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미로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

by TJ

엘레나는 아르카누스의 연구실을 떠난 후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이 인공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크로노스가 자신과 카이의 아들이라는 충격적인 진실은 그녀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고, 꿈속에서는 자신이 서서히 투명해지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며 자문했다. '이 얼굴은 진짜 내 것일까? 이 눈동자 뒤에 있는 영혼은 진짜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설계한 복제품일 뿐일까?'


스카이 아카데미의 복도를 걷는 동안, 엘레나는 주변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일상적인 대화가 마치 다른 세계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태어났고,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달랐다. 그녀는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녀의 손끝에서는 여전히 바람이 속삭였지만, 그 속삭임조차 이제는 낯설게 들렸다. '이 힘도 진짜 내 것일까? 아니면 그저 프로그래밍된 능력일 뿐일까?'


훈련장에서도 집중할 수 없었다. 바람을 불러내려 할 때마다 손이 떨렸고, 마법의 흐름이 불안정했다. 이요라 마스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엘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모든 기억이 누군가에 의해 심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밤이 되면 엘레나는 기숙사 방의 작은 창가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수천 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앞으로도 수천 년 동안 그곳에 있을 별들. 그 영원함 앞에서 엘레나는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덧없는지 느꼈다. 그녀는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누구지?"

"엘레나."


카이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그는 며칠 동안 그녀를 찾아왔지만, 엘레나는 계속 그를 피했다. 하지만 오늘 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엘레나, 제발 문 좀 열어줘. 우리 이야기를 나눠야 해."


엘레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일어나 문을 열었다. 카이는 복도의 희미한 촛불 아래 서 있었다. 시간의 균열을 겪으며 늙어버린 그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와 걱정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눈가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고, 한때 젊고 활기찼던 왕자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엘레나를 향한 깊은 염려가 담겨 있었다.


"들어와요." 엘레나가 조용히 말했다.


카이는 방 안으로 들어왔고, 엘레나는 문을 닫았다. 둘은 한동안 침묵 속에 서 있었다. 창밖에서는 밤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세상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엘레나," 카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혼란스러워.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도 밤마다 그 생각뿐이야."


엘레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강해 보여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카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강해 보이는 것과 실제로 강한 건 다른 거야. 나는... 나는 무너지기 직전이야, 엘레나. 하지만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적어도 네 앞에서는."


"왜요?" 엘레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냐하면..." 카이는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냐하면 너는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니까. 우리가 진짜든 가짜든, 만들어진 존재든 아니든... 내가 너를 향해 느끼는 이 감정만큼은 진짜야."


엘레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는 크로노스가 만든 인형일 뿐이에요. 우리의 감정도, 기억도, 모든 게 조작된 거라면..."


"그렇다면 뭐가 어때?" 카이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엘레나, 생각해봐. 우리가 느끼는 이 고통, 이 혼란, 이 두려움... 이게 가짜일 수 있을까? 인형이 이렇게 아파할 수 있을까?"


엘레나는 그의 말에 숨이 막혔다. 카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든, 우리는 지금 여기 있어. 우리는 느끼고, 생각하고, 선택해. 그게 진짜라는 증거 아닐까?"


"하지만..." 엘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어요. 크로노스가 말했잖아요. 우리 중 하나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카이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엘레나는 그의 품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힘찬 박동. 그것은 분명 살아 있는 존재의 것이었다.


"그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자." 카이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든, 어떻게 끝나든... 적어도 우리는 함께였다고 말할 수 있게."


엘레나는 그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녀가 흘린 눈물은 진짜였다. 그녀가 느낀 고통도, 그리고 지금 느끼는 위안도 진짜였다. 카이의 말이 맞았다. 그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의심할 수 없이 진실했다.


한참 후, 엘레나는 눈물을 닦으며 카이에게서 물러났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약했어요."


"아니야." 카이가 고개를 저었다. "너는 강해. 네가 약했다면 진작에 포기했을 거야. 하지만 너는 여전히 여기 서 있잖아."


엘레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손에 있던 시간의 파편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카이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두 개의 수정이 공명하듯 진동하며 푸른 빛을 발했다.


"이게 뭐지?" 카이가 놀라며 물었다.


빛이 점점 강해지더니, 갑자기 방 한가운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공간이 찢어지듯 갈라지며, 그 틈 사이로 소용돌이치는 빛이 보였다.


"시간의 문이야!" 엘레나가 외쳤다.


균열이 완전히 열리자, 그 너머로 이상한 풍경이 펼쳐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 같은 공간이었는데, 벽면마다 거울처럼 다른 장면들이 비치고 있었다. 어떤 거울에는 과거의 모습이, 어떤 거울에는 미래의 모습이, 어떤 거울에는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들이 담겨 있었다.


"저게 시간의 미로구나." 카이가 중얼거렸다. "크로노스가 말한 시간의 근원으로 가는 길."


엘레나는 균열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두려움이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결의도 함께 있었다. 그녀는 카이를 돌아보았다.


"준비됐어요?"


카이는 검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함께라면."


둘은 손을 맞잡고 시간의 균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순간,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감각이 엘레나를 덮쳤다. 위아래가 바뀌고, 시간이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를 반복했다. 그녀는 카이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만이 이 혼란 속에서 유일한 확실함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시간의 미로에 도착했다.




시간의 미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공간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각 복도의 벽면에는 수없이 많은 거울들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단순한 거울이 아니었다. 각각의 거울은 다른 시간, 다른 현실을 비추고 있었다.


엘레나는 가장 가까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서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스톰엔드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웃고 있었다.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마법도, 운명도, 고통도 없는 순수한 시절.


"저건... 내 과거야."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카이도 다른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는 젊은 시절의 그가 왕궁에서 형과 함께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형의 그림자 속에 가려진 둘째 왕자의 외로움이 역력했다.


"이 거울들은 우리의 기억을 보여주는 거야." 카이가 말했다.


"아니야."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나와 카이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복도 끝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긴 회색 로브를 입고 있었고, 얼굴은 후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걸음걸이에서는 묘한 위엄이 느껴졌다.


"이 거울들은 단순히 기억을 보여주는 게 아니야." 그 사람이 말했다. "이것들은 가능성을 보여주지. 너희가 선택하지 않은 길들, 너희가 될 수 있었던 모습들."


"당신은 누구죠?" 엘레나가 경계하며 물었다.


그 사람은 후드를 벗었다. 그 아래에는 놀랍게도 나이 든 여성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젊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눈빛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나는 시간의 수호자야." 그녀가 말했다. "이곳을 지키는 자.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너희를 기다리던 자."


카이가 검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우리를 기다렸다고? 왜?"


수호자는 그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하면 너희는 특별하니까. 너희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들이야. 죽음에서 되살아난 자들. 아니, 정확히는 죽음을 넘어 재창조된 자들."


엘레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당신도... 우리가 뭔지 알고 있군요."


"물론이지." 수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모든 시간을 볼 수 있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리고 너희의 탄생도 봤어. 크로노스가 얼마나 절박하게 너희를 만들었는지도."


카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럼 우리에게 답을 줄 수 있겠군요. 우리는... 진짜인가요? 아니면 그저 복제품인가요?"


수호자는 그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천천히 복도를 걸으며 거울들을 가리켰다. "이 거울들을 봐. 각각의 거울은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지. 어떤 거울에서는 너희가 만나지 않았어. 어떤 거울에서는 너희가 적이 되었고. 어떤 거울에서는 너희가 함께 늙어가고 있어."


그녀는 특정 거울 앞에서 멈췄다. 그 거울 안에서는 엘레나와 카이가 전장에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편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검과 마법을 휘두르고 있었다. 둘 다 눈물을 흘리며 싸우고 있었다.


"이건..." 엘레나가 숨을 죽였다.


"이건 원래의 엘레나와 카이가 겪었던 일이야." 수호자가 조용히 말했다. "데미안의 조종 때문에 너희는 서로를 적으로 여기게 되었지. 그리고 결국..." 그녀는 다음 거울을 가리켰다.


그 거울 안에서는 엘레나가 카이의 품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검이 꽂혀 있었고, 카이는 절규하며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어린 크로노스가 부모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


엘레나는 그 장면을 보며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카이도 창백한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게... 우리의 원래 운명이었군요." 카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수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래서 그는 수십 년 동안 시간 마법을 연구했지. 죽은 자를 되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


"하지만 실패했죠." 엘레나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를 만든 거고요."


수호자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패? 아니, 그는 성공했어. 다만 방법이 달랐을 뿐이지."


"무슨 뜻이죠?" 카이가 물었다.


수호자는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너희에게 물어보지. 진짜란 뭘까? 원본과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똑같은 영혼의 파편을 가지고,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그게 가짜일까?"


엘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크로노스는 너희 부모의 영혼 파편을 모았어. 시간의 틈새에 흩어진 기억들을 하나하나 모았지. 그리고 그것들을 엮어서 너희를 만들었어. 너희는 복제품이 아니야. 너희는 재탄생이야."


카이가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우리는 원본과 다른 선택을 하고 있어요. 우리는 서로 싸우지 않았어요."


"그게 바로 크로노스가 원한 거야." 수호자가 미소 지었다. "그는 너희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 거야.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이번에는 서로를 지킬 수 있도록."


엘레나는 카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도 같은 깨달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복제품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랑하는 아들이 부모에게 준 두 번째 삶이었다.


"하지만..."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크로노스는 우리 중 하나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수호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건... 시간의 법칙 때문이야. 죽은 자를 되살리는 데는 대가가 필요해. 크로노스는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가며 너희를 만들었어. 그리고 너희가 원래의 운명을 바꾸려면... 누군가는 희생해야 해."


"누가요?" 카이가 다급하게 물었다. "우리 중 하나가?"


수호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몰라. 시간의 흐름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하지만 확실한 건, 데미안을 막으려면 큰 희생이 필요하다는 거야."


엘레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데미안은 어디 있죠?"


"시간의 근원으로 가고 있어." 수호자가 복도 깊숙한 곳을 가리켰다. "이 미로의 끝에 시간의 근원이 있어. 그곳에 도달하면 모든 시간선을 통제할 수 있지. 데미안은 그 힘을 손에 넣으려고 해."


"그를 막아야 해요." 엘레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수호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하지만 조심해. 이 미로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야. 이곳은 너희의 마음을 시험할 거야. 너희의 가장 깊은 두려움과 욕망을 보여줄 거야."


"우리는 준비됐어요." 카이가 말했다.


수호자는 그들을 한참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공중에 무언가를 그렸다. 빛나는 문양이 나타나더니, 복도 끝에 새로운 문이 열렸다.


"저 문을 통과하면 시간의 근원으로 가는 길이 나올 거야. 하지만 그 전에..."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모래시계를 꺼냈다. "이걸 가져가."


엘레나가 모래시계를 받았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였고, 안에는 은빛 모래가 담겨 있었다.


"이게 뭐죠?" 엘레나가 물었다.


"시간의 모래야." 수호자가 설명했다. "위급한 순간에 이걸 깨뜨려. 그러면 짧은 시간 동안 시간을 멈출 수 있어.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으니 신중하게 써."


카이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수호자는 그들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너희는 용감해. 하지만 용기만으로는 부족할 거야. 서로를 믿어. 그게 너희의 가장 큰 힘이야."


엘레나와 카이는 손을 맞잡고 새로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턱을 넘기 직전, 엘레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수호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희망과 슬픔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잘 가." 수호자가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미안해."


엘레나는 그 말의 의미를 묻고 싶었지만, 카이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들은 함께 문을 통과했다.




문 너머의 세계는 더욱 기묘했다. 그곳은 복도가 아니라 거대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공간에는 바닥도, 천장도, 벽도 없었다. 사방이 온통 별들로 가득했다. 아니, 별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작은 빛의 구슬들이었고, 각각의 구슬 안에는 다른 장면들이 담겨 있었다.


"이게 뭐지?" 카이가 중얼거렸다.


엘레나는 가장 가까운 구슬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구슬에 닿는 순간, 갑자기 그녀의 의식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엘레나는 스톰엔드 마을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마을은 평화로웠고,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폭풍도, 위기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시절의 손이었다.


"엘레나! 이리 와!"


마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라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할머니도 그 옆에 서서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건..."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이건 내가 마법을 발견하기 전이야."


그녀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마라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늘 축제 가자! 정말 재미있을 거야!"


엘레나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진짜 같았다. 아니, 진짜였다. 이곳에서는 그녀가 평범한 소녀였다. 마법도, 운명도, 고통도 없는 평범한 삶.


"엘레나?" 할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니?"


엘레나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그 눈빛은 따뜻했다. 사랑으로 가득했다.


'여기 남으면 어떨까?' 엘레나는 생각했다. '이곳에서는 나는 행복할 수 있어. 싸울 필요도, 희생할 필요도 없어.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있어.'


하지만 그때,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곳에는 카이가 없었다. 그녀가 함께 웃고, 함께 싸우고, 함께 울었던 카이가.


"아니야." 엘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진짜가 아니야."


"뭐라고?" 마라가 놀라며 물었다.


"미안해, 마라. 할머니." 엘레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돌아가야 해.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그녀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카이를 떠올렸다. 그의 목소리, 그의 손길, 그의 존재. 그리고 그녀는 외쳤다. "나는 이곳에 속하지 않아!"


엘레나는 다시 별들로 가득한 공간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이가 그녀 옆에 서 있었다. 그도 방금 무언가를 경험한 듯 창백한 얼굴이었다.


"너도... 봤어?" 엘레나가 물었다.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왕이 된 세상을 봤어. 형이 죽고, 내가 왕좌에 앉은 세상. 모두가 나를 존경하고, 내 말에 복종했어. 하지만..." 그는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네가 없었어."


엘레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평화로운 삶을 봤어요. 하지만 당신이 없었어요."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들은 깨달았다. 그들에게 진짜 중요한 건 어떤 삶을 사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사느냐였다.


"가자." 카이가 말했다. "시간의 근원으로."


그들은 별들 사이를 헤쳐 나아갔다. 각각의 구슬이 그들을 유혹했지만, 이제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꽉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그것을 보았다.


시간의 근원.


그것은 거대한 나무 같았다. 하지만 나뭇가지 대신 무수한 시간선들이 뻗어 있었고, 그 중심에는 눈부신 빛이 맥동하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심장처럼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우주의 심장. 시간의 심장.


하지만 그 앞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 그의 주위로는 어둠의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데미안..."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데미안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에는 광기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눈 깊은 곳에는 무언가 다른 것도 있었다. 고통. 깊고 오래된 고통.


"왔구나." 데미안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늦었어. 이제 곧... 이제 곧 모든 게 끝나."


엘레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데미안, 멈춰요. 당신이 하려는 건 잘못됐어요."


"잘못됐다고?" 데미안이 비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원한 건 단지... 단지 고통을 끝내는 것뿐이었어."


카이가 검을 뽑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희생?" 데미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너희가 뭘 알아? 너희는 크로노스가 만든 완벽한 존재들이잖아. 너희는 고통을 모르잖아. 진짜 절망을 모르잖아!"


엘레나는 그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왜냐하면 그녀는 알았기 때문이다. 데미안도 그들처럼 상처받은 존재라는 것을. 다만 그 상처를 다루는 방법이 달랐을 뿐.


"알아요." 엘레나가 조용히 말했다. "저도 고통을 알아요. 제 존재에 대한 의심, 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두려움... 저도 절망했어요."


데미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무언가가 흔들렸다.


"하지만 저는 깨달았어요." 엘레나가 계속 말했다. "고통이 우리를 정의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그 고통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우리를 정의하는 거예요."


"그건..." 데미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쉽게 하는 말이야..."


"쉽지 않아요." 엘레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전혀 쉽지 않아요. 매일 밤 저는 악몽을 꿔요. 제가 사라지는 꿈을. 하지만 아침이 되면 저는 일어나요. 왜냐하면..." 그녀는 카이를 돌아보았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지킬 사람이 있으니까요."


데미안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에게는... 나에게는 아무도 없어..."


"아니에요." 엘레나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가 있어요. 우리가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함께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어요."


데미안은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어둠이 폭발했다. 데미안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분출되며 그를 감쌌다. 데미안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이건... 내가 아니야! 내 몸이... 내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엘레나와 카이는 뒤로 물러섰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무언가 거대하고 사악한 것이.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차가운 목소리.


"어리석은 것들... 정말로 데미안이 혼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나?"


엘레나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 목소리에는 익숙한 무언가가 있었다.


어둠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난 것은...


한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아직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도 공간 전체가 압도되었다.


"누구죠?" 카이가 검을 겨누며 외쳤다.


그 존재는 웃었다. 차갑고 섬뜩한 웃음이었다.


"곧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지금은..."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지금은 데미안과 놀아주렴."


데미안의 몸이 완전히 어둠에 잠식되었다. 그의 눈은 검게 변했고, 그의 주위로는 엄청난 마력이 소용돌이쳤다.


"엘레나... 카이..." 데미안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도망쳐... 제발..."


하지만 너무 늦었다. 데미안이, 아니 데미안을 조종하는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둠의 파동이 폭발하며 그들을 덮쳤다.


엘레나는 본능적으로 바람의 장벽을 쳤다. 카이는 그녀 앞에 서서 검으로 어둠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 힘은 너무 강했다.


"이길 수 없어!" 카이가 외쳤다.


엘레나는 주머니에서 시간의 모래시계를 꺼냈다. 수호자가 준 마지막 수단. 하지만 지금 사용해야 할까? 아니면 더 위급한 순간을 위해 아껴둬야 할까?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데미안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엘레나와 카이는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엘레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그때, 갑자기 시간의 근원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엘레나와 카이를 향해 뻗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든 시간의 파편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엘레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시간의 근원이 그들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카이!" 엘레나가 외쳤다. "함께 해요!"


카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시간의 파편이 하나로 합쳐지며 눈부신 빛을 발했다.

그 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데미안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를 조종하던 어둠도 잠시 흔들렸다.


"지금이야!" 엘레나가 외쳤다.


그들은 함께 힘을 모아 데미안을 향해 빛을 쏘아냈다. 그 빛은 어둠을 뚫고 데미안에게 닿았다. 그리고 잠시, 아주 잠시 동안 데미안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고마워..." 데미안이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 조심해... 그는..."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어둠이 다시 그를 삼켰다. 그리고 그 어둠은 시간의 근원 속으로 사라졌다.


엘레나와 카이는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투는 끝났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데미안을 조종하던 그 존재..." 카이가 중얼거렸다. "그게 진짜 적이야."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전히 손에 든 시간의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느꼈다. 앞으로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쉬자." 엘레나가 말했다. "그리고 준비하자. 다음 전투를 위해."


카이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함께라면 할 수 있어."


엘레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그래요. 함께라면."


그들은 시간의 근원 앞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진짜 전투는 이제부터라는 것을.


그리고 어둠 속 어딘가에서,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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