둘로 나눠 인간으로 환생시킨 거야. 그래서 자네들은 서로에게 끌리는 거야. 자네들은 원래 하나였으니까."


엘레나는 카이를 바라보았다. 카이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눈에는 같은 깨달음이 떠올랐다.


"그래서..." 엘레나가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를 알고 있는 것 같았던 거군요."


"그리고 그래서 자네들이 합쳐지면..." 아르카누스가 말을 이었다. "자네들은 다시 폭풍신이 될 수 있어. 그 힘으로 데미안을 막을 수 있지."


"하지만 대가가 있겠죠." 카이가 말했다.


"물론이지." 아르카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이 합쳐지면, 개인으로서의 자네들은 사라져. 엘레나도, 카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오직 폭풍신만 남지."


엘레나는 카이의 손을 잡았다. "그럼 우리는..."


"선택해야 해." 카이가 그녀의 말을 끝냈다. "세상을 구하고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함께 살면서 세상이 멸망하는 걸 볼 것인가."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고통스러운 침묵.


그때, 갑자기 건물이 흔들렸다. 폭발음이 들려왔고, 비명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데미안이야!" 이요라가 외쳤다. "그가 다시 공격하고 있어!"


아르카누스는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늦었어. 그는 이미 여기까지 왔어."


엘레나와 카이도 창문으로 달려갔다. 하늘에서 거대한 어둠의 형체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데미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어둠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엘레나는 숨이 막혔다.


그의 뒤에는 또 다른 형체가 있었다. 더 거대하고, 더 사악한 형체. 그것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게..." 카이가 중얼거렸다.


"저게 진짜 적이야." 아르카누스가 말했다. "저게 데미안을 조종하고 있는 존재야. 저게..."


그가 말을 끝내기 전에, 그 형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거대한 용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용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으로 이루어진 용이었다. 그의 비늘 하나하나가 다른 시간선이었고, 그의 눈에는 무한한 시간이 담겨 있었다.


"시간의 용..." 아르카누스가 경외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설 속의 존재... 시간을 먹고 사는 괴물..."


용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낮고, 차갑고, 고대의 목소리.


"999번의 시간을 반복한 자여. 1000번째도 실패할 것이다."


카이는 주먹을 쥐었다. "아니야. 이번에는 달라."


"달라?" 용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천둥처럼 울렸다. "너는 매번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매번 실패했지. 왜냐하면 너는 선택할 수 없으니까. 엘레나를 구할 것인가, 세상을 구할 것인가. 너는 매번 엘레나를 선택했고, 그래서 세상은 멸망했지."


엘레나는 카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용이 계속 말했다. "이번에는 엘레나도 진실을 알고 있지.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보는 것도 재미있겠군."


용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그는 스카이 아카데미를 향해 내려오기 시작했다.


"준비해!" 이요라가 외쳤다. "전투가 시작됐어!"


엘레나는 카이의 손을 꽉 잡았다. "우리 함께 해요."


카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레나, 나는..."


"나도 알아요." 엘레나가 그의 말을 끊었다. "당신이 999번이나 나를 위해 싸웠다는 것. 당신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에요. 우리는 함께예요."


카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마워."


그들은 함께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시간의 용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데미안이 따라오고 있었다.


"가자." 엘레나가 말했다. "우리의 운명을 마주하러."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연구실을 나섰다.


아르카누스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1000번째...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벽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999개의 가지 옆에, 그는 천천히 1000번째 가지를 그렸다.


그 가지의 끝은 아직 비어 있었다. 생명인가, 죽음인가. 희망인가, 절망인가.


그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옥상에 도착했을 때, 시간의 용은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공중에 떠 있었고,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아카데미 전체를 덮고 있었다.


"왔구나." 용이 말했다.


엘레나와 카이는 나란히 섰다. 그들의 손에는 시간의 파편이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당신을 막을 거예요." 엘레나가 말했다.


"막는다고?" 용이 웃었다. "어떻게? 너희는 아직 합쳐지지도 않았는데."


"합쳐지지 않아도 싸울 수 있어요." 카이가 말했다.


"그래?" 용의 눈이 빛났다. "그럼 한번 해보거라. 하지만 기억해라. 시간은 내 편이야. 나는 영원하지만, 너희는... 너희는 유한하지."


용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시간의 파동이 쏟아져 나왔다. 엘레나와 카이는 재빨리 피했다. 파동이 지나간 자리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다. 공기 중의 먼지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해!" 카이가 외쳤다. "저 공격에 맞으면 시간에 갇혀!"


엘레나는 바람을 불러냈다. 강력한 돌풍이 용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용은 날개를 한 번 펄럭이는 것만으로 그 바람을 흩어버렸다.


"약해." 용이 말했다. "너희는 아직 진짜 힘을 깨우지 못했어."


카이는 검을 뽑아 들고 용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검에는 시간의 파편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용의 비늘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검이 비늘에 닿기 직전, 시간이 느려졌다. 카이의 움직임이 거의 정지했다. 용은 여유롭게 꼬리를 휘둘러 카이를 쳐냈다.


카이는 공중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그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카이!" 엘레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카이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용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너는 어디 가려고?" 용이 물었다.


엘레나는 용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근원적인 무언가였다. 폭풍. 아니, 폭풍 그 자체. 엘레나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오?" 용이 흥미로운 듯 말했다. "드디어 깨어나는구나. 폭풍신의 힘이."


엘레나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며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은 폭풍의 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녀의 주위로는 무수한 바람의 칼날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카이를..." 엘레나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신의 권능이 담겨 있었다. "카이를 다치게 한 것을 후회하게 해줄게요."


그녀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거대한 폭풍이 내려왔다. 번개가 치고, 바람이 울부짖었다. 그 폭풍은 용을 향해 쏟아졌다.


용은 처음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는 시간의 장벽을 쳤다. 하지만 엘레나의 폭풍은 그 장벽을 뚫고 들어갔다.


"불가능해!" 용이 외쳤다. "시간을 초월하는 힘이라니!"


"나는..." 엘레나가 말했다. "나는 폭풍신의 반쪽이에요. 그리고 폭풍은 시간조차 막을 수 없어요!"


폭풍이 용을 강타했다. 용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그의 비늘 몇 개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 엘레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몸에서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너무 많은 힘을 사용했다.


"엘레나!" 카이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왔다.


그는 그녀를 안았다. 엘레나는 그의 품에서 숨을 헐떡였다.


"미안해요... 나... 너무 약해요..."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아니야." 카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강해. 너는 시간의 용을 다치게 했어. 999번의 반복 중에서 처음이야."


용은 상처를 확인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이제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흥미롭군." 용이 말했다. "1000번째는 정말 다르구나. 하지만..." 그는 날개를 펼쳤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때, 하늘에서 또 다른 존재가 내려왔다. 데미안이었다. 그는 용의 옆에 섰다.


"주인님." 데미안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다. 감정이 없었다.


"데미안, 저들을 처리해라." 용이 명령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엘레나와 카이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어둠의 검이 형성되었다.


카이는 엘레나를 내려놓고 검을 들었다. "엘레나, 여기서 쉬어. 내가 막을게."


"안 돼요." 엘레나가 그의 팔을 잡았다. "혼자서는 안 돼요."


"하지만 너는 지금..." 카이가 말했다.


"괜찮아요." 엘레나가 일어섰다. 그녀는 비틀거렸지만, 카이가 그녀를 붙잡았다. "우리 함께 해요. 999번 동안 당신 혼자 싸웠잖아요. 이번에는 함께예요."


카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미소 지었다. "그래. 함께."


그들은 나란히 섰다. 엘레나와 카이. 폭풍신의 두 반쪽. 그들의 손에 든 시간의 파편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그의 검이 내려쳤다.


하지만 엘레나와 카이는 함께 움직였다. 마치 하나의 존재처럼. 카이가 검으로 데미안의 공격을 막는 동안, 엘레나가 바람으로 데미안을 밀어냈다.


데미안은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다시 공격했다. 하지만 엘레나와 카이의 호흡은 완벽했다. 그들은 서로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서로를 보완했다.


용은 그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들은... 아직 합쳐지지 않았는데도 저렇게 강해?"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엘레나와 카이는 이미 마음으로는 하나였다.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고, 완전히 신뢰했다. 그것이 그들의 진짜 힘이었다.


"재미있군." 용이 미소 지었다. "1000번째는 정말 특별하구나. 하지만..." 그는 입을 열었다. "이제 진짜 힘을 보여주지."


용의 입에서 거대한 시간의 파동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강력했다. 그 파동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엘레나와 카이를 향해 날아왔다.


"안 돼!" 카이가 외쳤다.


엘레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카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빛이 폭발했다.


시간의 파동이 그들을 덮쳤다. 하지만 엘레나의 빛이 그들을 보호했다. 빛과 어둠이 충돌하며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이 가라앉았을 때, 엘레나와 카이는 여전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달라져 있었다.


그들의 몸이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를 안고 있었고, 그들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게..."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합쳐지고 있어." 카이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엘레나가 말했다.


"선택하지 않았어." 카이가 그녀의 말을 끝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미 선택했나봐."


엘레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아니, 그녀의 얼굴도 흐려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가 되고 있었다.


"무서워요." 엘레나가 속삭였다.


"나도." 카이가 대답했다. "하지만 너와 함께라면... 괜찮아."


"999번 동안..." 엘레나가 말했다. "999번 동안 당신은 나를 위해 싸웠어요.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위해..."


"아니야." 카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함께 싸우는 거야. 서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엘레나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 순간, 빛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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