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교육진흥법 관련 공청회나 학회를 갈 때마다, 필자는 주로 서양철학 쪽에 속해 있는 주류 교육학자들이 인성론을 확정하는 문제를 소홀히 하는 모습을 거듭 보았다. 그들에 따르면, 성선설이나 성악설, 성가선가악설이나 성무선무악설 가운데 무엇이 옳은가 하는 논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무의미한 다툼이며, 지금은 인성론을 확정하는 것보다는 구체적인 실천덕목과 실천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더욱 시급한 과제라는 것이다. 그 결과, 인성론의 중요성을 제기하는 동양철학자들은 제자백가 시대의 토론에서 아직도 발을 빼지 못한 전근대적 학자들에 불과한 꼴이 되었다. 이제 논리적인 자기모순에 빠진 형태로 시행되고 있는 인성교육진흥법을 보면서, 필자는 실천에 급급한 나머지 이론에 소홀한 데에 따른 필연적 결과에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본 연구는 인성교육진흥법이 전제하고 있는 인성론과 인성교육진흥법의 8대 덕목이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않다는 점을 학문적으로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본 연구의 결론을 미리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맹자의 성선설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선하며, 절대 변하지 않는다. 반면 성가선가악설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선하게도 변하고 악하게도 변한다. 또한 순자의 성악설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만, 악한 본성을 변화시켜 선한 인위로 만들 수 있다(化性起僞). 따라서 순자 또한 인성은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정리하자면, 맹자는 인성이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순자는 인성이 선하게 변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맹자에 따르면 인성은 이미 완전히 선하므로 개선불가능하나, 순자에 따르면 인성은 개선가능하다.
여기서 핵심은 인성의 개선가능성 여부이다. 성가선가악설은 성악설에서 출발하지는 않지만, 결국 未善한 성을 完全한 성으로 개선해나간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 성악설과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인성의 가변성 즉 개선가능성 여부에 따라 구체적인 실천덕목이 바뀐다. 서로 다른 교육이론이 서로 다른 실천덕목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현행 인성교육진흥법은 인성의 개선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인성교육진흥법은 성선설이 아니라 성가선가악설 또는 성악설에 근거한다. 그 법의 제정자들이 이 점에 주의하지 못했더라도,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특정 인성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현행 인성교육진흥법은 구체적인 8개의 인성덕목을 제시했는데, 그 가운데 孝와 禮가 있다. 효와 예는 조선 유학의 전통을 오늘날 인성교육에 도입한 것으로서, 맹자의 성선설에 기초한다. 순자 또한 효와 예를 이야기하지만, 순자의 효와 맹자의 효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리고 인성교육진흥법을 바라보는 그 누구도 효와 예가 성악설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성교육진흥법의 제정자는 효와 예를 8대 덕목에 포함시켰을 때, 분명히 맹자의 성선설에 바탕한 조선 성리학의 전통을 염두에 두었다.
이제 우리는 인성교육진흥법이 자기도 모르게 전제한 인성론과 그 인성론에서 추출되어야 마땅한 8대 덕목이 양립 불가능함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8대 덕목을 모두 충족하는 유일한 인성론은 성선설이다. 따라서 성선설을 인정하고 8대 덕목을 하나도 누락 없이 보존하는 방법이 가능하다. 둘째, 성악설이나 성가선가악설을 인정하고 8대 덕목에서 효와 예를 제외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나머지 6대 덕목인 협동·소통·배려·존중·책임·정직이 어째서 성악설이나 성가선가악설로부터 도출 가능한가를 증명해 보여야 할 책임과 의무는 여전히 그 법안의 제창자에게 남는다. 이는 학자로서의 기본 소양 및 학자적 양심과 관련된다.
필자가 보기에, 인성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많은 교육학자들은 연못 속의 붕어와 같다. 자신이 성악설과 성가선가악설의 물에 푹 잠겨 살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특정 인성론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주장하겠지만, 슬프게도 그들은 이미 특정 인성론에 갇혀 있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인성론의 중요성을 이해했다면, 적어도 인성교육진흥법 내에 논리적 자기모순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자백가 시대 사상가들만큼도 문제의식을 지니지 못한 일단의 학자들이 내놓은 결과물이 바로 절름발이 인성교육진흥법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성선설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인성론은 서로 다른 실천덕목을 갖출 수밖에 없다. 필자는 논리적 일관성을 갖추지 못한 누더기 법안으로는, 애초의 좋은 의도와는 달리 결코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