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는 이틀째 문밖에 있었다.
엘레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카이도 두드리지 않았다. 복도 건너편 벽에 기대 앉아, 누군가 지나가면 아무 일도 없는 얼굴로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그는 기다리는 법을 너무 오래 배운 사람처럼 조용했다.
그 조용함이 더 화가 났다.
엘레나는 책상 위에 스케치와 기록을 펼쳐 놓았다. W-017. W-041. W-088. 이름이 지워진 아이들. 예언이라 불렸던 봉인 절차. 할머니가 끓여 주던 약의 성분표.
그리고 거울.
거울 속 아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엘레나는 가끔 어깨 너머에서 작은 손이 유리에 닿는 소리를 들었다.
톡.
톡.
기다려.
자신이 한 말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오후 수업 종이 울렸을 때, 손바닥의 1000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엘레나는 책상을 붙잡았다. 숫자의 마지막 획이 가늘게 뻗었다. 완성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의 닿을 듯했다.
복도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엘레나는 문을 열었다.
카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다른 손으로 자기 손등을 움켜쥐었다. 999 흉터가 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숫자 하나하나가 피부 밑에서 벌어지듯 빛났다.
"카이."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엘레나를 보지 못했다. 다른 시간, 다른 방, 다른 죽음들을 보고 있었다.
"엘레나."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 번.
또 한 번.
셋째에는 목소리가 부서졌다.
"이번에는..."
카이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엘레나는 본능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그의 손등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999와 미완성 1000이 맞닿았다.
세상이 뒤집혔다.
엘레나는 바람 속에 서 있었다.
바람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많은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비명, 종소리, 깨지는 유리, 누군가의 마지막 숨. 그 모든 것이 한 방향으로 불었다.
카이의 기억.
첫 번째 기억에서 엘레나는 축제 광장에 있었다.
바람끈이 손가락을 베었다. 검은 실이 제단을 타고 올라갔다. 그림자 교단이 스톰엔드에 도착하기 전에 카이가 달려왔다.
그는 늦었다.
엘레나는 문이 되었고, 마을은 하루를 반복했다. 카이는 그 반복 안에서 혼자 깨어났다.
두 번째 기억.
카이는 아카데미 입구에서 엘레나를 막았다. 그녀를 들여보내지 않으려 했다. 엘레나는 돌아갔다. 스톰엔드에서 그림자 교단이 그녀를 데려갔다. 카이는 사흘 뒤 폐허 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 번째.
그는 금서실을 불태웠다. 예언을 없애면 절차가 멈출 거라 믿었다. 그러나 종이 대신 사람들의 기억이 탔다. 엘레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네 번째.
그는 태양석을 부쉈다. 기억을 붙잡는 못을 없애면 반복도 끝날 거라 생각했다. 그날 밤, 엘레나는 자신의 이름을 잊었다. 다음 아침, 카이만 그녀를 기억했다.
기억들은 숫자를 달고 지나갔다.
엘레나는 카이가 얼마나 많이 실패했는지 보았다.
그는 매번 방법을 바꿨다. 엘레나를 숨겼다. 아카데미를 떠났다. 이요라를 설득했다. 아르카누스의 기록을 훔쳤다. 봉인문을 닫았다. 봉인문을 열었다. 태양석을 묻었다. 태양석을 삼켰다.
결과는 매번 달랐다.
끝은 같았다.
엘레나가 사라졌다.
세상이 반복됐다.
카이만 남았다.
기억의 바람이 거세졌다. 엘레나는 흔들리지 않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끝에 닿은 것은 바람이 아니라 검 손잡이였다.
어떤 밤이었다.
지하 시험장.
봉인문이 열려 있었다. 푸른 빛이 계단까지 넘쳐흘렀고, 아카데미의 종은 같은 시각을 계속 울렸다.
엘레나는 원 안에 서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다. 기억 속의 엘레나였다.
눈빛이 비어 있었다. 손바닥의 1000은 완성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바람에 떠 있었고,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문이 그녀의 목소리로 말했다.
열어.
카이는 문 밖에 서 있었다. 젊은 얼굴이었지만 눈은 오래되어 있었다. 그는 검을 들고 있었다.
"엘레나."
기억 속 엘레나가 웃었다.
그 웃음은 엘레나의 것이 아니었다.
"카이, 늦었어."
문 안쪽에서 아이 울음이 들렸다.
작고 짧은 울음.
아직 이름 없는 울음.
기억 속 카이는 한 발 앞으로 갔다. 그의 손이 떨렸다. 검끝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돌아와."
"나는 문이야."
"아니."
"이번에는 네가 닫아야 해."
엘레나는 카이의 기억 속에서 그 말을 들었다. 그 말이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 엘레나인가. 문인가. 봉인 절차인가. 아니면 카이가 999번 동안 스스로에게 들려준 형벌인가.
카이는 울지 않았다.
그는 검을 찔렀다.
기억 속 엘레나가 그의 품으로 무너졌다.
1000이 꺼졌다.
문이 닫혔다.
아이 울음도 끊겼다.
그 밤, 세상은 반복되지 않았다.
대신 카이만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그는 아침까지 엘레나의 몸을 안고 있었다. 해가 뜨자 세계가 다시 움직였다. 사람들은 구원받았다고 말했다. 이요라는 무릎을 꿇었다. 아카데미는 종을 울렸다.
카이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는 엘레나의 손바닥을 붙잡고 말했다.
"내가 닫았어."
대답은 없었다.
"내가 너를..."
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기억이 찢어졌다.
엘레나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다음 기억이 그녀를 끌고 갔다.
카이는 태양석 조각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눈앞에는 아르카누스의 연구 기록이 펼쳐져 있었다.
기억 보존 가능.
죽음 직전의 선택을 축으로 되감기 가능.
대가: 반복자의 기억 누적.
카이는 자기 손등에 첫 숫자를 새겼다.
다시 시작.
그다음 기억들은 더 빨랐다.
카이는 엘레나를 살리려 했다.
실패했다.
다시 살리려 했다.
실패했다.
그는 어느 반복에서는 그녀를 미워하려 했다. 미워하면 잃기 쉬울 거라 믿었다. 실패했다.
어느 반복에서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엘레나는 혼자 봉인문으로 갔다.
어느 반복에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엘레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문이 되었다.
어느 반복에서는 둘이 도망쳤다. 세계가 무너졌다.
어느 반복에서는 세계를 택했다. 엘레나가 무너졌다.
999번.
999개의 바람이 카이의 몸을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기억.
잊혀진 섬.
태양석.
폭풍의 심장.
카이가 피 묻은 손으로 엘레나를 붙잡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발 기억해.
그 말은 부탁이 아니었다. 절반은 저주였고, 절반은 구조 요청이었다.
엘레나는 그제야 카이가 왜 자신에게 기억을 넘기려 했는지 알았다.
혼자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그 사실이 그녀의 분노를 지우지는 않았다.
다만 분노 옆에 다른 것이 생겼다.
너무 오래 혼자 서 있었던 사람을 본 뒤에만 생기는 무거운 감각.
엘레나는 카이의 기억 속에서 외쳤다.
"그만."
바람이 멈췄다.
현실이 돌아왔다.
카이는 회복실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이요라가 멀찍이 서 있었고, 엘레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카이의 손등을 붙잡고 있었다.
999의 빛은 꺼졌지만,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카이가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엘레나를 보았다.
"봤어?"
엘레나는 손을 놓았다.
"네."
카이는 천장을 보았다.
"어디까지."
"충분히요."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이요라가 한 걸음 다가오려 했다. 엘레나는 손을 들어 멈췄다.
"둘이 얘기하게 해 주세요."
이요라는 멈췄다.
"문밖에 있겠다."
그녀가 나가자 회복실 안에 둘만 남았다.
카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한 번 비틀거렸다.
"변명하지 않을게."
"좋아요."
"그때의 내가 했다고 말하지 않을게."
"좋아요."
"내가 했어."
엘레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카이의 목소리는 낮았고, 흔들렸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문이 너를 쓰기 전에, 내가 너를 죽였어."
엘레나의 숨이 멎었다.
알고 있었다.
봤다.
하지만 실제 목소리로 듣는 건 다른 일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세상을 살렸다고 사람들이 말했어. 나는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어."
"그래서 다시 돌렸어요?"
"그래."
"저한테 묻지도 않고."
"그래."
"저를 또 살리려고."
"그래."
"그리고 또 숨기려고."
카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
엘레나는 손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1000의 미완성 획이 뜨거웠다.
"당신은 저를 사랑해서 저를 죽였고, 사랑해서 되돌렸고, 사랑해서 숨겼어요."
카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게 사랑이면, 저는 그 사랑이 무서워요."
카이의 얼굴이 무너졌다. 그래도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
"나를 위해서였다는 말 하지 마세요."
"안 해."
"그럼 뭐라고 할 건데요?"
카이는 그녀를 보았다.
"내가 견디지 못해서였어."
그 대답은 엘레나가 예상한 어떤 변명보다 더 깊이 박혔다.
"네가 문이 되는 걸 견디지 못했고, 네가 죽는 걸 견디지 못했고, 내가 네 죽음 없이 사는 것도 견디지 못했어. 그래서 계속 되감았어. 세계를 위해서도 아니고, 너를 위해서만도 아니야. 내가 못 견뎌서."
엘레나는 눈을 감았다.
분노가 목까지 차올랐다. 동시에 기억 속의 카이가 혼자 아침을 맞던 장면이 떠올랐다. 엘레나의 시신을 안고 종소리를 듣지 못하던 얼굴.
그 얼굴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하게 되는 자신도 싫었다.
"저는 지금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요."
"알아."
"아마 오래 걸릴 거예요."
"그래."
"그런데 그 아이는 구할 거예요."
카이의 눈이 흔들렸다.
"엘레나."
"당신이 999번을 실패했다면, 저는 1000번째에서 다른 선택을 할 거예요."
"그 아이가 나오면..."
"죽을 수도 있겠죠. 세계가 또 반복될 수도 있고요."
"그래."
"그래도 그 아이가 혼자 그 안에서 우리가 늦었다고 말하게 두지는 않을 거예요."
카이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 이름."
엘레나는 말했다.
"아직 묻지 않을게요."
카이가 숨을 멈췄다.
"하지만 다음에 그 아이가 직접 말하면, 저는 들을 거예요."
"그때는 막을 수 없어."
"막지 마요."
회복실 창밖에서 종이 울렸다.
한 번.
같은 시각의 종은 아니었다. 오후 수업 종료 종이었다. 하지만 엘레나의 손바닥과 카이의 손등이 동시에 빛났다.
미완성 1000.
두 숫자 사이로 아주 가는 금빛 선이 이어졌다.
카이가 그 선을 보았다.
"시작됐어."
"뭐가요?"
"1000번째."
엘레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획이 거의 닿아 있었다.
카이는 낮게 말했다.
"나는 너를 999번 잃었어."
그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한 번은, 내가 너를 잃게 만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