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직장생활을 회상하다
나는 공기업 또는 준(準)공기업에 해당하는 은행이라면 어느 곳이든 좋았는데, 운이 좋아 그중 한 곳에 입행하게 되었다. 내가 국책은행에 취직한 이유는 단 하나였는데, 돌이켜보면 그 단 하나의 이유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되는 결정에 이르게 된 것 같다. 나는 처음부터 은행 업무에 흥미가 없었다. 나는 공기업에 취직하면 정시에 퇴근해서 일찌감치 독서할 여유가 있으리라 잘못 생각했다. 내가 공기업에 들어갔던 2011년에는 이미 공기업 입사를 준비하던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공기업의 퇴근 시간이 이르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비교적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직장을 갈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내가 공기업의 전반적 상황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연수 마지막 날 가고 싶은 부서를 써내는 시간이 되자 누구도 자발적으로 가기를 꺼려하는 지방근무를 자원했다. 동기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내가 왜 이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신입행원들에게는 직장생활을 지방에서 시작하면 차후 고위직은 꿈도 꿀 수 없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소문의 사실 여부는 알 길 없으나, 나는 타인이 보기에는 한심하게도 고위직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퇴직하는 그날까지 지방의 모든 지점을 다 돌면서, 한국의 지방을 죄다 살아보고 그 참맛을 속속들이 느끼기를 바랐다. 오전과 오후 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는 일찍 퇴근해서 독서하며, 주말에는 근무하는 지역 근방의 모든 명소들을 섭렵하며 즐거운 경험을 늘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불행하게도, 공기업에서도 야근이 끊이질 않았고 업무강도는 높았다. 또한 지방에 근무하면서 합숙소에 살게 되니, 밤마다 선배들에게 끌려 나가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단언컨대, 선배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낮에 저지른 업무 실수를 크게 꾸짖지 않았으며, 저녁 술자리에서 그 실수를 바로잡아주고 관련된 업무들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배정받은 지점은 몇 년 동안 신입행원이 전혀 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행여 내가 은행을 나가버릴까 두려워한 선배들은 마땅히 꾸짖음을 들어야 할 내게 더욱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나 그토록 다정한 그분들은 모두 나와 나이가 10살 이상 차이 났으며, 가끔씩 나와 심한 견해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정년이 어느 정도 보장된 공기업 생활에 익숙한지라, 오늘날 젊은이들처럼 퇴근 후에도 자격증이나 유학(遊學) 준비로 분주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들은 신입행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제2의 인생을 대비하기 위해 은행 업무와 실질적인 관계가 없는 공부를 시간을 쪼개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입행원들이 은행 업무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으면서 여전히 더 좋은 직장-예컨대 외국계 은행이나 증권회사-으로 ‘언제라도 도망갈’ 만반의 준비를 따로 갖추려 든다는 사실에 매우 불편해했다.
나는 주말마다 팔도를 유람하는 대신 고속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입행 동기들과 어울렸는데, 그들 또한 선배들과 이런 문제들로 인해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고 있었다. 물론 동기들 가운데에는 현재의 직장을 단지 ‘더 좋은’ 직장을 가기 위한 단계 정도로 인식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기들은 은행이 ‘정말로’ 정년을 보장해준다면, 구태여 힘들게 퇴근 후에도 쉬지 못하고 은행 업무와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공부를 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들이 속한 공기업조차도 더 이상 정년을 보장해줄 수 없으며, 자신들 또한 그런 은행을 탓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은행 업무는 전문직이 아니라서 은행을 나온 뒤에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 일단 은행에서 많이 벌어놓았다가 그 돈으로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따라서 남들이 보기에 한국 최고의 직장을 다니는 내 동기들은 미래를 불안히 여기기에 현실조차도 항상 불안해했다.
하지만 선배들이나 대부분의 동기들에게 가장 미스터리인 인물은 다름 아닌 나였다. 왜냐하면 나는 유학이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지도 않으면서, 주어진 업무 외에는 전혀 일을 하려 들지 않고 심지어 회식에도 참석을 꺼려하며 소설책만 읽어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을 결국 견디지 못한 것은 내 선배들이나 동기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2년간의 지방 근무 이후 서울 본사로 발령받았지만 나는 여전히 업무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결국 내게 잘해주는 선배들에게 너무나 죄송해서 더 이상 은행을 다닐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은행을 그만두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살 것인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는 분명했다. 나는 독서를 좋아했다. 그리고 남들 보기에 부끄러웠지만, 글쓰기도 독서 못지않게 즐겼다. 독서의 경우에는 아무리 많이 해도 나 자신의 창작물을 남들 앞에 내놓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부담이 적었다. 하지만, 창작의 경우는 달랐다. 나는 어찌나 소심한지, 제법 잘 썼다고 나 스스로 여기는 글조차도 도저히 남들 앞에 내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글로 먹고사는 사람도 아닐뿐더러 타인들은 내 글을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글을 남들에게 보여주려는 생각만 해도 벌거벗은 느낌이 들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을 향한 내 욕망은 여전히 꿈틀거렸다.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좋으니, 내 한평생 쓰고 싶은 대로 쓰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갈수록 확신으로 변했다.
철학자들의 철학자라 불리는 철학의 왕자 스피노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직 제안을 마다하고, 낮에는 유리를 깎고 밤에는 저술을 다듬으며 짧은 생을 살았다. 나는 스피노자보다 운이 좋아 자신이 태어난 공동체에서 쫓겨나지도 않았고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도 아니며, 심지어 은행에서 얼마간 벌어놓은 돈도 있어 주머니 사정 또한 나으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현실과 이상, 삶과 취미, 먹고사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쪼갰던 나는 결국 경제학이 그로 인해 모순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내 삶의 모순을 인식했으며, 이에 따라 내 삶이 분리되어서는 행복하지 못하며 나는 내 행복을 위해 일관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론에 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여자 친구를 설득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