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도쿄여행 2일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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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락락동자(樂樂童子) 알이즈웰입니다. 3박4일 도쿄 여행 이튿날 아침, 새벽 5시에 그만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저는 항상 이렇습니다. 여행을 가서는 아침 6시 이후에 일어나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조용한 숨소리들이 울려 퍼지는 캡슐호텔 침대를 살며시 빠져나와 샤워를 마친 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오늘의 계획을 짜봅니다.
본디 어제는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 늦게 일어나려 했습니다. 여행 유튜버 김제법이 그러하듯, 이름 모를 동네 이자카야에 가서 현지인들과 어울리며 가라오케에서 노래도 부르는 망상을 했더랬죠. 저 같은 "혼자 놀기의 대가"가 가능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자정이 넘어 잠이 들었으니 좀 더 잘 법도 한데, 그만 일찍 일어났으니, 이를 어찌합니까! 한국과는 달리, 일본의 가게들은 보통 11시 쯤에 문을 엽니다. 다시 말해서, 달리 갈 곳이 없다는 뜻이지요. 물론 이 때는 요요기 공원의 아침이 그렇게 좋은 줄 몰랐습니다. 진작 알았다면 아침에는 요요기 공원에 걸어가서 즐겼을 터인데 말이죠. 하지만 이날 아침은 그런 것들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원래 이번 여행에 하지 않으려 했던 <봇치 더 록!> 성지순례를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원래 도파민은 무언가를 실제로 즐길 때 못지 않게 계획을 짤 때 많이 터진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물론 경험상으로도 분명하죠. 여행 계획을 짤 때 도파민이 뿜뿜한다는 것을 잘 아니까요. 오늘이 드디어 <봇치 더 록!> 성지순례를 하는 날인가! 타노시이!
<봇치더록! ぼっち・ざ・ろっく! BOCCHI THE ROCK!>은 하마지 아키가 그린 4컷 만화입니다. 2018년부터 연재되었는데, 2022년에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자 메가 히트를 기록합니다. 극도로 내성적인 고등학생인 고토 히토리가 다른 멤버들과 함께 "결속 밴드"를 결성해서 성장해 나가는 스토리입니다. 멤버들의 개성이 뚜렷하고, 애니에 나오는 곡들이 매우 훌륭하며, 병맛 개그와 가슴 따뜻한 우정이 어우러진 수작 중의 수작입니다. 아래 사진의 왼쪽부터 야마다 료(베이스), 이지치 니지카(드럼), 키타 이쿠요(보컬, 서브기타), 고토 히토리(메인 기타)입니다.
이 애니메이션 상영 후 일본의 악기 회사들이 난데없는 판매 호조를 누렸다는 후일담도 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밴드 덕후들에게도 심오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설의 밴드 애니메이션 <케이온>이 인기를 누리면서, 주인공이 다루었던 깁슨 기타가 갑자기 많이 팔렸던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깁슨 기타가 결코 싸지 않거든요. 그래서 애니메이션 보고 반해서 자기 실력에 맞지 않는 고가의 깁슨 기타를 샀다가 후회하고 중고 시장에 내다 판 오타쿠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깁슨 기타 중고품은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사야 한다는군요. 매물이 많은 데다가 거의 새 것에 가깝거든요. 사실 중고품은 기타가 아니더라도 일본에서 구입하는 편이 낫습니다. 관리 상태가 매우 훌륭하거든요. 패션에 관심이 있어 빈티지 샵을 배회하는 패션 오타쿠라면 잘 압니다.
운동 유튜버 김계란이 <봇치더록!>을 베이스로 QWER을 만들었다는 사실 또한 바위게(QWER 팬클럽 이름)에게는 상식입니다. 아래 사진의 왼쪽부터 마젠타(베이스), 쵸단(드럼), 이시연(보컬, 서브기타), 히나(메인 기타)입니다. <봇치더록!> 애니메이션은 일본에서 예상치 못하게 엄청난 인기를 얻어서 2기가 나오기를 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는데요. QWER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 또한 매우 유사해서 관심을 끕니다. 저는 완성형보다는 성장형이 취향이거든요.
QWER은 2024년 초에 일본으로 여행을 가서 <봇치더록!> 성지순례를 강제로 하게 됩니다. 5월 10일 대림대학교 축제에 가서 바위게가 되기로 작심한 저는 <봇치더록!>과 QWER 시모키타자와 성지순례를 오늘 함께 해치울까 합니다.
제가 구입한 "72시간 무제한 이용 도쿄 메트로 패스"는 JR라인 및 여러 간선들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시모키타자와 역은 요요기우에하라 역 다음인데, 도쿄 메트로 패스로는 요요기우에하라 역까지만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저와 같은 "도보여행 매니아"라면 시부야에서 그냥 시모키타자와까지 걸어가도 됩니다. 하지만 아직 길이 익숙하지 않은지라, 저는 요요기우에하라 역까지 지하철을 이용한 뒤 시모키타자와 역까지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요요기우에하라에서 시모키타자와까지 이어진 거리가 너무도 평온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일본의 주택가 거리이지만, 고급지면서도 편안한 분위기가 몹시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장미꽃이 만발한 어느 주택, 아침부터 울리는 새소리, 그리고 고급 주택단지에서 조깅을 하러 나오는 할아버지 등등.
보통 시모키타자와를 가기 위해서는 신쥬쿠 역에서 오다큐 오다와라 선을 타고 이동합니다. 그런데 신주쿠 역 자체가 마계인데다가, 이런저런 이동시간을 고려해 보았을 때 딱히 시간 차이도 없습니다. 시부야 근처에 숙소를 잡으셨다면, 요요기우에하라에서 걸어가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참고로 신주쿠는 하루 유동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진정한 헬(hell)입니다. <주술회전>에서 고조 사토루와 료멘 스쿠나가 결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죠. 아마 헬이라서 장소를 그렇게 설정했나 봅니다.
이 신주쿠 결전에서 아쿠타미 게게(芥見 下々, あくたみ げげ) 작가는 작중 최고 인기 캐릭터인 고조 사토루를 스쿠나에 비해 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범부"로 격하시킵니다. 그의 상대였던 료멘 스쿠나는 "세계참(세계를 통째로 잘라서 그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을 자르는 기술)"으로 고죠 사토루를 반토막내었는데, 이때부터 고죠 사토루의 별명은 "더위사냥"이 됩니다. <주술회전>의 오랜 팬들은 거칠게 항의했으며, 당황한 작가가 휴재를 거듭하는 만행이 이어졌죠.
2024년 5월 현재 <주술회전>(만화)은 고조 사토루 죽음 이후에는 그냥 "그들만의 리그"가 되었습니다. 그림체는 한층 지저분해지고 스토리 전개 또한 매우 산만합니다. 작중 최고 인기 캐릭터를 어처구니없게 리타이어(retire)시킨 데에 따른 후폭풍으로 인해 작가의 멘탈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중 인기 캐릭터들을 대충대충 스쿠나 손에 죽여버리고, 주인공 이타도리 유지에게 포커스를 집중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요. 어차피 소년만화의 정해진 패턴 상, 주인공이 최고 악당을 무찌르고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거하게 뇌절하는 짓은 그만하고, 적당히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이런 쓸데없는 주제에 괜히 흥분하는 것이 오타쿠의 특징입니다).
20분 정도 걸었나요? 드디어 시모키타자와 역에 도착했습니다! "시모키타자와"라는 역명만 봐도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봇치더록!>의 흔적을 찾아 성지순례를 떠나야 할 때입니다!
시모키타자와는 예전부터 연극과 라이브 극장의 성지였습니다. 혜화와 홍대를 합쳐놓은 이미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도쿄 외곽에 위치하기에 상대적으로 한산한 편입니다. 좁은 동네이기에, 돌아보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습니다. <봇치더록!> 덕후들에게 필수품인 지도를 따라서 가봅시다. QWER이 시모키타자와를 방문한 영상 링크도 아래에 걸어두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HC7sQsvyWw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벌써 그 유명한 <야자와> 옆 맥주 가게 <리셋 RESET>이 나왔습니다. 별 모양이 상징입니다. 히토리가 키타를 꼬셔서 라이브 하우스로 데리고 가는 장면이지요.
그러고 보니, QWER도 이 곳에서 인증사진을 찍었었지요?
이제 가장 모양 빠지는 제 사진으로다가!
이제 몇 걸음만 더 떼면 바로 <빌리지 뱅가드> 레코드 가게가 나오겠군요!
사진의 좌우 반전까지 체크하기에는 제가 너무 게으르네요. 게다가 아침이라 <빌리지 뱅가드>는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티셔츠 등 원하던 굿즈를 사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오타쿠인 저는 마냥 좋습니다, 허허허.
뭐, 복잡하게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몇 걸음 떼니, 바로 그 유명한 자판기 스팟이 나옵니다. 니지카와 히토리가 대화를 나누었던 바로 그 전설의 장소. <봇치더록!> 팬이라면, 벌써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졌을 터입니다.
니지카 비밀 자판기 씬! 최초 한국어 더빙 [#봇치더락] 한국어 더빙 by 삐약컴퍼니 - YouTube
아마 다음 번에 제가 시모키타자와를 찾을 때는 <봇치더록!> 2기가 나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또 새로운 보물찾기를 즐길 수 있을텐데 말이지요.
이제 발걸음을 옮겨 라이브 하우스 쪽으로 향합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스타리 starry> 이지만, 실제 이름은 <쉘터 shelter>입니다. 저녁이라면 네온사인 덕분에 쉽게 찾았을 터인데, 길치라서 좀 헤매었습니다.
이곳을 방문해서는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QWER의 <고민중독>을 개사한 <맥주중독>을 한 곡 불렀습니다. 그러고 보니, 차라리 꼭두새벽에 온 편이 나았네요. 낮이었다면 40대 아재가 부끄럽게 여기에서 개미 목소리로 덜덜 떨면서 노래를 부를 용기를 내지 못했을테니 말이지요.
이제 결속밴드가 "단체 사진"을 찍는 주차장으로 이동합니다.
QWER은 이 곳의 사진을 찍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봇치더록!> 팬이기도 하니, 또 한 건 해치워야죠. 사실 두 번 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이래저래 많이 찍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늙어서 그런지, 벌써부터 지쳐오기 시작하는 것이........
이제 <봇치더록!>의 또 다른 명장면인 "아티스트 샷" 촬영 장소를 찾아가 봅시다. 찾아갈 것도 아닌 게 바로 옆에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의 그 정겨운 느낌과는 달리, 다소 황량한 주차장 한 켠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소 자체보다는 우리가 그 장소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더욱 중요하겠지요. 저는 타고난 오타쿠인데, 학문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이와 같은 저의 취향 따라 여행하는 것을 그동안 많이 꺼렸던 듯합니다.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학자 입장에서 하기에는 다소 유치하다는 생각이 저를 지배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제 안의 경찰관을 이제 보내주려 합니다. 자기가 정말 즐거워하는 것을 하며 살아야 인생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어느 정도 흥이 가셨으니, 이제 한 군데만 더 방문해보기로 합니다. 바로 QWER이 놀이터에서 달팽이 기구를 타고 노는 그 장소이지요.
이 사진에는 조그마한 사연이 있습니다. 삼각대를 들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달팽이 기구를 타고 노는 사진을 촬영하기가 여의치 않았습니다. 마침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는 백발의 신사가 지나가시길래, 붙잡고 사정해서 찍었습니다. 아마 이런 상황에 익숙하셨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이 많은 오타쿠 팬으로부터 사진 요청을 받기는 처음이셨을 듯합니다. 그래도 어찌나 친절하신지. 다음에 지나가다 뵙게 되면 맛있는 커피라도 대접하고 싶었을 정도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꼭두새벽 <봇치더록!> 성지순례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래보았자, 아직 8시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입이 심심하니, 이제 뭔가를 마시거나 먹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아쉬우나마, 발걸음을 돌려 요요기우에하라 역으로 다시 걸어갑니다. 다시금 <봇치더록!>과 QWER에게 감사드립니다. 내 마음 속 청춘과 오타쿠 기질을 다시 한 번 끌어내어 준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봇치더록!> 성지순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일이 또 있거든요. 하지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오늘은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 떠나렵니다. All is well~~~~!!!!!!! (마지막 사진은 <봇치더록!> 에디션 깁슨 기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