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로 철학하는 초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아침놀> 서문에서 자신이 '천천히 읽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라고 말합니다. 그는 "나를 잘 읽는 것을 배우라"라고 요구하는데요. 여기서 잘 읽는 것이란, '첫 장을 펼쳐 놓은 채로 민감한 손가락과 눈으로, 천천히, 깊게, 전후를 고려하면서 읽는 것'을 말합니다.
니체는 걷기와 읽기의 장인입니다. 그 자신이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걷기로부터 비롯된다"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는 동시에 읽기의 달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과거 철학의 단점과 장점을 독수리처럼 한눈에 꿰뚫어 보는 빠른 이해력을 지닌 그가 어째서 천천히 읽기를 권할까요? 단순히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일까요? 천천히 읽는다, 내용을 '음미'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스마트폰으로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텍스트를 읽는 현대인에게 니체의 '느리게 읽기'란 어떤 느낌으로 와 닿을까요?
오늘 리뷰할 책의 제목은 <천천히 읽기를 권함>(샨티, 2003)입니다. 저는 현재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바람직한 방식을 슬로 라이프(slow life)의 시각에서 고찰하는 중입니다. 오늘 다룰 주제는 속독이 아닌, 천천히 읽기입니다. 작가인 야마무라 오사무는 <금연의 즐거움> 등을 펴낸 일본의 작가입니다. <담배는 숭고하다>(페이퍼로드, 2015)를 쓴 리처드 클라인이 보면 뒷목 잡을 내용이겠지만, 읽어보지 않아서 평할 도리가 없네요. 아, <담배는 숭고하다>는 제법 읽을만한 책입니다. 향후에 리뷰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흡연 행위의 철학적 의미를 이렇게까지 파고든 책은 보기 드뭅니다.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지만, 흡연자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물론 이 책으로 배우자나 자녀분을 설득하려 드시면 곤란합니다.
<남회귀선>과 <북회귀선>의 작가인 헨리 밀러는 <나의 독서 The Books in my Life>에서 자신의 독서 원칙을 밝히는데요. 그는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일단 건드리지 말고 4, 5일을 묵혀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밀월 기간 동안 그 책의 제목과 저자를 머릿속에 담아두고, 그 책이 내게 줄 즐거움이 과연 얼마나 클 것인가 또는 그 책을 포기할 경우 잃게 될 기쁨은 어떤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충고합니다. 철 없던 시절에는 야한 소설 쓰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헨리 밀러가 느리게 읽기의 달인임을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헨리 밀러의 독서법이 그에게 참으로 큰 기쁨과 만족감을 줄 것이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얼마 전에 다시 읽기를 시도했던 <남회귀선/북회귀선>은 여전히 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 책이 마르크스의 <자본>과도 같아서, 금서라는 이유만으로 매력이 있었던 듯합니다. 대놓고 읽어보라고 그래서 읽어보면, 또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습니다. 아담과 이브도 아마 야훼가 "그 열매는 먹지 마!"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금단의 나무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지 레이코프가 지적했던 것처럼,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해놓았더니, 머릿속이 온통 훨훨 날아다니는 아기코끼리 덤보로 가득 차버렸던 것뿐이지요.
각론 하고, 저는 사고 싶은 책이 있을 때 헨리 밀러와 유사한 방법을 씁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눈에 띄는 책이 있으면, 곧바로 구입하지 않고 일단 빌려서 읽습니다. 그래서 이야, 이거 진짜 사지 않으면 안 되겠는걸!이라는 확신이 들 때에는 과감히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합니다. 좁은 제 집에 책을 더 쌓아둘 공간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아이패드나 킨들로 전자책을 보기도 그렇습니다. 제게 독서행위는 종이 책장을 넘기고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책 한 귀퉁이에 연필로 사각사각 메모를 남기는 것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되 팔 생각도 없습니다. 시장에 다시 내놓을 책이었다면, 처음부터 사지 않았을 테니까요. 제 책은 너무 필기가 많아서, 어차피 내놓아도 푼돈조차 받을 수 없습니다. 여하튼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구입한 드문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천히 읽기를 권함>입니다.
천천히 읽기를 사랑하는 저자, 야마무라 오사무는 책의 첫 부분부터 속독하는 이들을 겨냥합니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등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다치바나 다카시가 주로 그의 표적이지요.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의 지은이는 한 페이지를 읽는데 평균 1~2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다카시는 문장을 뜯어본다기보다는, 내용의 핵심을 파악하는 쪽으로 독서의 가닥을 잡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다카시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야마무라 오사무가 보기에, 다카시는 인간을 '끊임없이 정보를 입력하고 출력하는 정보 신진대사체'로 여깁니다.(19쪽) 그리고 이 점에 저자는 불만을 표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독서법을 수용한 인간은 위대한 작가들이 수 백번을 고쳐 써서 내놓은 천하의 명문을 음미하는 것 따위는 경험해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서서히 벅차올라 온종일 나를 채우는 감동을 어떻게 속독을 통해 느낄 수 있을까요.
야마무라 오사무는 요시다 겐이치라는 작가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말을 통해 시간과 함께 있고,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책을 읽기 위해 필요한 물리적인 시간이 긴지 짧은 지는 계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71쪽) 물론 책의 성격에 따라 글 읽는 속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기계발 서적은 문장 하나하나 곱씹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책을 전속력으로 읽고자 한다면, 스캐너나 다름없는 독서 기계나 다름없겠지요.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 '독서 기계'가 되어 AI처럼 살고자 해도, 진짜 AI에게 이길 방법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크게 오해받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이니 뭐니 해서, 기계가 사람을 지배할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온갖 드라마와 영화가 이와 같은 잘못된 생각을 부추기죠. 원래 공포 마케팅이 잘 먹히거든요. 하지만 정말로 위험한 요소는 따로 있습니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보다, 인간이 기계 되기를 자처하는 쪽이 훨씬 심각한 문제입니다. 윗글을 인용하자면, '끊임없이 정보를 입력하고 출력하는 정보 신진대사체'가 되기 위해 인간다움을 던져버리는 게 가장 절실한 문제점입니다. 이는 현재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주변에 '기계 같은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Citius, Altius, Fortius)'라는 모토가, 국제올림픽위원회를 넘어서 모든 현대인들의 머릿속에 메아리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니체로 돌아갑시다. 그는 손가락을 짚어가며 천천히 읽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잘 배운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다시 슬로 라이프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자기가 가장 쉽게 해낼 수 있는 곳을 짚어서, 슬로 라이프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니체처럼 걷기와 읽기에서 출발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인간은 걸을 수 있고 읽을 수 있습니다. 슬로 워킹(slow walking)과 슬로 리딩(slow reading)은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습니다. 슬로 리딩을 어디에서 시작해볼까요? 야마무라 오사무가 권하는 텍스트는 어떨까요? 다음의 시를 한 번 읽어 보시죠. 제가 약간 변형시켰습니다.(36쪽)
우리 고향에 일곱 동이, 세 동이 담가놓은 술항아리에 띄워놓은 호리병박 국자.
남풍 불면 북쪽으로 너울거리고,
북풍 불면 남쪽으로 너울거리고,
서풍 불면 동쪽으로 너울거리고,
동풍 불면 서쪽으로 너울거리는데,
나는 지도 못하고 여기 이렇게 있을 줄 몰랐네.
집을 떠나 왕궁을 경비하는 초소에 근무하는 한 젊은이의 중얼거림입니다. 이 이야기를 엿들은 공주는 감격한 나머지, 그와 함께 왕궁을 떠나 도망합니다. 의도한 작업 멘트는 아니지만, 파급력이 엄청났던 모양입니다. 야마무라 오사무는 이 시를 읽고 호리병박 국자들이 이리저리 떠도는 광경을 상상할 수 없다면, 너무 급히 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넉넉하고 유유자적한 서정은, 예컨대 '남풍 불면 북쪽으로 너울거린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그와 동시에 많은 술항아리에 떠도는 국자가 나란히 남쪽에서 북쪽으로 천천히 너울거리는 모습을 떠올림으로써 비로소 솟아나는 것이다. 여러 개나 되는 국자가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서 느긋하고 평온한 인상이 빚어지는데, 단 하나의 국자밖에 떠올리지 못했다면, 너무 빨리 읽은 것이다."(38쪽)
고백하건대, 저는 하나의 국자밖에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술항아리 안에서 동서남북으로 바람결에 따라 천천히 떠다니는 국자를 상상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일곱 동이, 세 동이'를 미처 놓쳤던 것입니다. 저 또한 텍스트를 충분히 음미할 만큼 천천히 읽지 못했습니다.
야마무라 오사무는 이 외에도 느리게 읽기를 찬양함과 동시에, 느린 독서가 어느 깊이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보여줍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도 다시 한번 읽어보았는데, 몇 번을 읽어도 즐겁고 도무지 질리지가 않습니다. 본문에 소개된 책들도 매우 훌륭하고 읽을 만합니다. 이에 여러분께 <천천히 읽기를 권함>을 추천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