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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송크란 인 카오산 (2)

2. 내 학창시설을 회상하다

나는 2014년 태국의 송크란 축제 일정에 맞춰 3박 4일의 휴가를 내어 방콕에 왔다. 그리고 휴가가 끝난 뒤 회사에 복귀하자마자, 다니던 은행에 사표를 낼 예정이다. 사표를 먼저 낸 뒤 휴가를 떠날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사표를 내고 인수인계를 서둘러야 할 때에 여행을 떠나버리는 것은 그동안 나를 정성껏 돌봐주셨던 회사 동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했다. 처음에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은행을 그만두어야 할지 아닐지 심사숙고해 최종 판단을 내려 보자는 생각이었으나, 사실 내 마음속에 결정은 이미 나 있었다. 은행을 그만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면 여행을 다닐 여유가 당분간 없을 것 같아서, 평소에 가장 가고 싶었던 축제 장소에 이렇게 왔다. 함께 여행 온 회사 동료 찬우의 소개로 3월에 A대학 철학과 교수를 소개받았고, 대학원에 입학해서 2학기부터 그 교수에게 사사하기로 했다. 그 교수가 진행하고자 하는 여러 프로젝트들에 참여하고 학과 조교를 맡으면 당분간 먹고사는 데에는 큰 지장 없겠다고 판단했다. 몇 년 동안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 현재로서는 전혀 후회 없다. 오직 읽고 싶은 책을 실컷 읽고 내 마음대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소설을 좋아했고,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내게 작가의 재능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한 뒤 쓰기보다는 읽기에 치중하게 되었지만, 나는 그래도 소설을 읽으며 행복을 느끼는 나 자신에 만족했다. 나는 전업 작가의 길은 꿈도 꾸지 않았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글 쓰는 재능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했으며, 나보다 능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작가들이 생계를 해결하지 못해 타락하거나 자살하는 사례들을 여럿 접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나는 작가란 내게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으며, 안정적인 직업을 구해 생계를 유지하며 취미 생활을 여가에 즐기자고 마음먹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지점에서 이미 나는 직업을 현실로 보고 취미를 이상으로 본 뒤, 직업과 취미를 분리하는 이원론자로 떨어졌다. 즉 문학을 좋아하는 내게 현실은 낯선 곳이니, 현실의 여가에서 취미라는 이상을 실현하자는 이원론자로 사는 것이 나같이 삶의 일관성을 중시하는 이에게 불가능함을 그 당시에는 몰랐던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원론자로 살아가는 것 같으니, 나도 그렇게 이중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자위했을 따름이다. 

나는 말 그대로 멀쩡한 직장에 취업해 현실에서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A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매우 늦은 나이에 결혼하신 아버지께서는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이미 퇴직해서 집에서 소일하셨고, 어머니께서는 전업주부셨다. 내가 고3 때 이미 우리 집에서 직업을 가진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 때 아버지께서는 명예퇴직하셨지만, 사실상 정년을 채운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부족치 않게 보상을 받으셨으므로 별 불만이 없으셨다. 하지만 2000년 한국을 강타했던 ‘바이코리아’ 광풍에 휩쓸려 주식에 거금을 투자하셨다가 몽땅 잃으신 뒤,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고 갑자기 많이 늙으셨다. 아버지께서는 경상도 출신으로 말투가 딱딱하고 웃음이 적고 매우 엄하셨다. 필요에 따라서 회초리를 드는 경우가 잦았으며, 나는 아버지가 무서운 나머지 곁에 잘 가지도 않았고 대화를 해 본 기억도 드물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께서는 허리가 굽으시고 회초리를 들지도 못하시고 손아귀에 힘도 없으시다. 내가 잘못해도 혼내시지도 않고 그냥 아침이면 어디론가 나가셨다 저녁이면 어딘가에서 돌아오신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회초리로 세게 때려 주시고, 강한 억양으로 나를 꾸짖어 주시던 그때가 그립고 차라리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아버지 생각을 하다 보니 눈물이 자꾸 앞을 가려 더 이상 쓸 수가 없을 것 같아, 나의 보잘것없는 대학생활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이와 같은 집안 상황에서 내가 경영학과에 가는 것은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나 또한 직업이라는 현실과 취미라는 이상을 분리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경영학과를 제 때에 졸업해 취직해서 취미생활을 즐길 돈을 마련하고픈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경영학 수업은 대체로 매우 따분했다. 내가 배우는 재무관리나 회계관리에서 나 자신의 창의를 발휘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나는 단순히 과거의 지식을 옳든 그르든 무조건 암기해야 했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효율적 시장가설(efficient market hypothesis)에 대해 배우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손을 들어 질문한 적이 있다. 나는 시장이 효율적이라는 가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시장이 효율적이라면, 그 가설을 지지하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둘씩이나 보유했던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 Long-Term Capital Management)는 어째서 1998년에 파산했는가? 그들이 효율적이라고 말할 때, ‘효율’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경제학에 무지한 학부생의 입장에서 효율적 시장가설이 틀렸다고 주제넘게 주장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런 질문들에 대한 재론의 여지없는 답변을 교수로부터 듣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배우는 것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시간 낭비로 여기는 교수와 동급생들의 예의 바른 무시만을 접했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이와 같은 강의를 듣게 된 덕분에 나는 효율적 시장가설을 지지하는 이들이 현실과 이상을 분리하는 이원론 자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즉 시장지상주의자들은 효율적 시장을 ‘이상’으로 여기는 반면, ‘현실’은 이상에 미치지 못하므로 ‘비효율적’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효율적 시장가설을 현실에 적용할 때에는 가설을 ‘약화’시킨다. 자신의 이론에 현실이 맞지 않으면 이론은 완전하고 현실은 불완전하다고 결론하는 점에서 그들은 편협한 인간중심주의자들이다. 

나는 현실이 이상의 근사치가 아니라, 이상이 현실의 근사치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개발한 여러 수식들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현실이 비효율적이거나 불합리한 것이 결코 아니다. 하물며 효율적 시장가설 등은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등에 의해 이론적·실증적으로 충분히 비판받았으며, 나도 그 수업을 들었을 당시 이미 스티글리츠의 책을 여럿 접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째서 교수는 최소한 효율적 시장가설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접할 수 있는 책을 권해주는 간단한 수고조차도 들이려 하지 않았을까? 

대학 시절의 내 견해들이 모두 옳다 고집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이런 의견들을 지니고 살았으며, 상기한 불만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향후 취업을 통한 가족부양을 위해서는 자퇴하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 또한 지니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나 자신의 필요에 따라 경영학 전반을 암기하는데 나름대로 노력했으며, 그로 인해 학점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하고 나서야, 그나마 대학생활이 행복한 편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fJCEq4Gg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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