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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과 저녁 식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합시다

마이클 헵, <사랑하는 사람과 저녁 식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합시다>

저는 슬로 라이프 연재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삶의 우선순위'라는 주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파레토의 20/80법칙은 20%의 중요한 일에 80%의 에너지를 쏟으라고 충고합니다. 나머지 80%의 사소한 일들은 20%의 에너지를 쏟거나, 사정이 된다면 아웃소싱하는 것도 좋습니다. 반드시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면, 아예 취소해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우선순위는 어떻게 매겨야 할까요? 사업 파트너와 업무를 겸한 저녁식사가 내 인생의 주가 되어야 할까요? 직장 동료들과의 회식이 앞자리에 서야 할까요? 친구들과의 즐거운 술자리가 최우선이어야 할까요? 혼술과 혼밥이 최고의 저녁을 선사할까요?

저는 앞서 나열한 모든 저녁식사 자리가 중요하며, 어느 하나도 제 삶 속에서 빠뜨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업 파트너와의 비즈니스 저녁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직장 회식도 단합 차원에서 소홀히 다룰 수 없습니다. 친구들과의 우정을 확인하는 술자리가 어찌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도 만나기 싫고 혼자 있고 싶은 날에는 당연히 나 자신을 위해 최고의 식사와 술이 놓여야죠.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그리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돈? 직장? 우정?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준을 세우고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데 최우선이 되어야 할 대상을 정하는 데 유용한 기준을 제공하는 책 한 권을 소개할까 합니다. 마이클 헵의 <사랑하는 사람과 저녁 식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합시다>(을유문화사, 2019)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마이클 헵은 저녁 식사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논의가 우리의 주제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만약 되르테 쉬퍼의 책 제목이 말하듯이,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저녁식사>(웅진 지식하우스)라면, 누구와 함께 식사하고 싶으세요? 내일이면 내가 세상을 떠난다고 가정해 봅시다. 누구를 초대하고 싶으신가요? 그들이 초대에 응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이미 살아있지 않아도 좋다고 합시다. 내 가는 길의 마지막을 밝혀줄 그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제 경우에는 가족들입니다. 지금도 건강히 살아계시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여동생 가족들입니다. 결혼을 약속한 제 배우자도 여기에 포함되겠지요. 죽음을 눈 앞에 그리면, 삶의 우선순위가 매우 명확해집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내가 내일 죽는 대신 일주일 뒤에 죽는다고 가정해봅시다. 최우선 순위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다만 식사 자리에 초대할 사람은 우선순위에 따라 늘어날 수 있습니다. 가장 친했던 친구들이 뒤를 잇습니다.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할 생각은 떠오르지 않네요. 하지만 햇빛이 환히 내리쬐는 점식 식사 때 만나고 싶습니다. 참으로 잔인하고도 솔직한 이야기지만, 직장 동료나 비즈니스 파트너는 순위에 들 수 없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혼자 먹을 생각은 없습니다.


마이클 헵은 사랑하는 사람과 저녁 식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할 때 좋은 질문 22개를 목차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다양한 에피소드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두 번째 질문인 "사랑하는 고인이 해 준 요리 중 기억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를 살펴봅시다. <나는 4시간만 일한다>와 <타이탄의 도구들>로 저자인 팀 페리스는 그가 잘 때마다 만들어 마시는 간단한 토닉이 그의 멘토였던 고(故) 세스 로버츠 박사를 생각나게 한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은사를 잠들기 전에 항상 기억하도록 노력한다는 말이지요.

마이클 헵에 따르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리라는 주문을 받을 때 미슐랭 가이드의 추천을 받은 레스토랑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다들 사랑이 느껴졌던 식사를 떠올리지요. 말하자면, "단순히 센 강변에서 먹은 낭만적인 식사 같은 게 아니라, 친구들과 가족이 모여 활기가 넘치고 사랑이 가득하다 못해 '넘쳐흐르던' 식탁을 기억하는 것입니다."(80쪽)

그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고인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 준 음식을 생각하고, 만들고, 먹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추억을 떠올린다. 꼭 음식에 관한 추억이 아니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나눈 음식을 접할 때면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이다."(81쪽)

<요리가 자연스러워지는 쿠킹 클래스>(현암사, 2018)의 저자인 캐슬린 플린은 36세 때 회사에서 해고된 뒤, 파리로 가서 요리를 배워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캐슬린이 엄마를 모시고 북투어를 떠났을 때, 그 둘은 이름 없는 카페에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평범한 빵에 수제 버터와 잼이 나왔고, 모녀는 아무런 생각 없이 빵에 버터와 잼을 발라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엄마는 빵을 내려놓고 마냥 울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캐슬린이 이유를 묻자, 한참 뒤에야 진정된 엄마는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가 만든 잼과 맛이 똑같았어." 캐슬린의 외할아버지는 맛난 잼을 딸에게 자주 만들어주었지만, 레시피를 남기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녀의 엄마는 그 레시피를 복원해보려고 무척이나 노력했지만, 몇십 년 간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시골의 어느 카페에서 똑같은 맛을 내는 잼을 만나고 울음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죽기 바로 전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해 물었을 때, '엄마가 만든 카레'가 많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습니다. 일본 최고의 인기남 순위에 몇십 년간 빠지지 않았던 후쿠야마 마사히루는 여자 친구가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음식으로  '엄마가 해 준 카레'를 꼽았지요. 제 경우에도 어머니께서 해 주신 카레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서, 지금도 원하면 그 카레를 맛볼 수 있지만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저였습니다. 저는 현재 제 자신과 또렷이 연결된 음식이 없습니다. 억지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만, 이 책을 읽은 뒤로는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엄마 카레 레시피를 물려받는 편이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인 떡볶이나 주먹밥도 좋습니다. 그 무엇이 되었든, 제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저를 추억하는데 도움이 되는 음식을 지금부터라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14번째 질문인 "당신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고 싶은가요?"를 다룬 챕터에는 슬로 라이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사례가 나옵니다. 카산드라 욘더는 자립 농가에 사는 농부입니다. 그녀는 자기 주변의 농부들이 본인의 집에서 장례식을 치르기를 원하지만, 사회 시스템상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집에서 치르는 장례식"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캐나다에서 공동체 장례를 위한 온라인 학교를 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 온라인 학교의 지향점이 슬로 푸드 운동과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슬로 푸드 운동가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의 재료가 어떤 경로를 거쳐 가공되었는지를 모르는 데서 소외감을 느낍니다. 결국 자신이 먹을 음식에 대한 권리를 되찾는 최후의 방법은 뒤뜰에서 직접 재배한 재료로써 요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집에서 치르는 장례식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의례를 타인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주관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현대인이 장례를 집에서 주관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장례식은 인생의 4대 통과의례인 관혼상제 중 하나에 속할 정도로 중요하니다. 그리고 본디 의례(ritual)는 정신을 잃을 정도의 슬픔에 잠긴 가족들이 필요한 절차를 빠뜨리지 않도록 배려하는 세심한 절차였습니다. 그렇게 좋은 풍습이 허례허식으로 변질되어 현대인들에게는 끔찍한 일이 되어 버렸지요. 장례식의 모든 절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허례허식을 피하면서도 가장 필요한 일만큼은 돌아가신 분을 위해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14번째 질문의 교훈이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대학교에는 죽음에 대한 수업이 한편을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끔찍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입에 담기 조차 어려운 주제이지요. 하지만 "내 생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누구와 함께 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은 쓸데없는 회식을 없애고 진정한 워라밸을 이루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실제로 예일 대학의 최고 인기 강좌는 셸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엘도라도, 2012)입니다. 내가 내일 죽는다고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진정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제가 남은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가 분명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게다가 영원한 삶은 활기보다는 지루함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내일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합니다.

마이클 헵은 "우리가 저녁을 먹는 한, 식탁은 가정생활의 핵심이다. 서로를 알게 되고 자신을 발견하는 곳이다."라고 말했습니다.(52쪽) 오늘 저녁, 마지막 식사에 함께 하고픈 이들과 함께 따뜻한 시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2월 16일, 잠실 샤롯데 씨어터에 뮤지컬 <드라큘라>를 보러 갔다가, 유사 입관체험(?)을 했습니다. 괴기스러운 사진을 끝으로 오늘 에세이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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