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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 이어서)
[VCR, 달리기(쵸단, 마젠타), 댄스 브레이크(히나, 시요밍)]
<수수께끼 다이어리>가 끝난 뒤, 소등된 무대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무대 뒤의 QWER 멤버들이 주인공인 영상이 대형 스크린에 떠올랐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바위게들을 만난 기쁨에 십대 소녀들처럼 재잘대던 그녀들은 언니즈와 막내즈로 나뉘어 흩어졌습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히나와 시요밍은 무려 건물 밖으로 나가 컵라면과 치킨 먹방을 시작함으로써, '콘서트 중에 먹방을 하겠다'는 공약을 지켜내고야 말았죠. 의상을 교체하는 브레이크 타임 때 컵누들과 교촌 치킨 먹방을 하는 아이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빛나는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데에는 소속사인 3Y코프레이션의 노력이 핵심이었겠지요. 토요일 첫날 팬콘 때에는 충분히 실력 발휘를 못했던 빙빙과 검검. 다음날인 일요일에는 무려 야외에서 백댄서들과 함께 <가짜 아이돌> 등의 무대를 펼치며, 공연을 기다리는 바위게들을 열광케 했습니다. 사실 제가 바라던 장면이 바로 이것이거든요. 과거에 [드림 콘서트]를 가보면, 공연 몇 시간 전부터 자기 가수의 노래를 떼창하는 등 분위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물론 광나루역 부근은 아파트 단지가 많아서, 그처럼 고성방가를 했다가는 신고를 당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검검과 쇠쇠 매니저들이 전면에 나서 <가짜 아이돌> 춤을 추고 소속사 PD인 빙빙이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촬영에 임했던 것은 정말 드물고도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QWER 유니버스'이죠. 가수 혼자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장면이 아닙니다.
한편 언니즈는 동생들이 사라진 것들을 궁금해하는 척(?) 하며, 새로운 무대 의상을 착장합니다. 블랙 앤 화이트 톤의 멋진 제복 스타일로 변신한 그녀들은 채찍으로 바위게들을 조련할 것만 같았죠. 물론 저는 쵸단에게 채찍보다는 주먹으로 맞고 싶지만 말이죠. 그런데 빙빙이 "무대 10초 전입니다!"라고 외치자마자, 그녀들은 서둘러 달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다음 곡이 무엇일지 눈치챘죠. 하지만 그보다는 하지정맥류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인 마젠타, 그리고 무릎 부상으로 인해 다리를 저는 쵸단이 절뚝이며 서로를 부축하고 뛰어가는 장면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쵸단은 아예 오른쪽 다리에 검은 붕대를 감았죠. 힘내라, 바위게들이 끝까지 응원할께! 달려라, 달려! 10, 9, 8, 7.... 숫자는 줄어들고 바위게들의 함성은 커져만 갑니다. 그리고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무대 위에는 쵸단과 마젠타 둘만 서 있습니다. 바로 <달리기>를 부를 타임이죠!
저와 같은 40대 아재에게 <달리기>(2002)는 S.E.S.의 명곡이죠. 윤상이 원곡자이지만, <달리기>는 S.E.S.가 불러서 유명해졌고, 저는 지금도 그 곡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이라는 가사는 삶에 지친 제게 큰 위안이 되었지요.
2024년 QWER의 <달리기>는 사뭇 느낌이 다릅니다. 일단 심장에 곧바로 때려박는 드럼과 베이스의 사운드가 오금을 저리게 하고요. 가사 내용은 지친 이를 달랜다기보다는, 사랑하는 너와 함께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뛰어가고 싶다는 내용입니다. "숨이 차오를 때까지 위로 뛰어올라 구겨진 사랑을 펼치자!" SM엔터테인먼트의 현역 대표 여자 아이돌인 에스파의 앨범에 참여했던 수민(SUMIN)이 만든 곡이라, 더욱 감회가 새롭습니다.
하지만 쵸단과 마젠타는 이번 팬 콘서트에서 이 세련된 곡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건강이 넘치는 두 청춘이 끝을 모르고 뛰어가는 대신, 다리를 저는 두 여자아이가 서로를 부축하면서 함께 절뚝이며 끝까지 간다는 의미이지요. 그녀들의 다리 부상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것일까요? 저는 <달리기>를 그녀들이 보여준 방식으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가슴이 시렸죠. "그래, 맞아. 우리네 버거운 삶 속에서의 2인 달리기는 서로를 부축하면서 끝까지 함께 하는 거야. 삶 자체에서 오는 오해와 힘겨움으로 인해 잠시 구겨졌던 우리네 사랑을 다시 펼치면서 말이지."
그리고 비로소 바위게 앞에 나타나 무대 위에 선 그녀들. 그동안 팬들 사이에서는 <달리기>를 콘서트에서 어떤 방식으로 연주할까, 다양한 견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쵸단과 마젠타는 악기를 직접 잡는 대신, 보컬로만 승부하기로 결정합니다. 또 한 번 신선한 충격을 바위게들에게 안겼죠.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입니다. 몸치인 그녀들의 귀여운 율동을 보완하기 위해, 백댄서들이 줄지어 등장해 화려한 무대를 펼쳤습니다. 제게는 SM의 무대 분위기가 물씬 풍겼는데요. S.E.S.와 천상지희, f(x)와 레드벨벳까지 빠짐없이 팬이었던 제게는 수십 년의 덕질 추억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바위게들이 고대하던 쵸단의 3단 고음! "내게 잠시 틈을 줘. 그리고 밖으로 같이 나가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함께 밖으로 나가자는 쵸단의 돌고래 초음파 보컬에 제 멘탈도 그만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티켓 값이 아까워, 금세 지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KcYX1FYsp4
그런데 언니즈의 멋진 무대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라면과 치킨을 먹던 히나와 시요밍이 어느 샌가 의상을 바꾸고 돌아와 '따로 또 함께' 댄스 퍼포먼스를 시작했습니다.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검정색 크롭티와 데님을 입고 나온 히나는 길고 아름다운 팔과 다리를 놀리며,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BGM 또한 밴드 음악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케이팝 아이돌 뮤직이었습니다. 뒤이어 레드 톤의 크롭티와 와이드핏 저지를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시요밍 또한 파워풀한 무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막내즈는 짧지만 강렬한 퍼포먼스로 바위게들의 얼을 쏙 빼놓았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상상을 초월한 무대를 보여주려는 것일까요?
[VCR, 메아리, 사랑하자]
소등된 무대 위로 다시 오늘의 서사를 이어가는 영상이 스크린에 떠올랐습니다. 이번 팬콘은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서사시였습니다. QWER 멤버들이 모여 앉아, 바위게들에게 '그동안 들려주지 않았던 노래'를 준비하는게 어떠냐고 토론 중이었습니다. <배고파송>, <메아리>, <하프타임>, 그리고 쵸단이 좋아하는 슬립낫 노래 가운데 하나. 명탐정 이시연이 전면에 나서, 바위게들에게 4곡 가운데 어떤 무대가 보고 싶은지 물어봅니다. 그리고 <배고파송>이 가장 인기가 없었지만, 눈을 감고 기다리는 나머지 멤버들에게 시요밍은 <배고파송>으로 결정되었다고 발표합니다. 물론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죠. 그리고 이 4가지 선택지 가운데 부를 곡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제가 수 개월 동안 기다려 왔던 바로 그 곡이지요. 가운데 놓인 물병이 어지럽게 돌아갔지만, 정답은 하나였습니다. 바로 <메아리 Rebound>이지요.
바로 그 종소리, "미!도!레!솔!"이 울리자마자, 바위게들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광란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순간 저는 환상의 트럭에 치여, 이세계로 넘어갔지요. 그곳은 2025년 10월 <오아시스> 내한공연이 진행되는 현장이었습니다. 예매하지도 않았던 저는 그 자리에 있었고, QWER이 오프닝 밴드로 연주하고 있었죠. 그런데제 옆으로 노엘 갤러거가 걸어왔습니다. 제가 물어봤죠. "여기는 어디, 저는 누구?" 그러자 똥씹은 표정의 노엘 갤러거가 내뱉었습니다. "우리 형제는 어차피 돈 떨어져서 잠시 결합한 거거든? 내년에는 다시 해체할 거니까, 티셔츠나 사, 병신아!" 그리고 그는 깁슨 레스폴 커스텀 기타를 거꾸로 든 채, 제 머리를 후려갈겼습니다. 순간 저는 이세계를 빠져 나와, 다시 예스24 콘서트홀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그리고 제 눈 앞에는 바로 깁슨 레스폴 커스텀 기타를 든 히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가락을 놀리며, 멋진 연주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앨범이 공개되자마자 <고민중독 2>로 불리며, 바위게들의 열렬한 지지와 사랑을 받았던 <메아리>. 라이브로 들으니 더욱 빠르고 악기 편성이 화려합니다. 감히 QWER의 <보헤미안 랩소디>로 불릴 만큼 웅장합니다. 2025년 1월 25일 부로 저만의 'QWER 라이브 3대장'이 결정되었습니다. <고민중독>, <가짜 아이돌>, 그리고 <메아리>입니다. 비록 대중성을 고려해 타이틀곡에서 제외되었지만, 밴드로서의 QWER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two top이 바로 <메아리>와 <고민중독>이죠. "네게 들린다면!"의 초고음 파트도 시원하게 소화해내는 시요밍의 보컬에, 저는 다시금 기저귀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는 <메아리>의 주인공은 기타리스트 히나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QWER 곡들 가운데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이 곡을 준비하느라, 히나는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요...라고 적는 순간, TFT를 틀어놓고 <메아리>를 연습하면서 6연승을 했다는 히나의 후일담을 듣고 저는 그만 깨갱했습니다. 다만 저는 히나가 아직 익숙하지도 않은 깁슨 레스폴 커스텀 기타를 굳이 들고 나온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물론 그녀가 나중에 따로 밝히겠지만, 제 망상에 따른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깁슨 레스폴 커스텀을 애용한 뮤지션은 많습니다. 다만 히나에게 저 선택지를 제공한 대상은 아마도 <봇치 더 록!>의 주인공인 고토 히토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히토리는 아버지가 사용했던 깁슨 레스폴 커스텀을 들고 연주하죠. 히나는 고토 히토리 코스프레를 한 경험도 있고요. 히나는 1월 25일 공연을 통해, 고토 히토리의 실사판으로 완벽하게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바위게들은 모두 보았습니다.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서 단독 조명을 받으며 멋지게 기타 솔로를 해냈던 히나! 이번에는 다시 고난이도인 <메아리>에서 깁슨 레스폴 커스텀을 들고 멋지게 기타 솔로를 해치웁니다! 솔로 연주를 끝내고 나서 환히 웃는 히나의 그 미소를 바위게들은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성취감이 가득 묻은 장난스러운 미소, 이제 한시름 놓았으니 더욱 신나게 즐기자는 반짝이는 눈빛! 히나는 본투비 아이돌입니다.
덕질 경험이 오래된 이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인기 아이돌은 단순히 예쁘거나 춤을 잘 춘다고 해서 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매력'이 핵심이죠. 그것도 사람을 쫙 빨아들이는 매력 말이죠. 다만 각 시대마다 원하는 슈퍼스타의 상이 다릅니다. 게임과 애니메이션에 친숙한 2020년대 케이팝 팬들에게, 히나는 '만찢녀 덕통령'으로 서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메아리> 노래 중간에 간간이 들어가는 그녀의 귀여운 코러스 보컬 또한 이곳에서 접할 수 있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아울러 [2024 원더리벳 페스티벌]에서 제이팝 가수들을 응원하면서 "어이! 어이!"를 야무지게 배웠던 바위게들은 <메아리>에서 "어이!'의 절정을 보여줬습니다. 물론 저 또한 그 가운데 한 명이었죠. 어떤 케이팝 아이돌의 무대에서도 팬들이 "어이! 어이!"를 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밴드 페스티벌에서도 특정 팬덤이 응원봉을 흔들지 않죠. 이처럼 QWER은 가수와 팬덤 모두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뉴타입'으로서, <기동전사 건담> 아무로 레이처럼 낡은 케이팝 신을 헤집으며 진격하고 있습니다. QWER이 케이팝 고인물 시장에 던져주는 메시지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한편 <메아리>의 드럼과 베이스, 보컬 파트 또한 헬(hell) 수준의 난이도를 보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모두들 멋지게 해냈죠. 특히 "함께란 이유가 되어 줄테니!"라는 마지막 파트에서 시요밍은 음을 원곡대로 가는 대신(솔파미 파미레 레도미레도) 끝음을 올림으로써(레도미레솔!), 메아리가 영원히 계속 이어져 간다는 느낌을 살렸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한 수였으며, 앞으로도 라이브 무대에서는 이렇게 불러주었으면 합니다. 이날 제가 <메아리>에게 느낀 감동을 따로 책 한 권으로 쓸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콘서트가 끝난 뒤에도 <메아리 직캠>을 음원 추출해서, 산책할 때마다 몇 시간씩 듣고 있습니다. 역시 <고민중독>에 이은 저의 최애곡은 단연코 <메아리>입니다. 이 곡을 세상에 나오게 해준 이즈리얼, 그리고 멋진 라이브 무대를 보여준 QWER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새해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이어진 곡은 마젠타의 '쎈 언니' 캐릭터가 유독 돋보이는 <사랑하자>죠. 이 곡은 정통 락 스타일로, "어이! 어이!"를 외치기에 딱 좋은 곡입니다. 적절한 빠르기에 박자 또한 쉽고 팍팍 꽂히죠. 시요밍이 "뜨겁게 사랑하자!"라고 외치면 마젠타가 "힘껏 달려! 더! 시작한 모험에, 끝은 없는 거야!"라고 받는 파트가 저의 최애입니다. 저는 이 파트를 부를 때 마젠타의 표정이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진심이 담겨 있거든요. 다만 마젠타의 솔로 파트이니만큼, 좀 더 확실한 캐릭터를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모아희단은 언제까지나 그녀를 응원합니다. 일요일 팬 콘서트에서 마젠타는 월드 투어를 갔다가 마추픽추에서 공연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지요. 우리 아희, 하고 싶은 것 다 이루기를!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